풍찬노숙 7년째, 대학교육 정상화를 위한 투쟁

김영곤, 김동애 교수 부부가 천막농성하는 이유

등록 2013.08.28 11:39수정 2013.08.2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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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천막 김영곤 김동애 교수가 7년째 생활하고 있는 여의도 천막이 비를 맞고 있는 모습 ⓒ 지요하


충남 태안에서 살고 있는 필자는 2010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꼬박 1년 동안 매주 월요일 오후 서울 여의도를 갔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국회의사당 근처 길거리에서 봉헌하는 4대강 파괴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생명·평화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였다.

미사 장소인 국민은행 앞 한 곳에 천막 한 채가 있었다. 임시로 서 있는 천막은 아닌 것 같았다. 매무새가 단단해 보여서 연륜이 느껴졌다. 곧 무슨 천막인지를 알 수 있었고, 그 천막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알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만나고 또 함께 미사를 지내므로 곧 친숙한 사이가 됐다.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 부부였다. 나는 그들 부부가 왜 거기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지를 알게 됐고, 마음 속으로나마 동조와 성원을 보내면서 깊은 연대의식을 지녔다. 그러나 여의도 거리미사가 2011년 11월에 끝남과 함께 한동안은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 부부가 걱정되고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2년 7월 정의구현사제단이 '대한문미사'를 시작하여 나는 다시 매주 월요일 오후 서울에 가게 됐고, 거기에서 그들 부부를 매주 볼 수 있었다. 

그들 부부의 여의도 천막생활이 만 6년을 넘기고 7년 째 접어드는 시점에서 그들 부부와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학생운동과 노동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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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천막 앞의 부부 7년째 천막생활을 하고 있는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의 지난 겨울 모습 ⓒ 지요하


김영곤 교수는 1949년 충남 당진 고대면에서 태어났다. 보덕포 근처인 고대면 슬항리에 고향집이 있다. 7남매 중 셋째인 그는 고대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갔다.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용산고를 거쳐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일이었다. 

"'시월유신'이 선포되기 직전인 1971년 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적을 당했어요. 그 후 공장에 들어갔지요. 그때부터 노동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가 공장에 들어간 것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노동자의 삶을 직접 체험하면서 노동자의 동지가 되기 위한 뜻이기도 했다. 당시 노동자의 삶 안에서 노동운동가로 살아가는 선배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은 탓이었다.  

그가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결심하고 공장으로 들어갈 무렵 청계천에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벌어졌다. 전태일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사건은 같은 또래의 김영곤씨에게 큰 충격과 함께 노동운동에 대한 뜨거운 사명감을 안겨주었다. 학과 교수를 도와 전국노동자 여론조사를 하며 보았던 노동현장들은 그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씩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숙사도 없고, 있어도 닭장 같은 곳이었죠. 임금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었고요. 사람이 기계였던 거지요."

그는 구로동에서부터 인천공단까지 노동의 영역을 넓혀갔다. 페인트공장과 기계가공 공장에 몸을 담았고, 냉동기 기능사, 보일러 기사 등등 전전했다. 대한광학, 대우중공업 등에 몸을 담기도 했다. 그는 근로사업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해나갔다. 20대 중반 시절이었다. 

"1981년 인천 대우중공업에서 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고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학생 때 형을 받았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짤렸지요. 다시 안산에 내려가 '일진'이라는 주식회사에 입사했지만 3년 뒤 봄에 임금인상 농성을 하다가 또 해고당하고 수배자가 됐어요. 87년 '6월 항쟁' 때는 경기남부와 서울지역에서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에 맞서 민주항쟁을 벌였어요. 안산노동자권익투쟁위원회, 수원노동상담소, 경기남부연합, 경수노련 활동을 했고요."

노동현장 집대성한 저서 출간, 대학 강단에서 노동 강의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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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천막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가 7년째 생활하고 있는 여의도 천막 앞에 설치되어 있는 피켓들 ⓒ 지요하


1990년대 들어서서도 계속 노동 현장에서 삶을 이어온 그는 삼성전자 노동조합 결성 추진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민주노총 결성을 도왔다. 1992년에는 그 동안의 노동자 대중운동을 토대로 새롭게 결성된 자주적 노동운동단체의 전국적인 상설 공동투쟁체인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1997년 27년 동안 이어온 노동운동가 생활을 접게 된다.

"1995년에 민주노총이 생기면서 노동사회 운동이 노동조합과 정치권이라는 두 축으로 나뉘었어요. 그런 이유들로 당초의 노동운동이 변화됐고, 그런 상황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저도 1997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활동을 접으면서 노동운동을 그만두었지요."

그는 곧바로 집필 작업에 들어간다. 왜 노동운동이 변화됐는지, 그동안의 노동운동 역사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촘촘히 쓰고자 했다.

