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자 춘섭과 양반집 셋째 여자 서당골댁

[공모-가족인터뷰] 엄마의 '구술생애사' 작업 중 듣게 된 현대사 한 페이지

등록 2013.09.02 10:27수정 2013.09.0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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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오남매 중 둘째이자 큰딸인 내가 80년대 말부터 십 여년간 천주교 비전향장기수후원회(수십 년의 징역생활을 한 빨치산과 남파공작원들의 석방과 후원과 북송을 위한 활동)를 하는 동안도, 나를 말리기만 할 뿐 엄마 입에서 '이복오빠'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내 민주노동당 활동을 놓고 엄마는, "노동당? 야, 그거 무서운 거야"라며 극구 말리기부터 했다. 다행히 내게 '무서운' 일은 없었고, 엄마의 이복오빠 이야기는 차차 상세해져 갔다.

얼핏 '나도 그 시절, 여맹을 잠깐 했었다'는 말을 들은 게 분명한데, 엄마는 곧 말꼬리를 말아 넣고는 입을 씻었다. 2010년 이후 나와 엄마는 틈틈이 '안완철의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글은 나의 엄마 안완철의 십대 중후반(12~19세, 8·15해방 이후 6·25전쟁까지) 구술사 중 일부를 별도로 정리한 것이다.

완철은 올해 만 여든으로 나와는 스물네 살 차이 띠동갑이다. 1933년 10월 9일생(음력, 계유년). 전라북도 남원군 보절면 신파리 신흥마을 출생. 아들 넷 딸 셋 중 가장 막내. 칠 남매 중 여섯은 정실부인인 석굴댁의 소생이고, 막내 오빠 '춘섭'만 서당골댁 소생이었다.

순흥 안씨네는 인근의 높은 반가이자 부잣집이었다. 일제시대에 보절면 면장 수리조합장 어업조합장 등을 지낸 아버지 안병용은, 막내딸인 완철을 더없이 위해 주며 아까워했고, 다행히 마을 사람들에게도 인심이 후했단다. 생모는 막내딸의 백일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시 완철이 일곱 살일 때 풍으로 쓰러져 11년을 병석에 누워 있다가, 막내딸이 열여덟 살이 된 해에 돌아가셨다.

여든 살 내 엄마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이복 오빠 춘섭

서당골댁은 아버지의 네 여자 중 세 번째 여자였어. 정실부인 살았을 때 첩을 들인 거지. 정실부인과 한 집에서 살지는 않고, 보절면 면사무소가 있는 '솔배미'에 따로 집을 얻어 살았어. 외아들이 잘나서 정실 자식들 못지않게 해줬지만, 서출의 설움은 오만가지였겠지. 명절이면 다른 형제들은 모두 마루에서 절을 올리는데, 춘섭 오빠만 혼자 마당에 덕석을 깔고 절을 했지. 춘섭 오빠는 서당골댁이 나를 차별하는 걸 보면 늘 자기 어머니를 말렸고, 자기 몫으로 오는 좋은 것들을 내게 돌려주었어.

동네 느티나무에 올라갔다고 둘이 벌을 서다가, "완철이는 어링게, 제가 동생 것까지 섰으면 싶네요"하니까, 아버지가 긴 담뱃대를 놋재떨이에 땅땅 떨면서 "저 찢어쥑일 놈…" 하고는 이내 벌을 푸셨지. 내가 어렸을 때는 서당골댁이 아무리 말려도 춘섭 오빠가 나를 업고서는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지. 바로 위 오빠고 나랑 네 살 칭하야. 내가 자기 엄마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오빠는 일찌감치 알었겄지.


인품도 넉넉하고 더없이 따뜻해서, 나이 찬 머슴들에게 "해라