집필 작업은 꼬박 8년 4개월이 걸렸다. 2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노동현장에서 땀 흘리며 삶을 이어온 그는 한국 노동운동계의 산증인이었다. 그가 노동현장에서 체험하고 체득한 것을 바탕으로 한국의 노동사를 세 권의 책으로 집약하는 데는 8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2005년 김영곤씨는 <한국노동사와 미래>(선인 간)라는 세 권의 책을 동시 출간했다. 책이 출간되자 고려대 경영학과 강수돌 교수가 그에게 대학 강의를 제안해 왔다. 김영곤씨는 강수돌 교수의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대학생들에게 한국의 노동 현실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강 교수는 김영곤씨를 고려대 강사로 추천을 했고, 그 덕에 김씨는 2005년 9월부터 모교 강단에서 '노동의 역사'와 '노동의 미래' 두 과목을 강의하게 됐다. 

그는 학생들에게 '노동의 가치'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내 노동이 중요하면 남의 노동도 중요한 법이다. 노동은 단순히 임금만이 목표인 것도 아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부터 교육, 건강, 민주주의, 생태환경 등 모든 분야에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노동일 수밖에 없다. 노동은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신성하다는 정의를 가지게 된다.

"노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 CEO가 되더라도 약자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상생하는 자세, 또 약자의 위치에 서게 되더라도 종속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자세, 제국주의적이고 천민적인 자본주의에서 탈피하려는 의식을 지녀야 한다."

이런 기본 개념을 설파하며 그는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노동 현장에서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그는 풍부한 깨달음과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의 가치와 역사를 대학생들에게 전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꼈다. 교육자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부부가 함께 하는 고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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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안의 인터뷰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가 7년째 생활하고 있는 여의도 농성천막 안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 지요하


김영곤 교수의 부인 김동애 교수는 1947년생이다. 충남 부여군 홍산면이 고향이다. 대전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모교인 숙명여대와 한신대, 대전 목원대 등에 출강했다. 그리고 1992년부터 한성대학 대우교수로 일했다.

그러다가 1999년 9월 한성대가 그에게 사전 통지 없이 대우교수에서 강사로 처우를 해 사과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성대를 상대로 '직위해제 및 감봉 무효' 소송을 제기한다. 그 일이 빌미가 되어 2000년 해직을 당하고 소송에서도 기각되어 다시 노동부로 가져가 근로기준법에 호소해 보았지만, 당시 검찰은 노동부가 판단하는 한성대의 근로기준법위반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학 강사는 근로기준법 대상이 아니고 고등교육법 대상이라 했다. 그때 비로소 강사에겐 법적지위, 특히 교원지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교원지위 회복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되었고, 퇴직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5년 동안의 법정 싸움 끝에 승소를 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퇴직금은 고작 600여 만 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의 해직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는 해직과 동시에 고등교육법 개정 운동, 대학 강사 교원지위 회복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가 처음 만난 때는 대학재학 시절이었다. 고려대 경제학과 학생이던 김영곤씨는 중국어를 함께 공부했고,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중국어과 학생조교로 활동했다. 그때 중국(대만) 유학을 준비하던 숙명여대생 김동애씨가 중국어를 배우기 위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다니게 되었다.

1971년 10월 '위수령'으로 김영곤씨는 고려대에서 제적당하고 수배되면서 공장에 들어갔다. 김동애씨는 독재가 강화되는 것을 보고 유학을 포기하고 숙대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면서 김영곤씨의 도피생활을 도왔다. 1974년 김영곤씨가 '민우지' 사건으로 구속되자, 옥바라지를 했다.

그러다가 김영곤씨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그들은 결혼을 했다. 처음 만난 때로부터 6년만이었고, 김영곤씨는 27세, 김동애씨는 29세 때였다. 김동애씨는 포기했던 대만 유학을, 남매를 낳고 기르다가 1983년에야 실현시킬 수 있었다.      

오랜 노동운동가 생활을 접고, 8년 여 동안 <한국 노동사와 미래> 저술에 매달렸던 김영곤씨는 그 저술 덕분에 2005년부터 모교인 고려대 강단에 서게 됐지만, 아내가 1999년 한성대 대우교수직에서 해직되면서 교권에 대한 시야가 확장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고급 두뇌인 대학 강사들이 불합리한 여건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고달프고 억울하게 살아가는 현장을 체험하게 되면서 강사들의 처우 개선과 교권확립을 위한 운동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됐다.
 
그는 2006년부터 아내와 그 운동에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 강사들과 연대하는 운동은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올해 2013년부터는 다시 강단에 설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음에 이어짐)
#대학교육정상화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 #여의도 천막 #한국노동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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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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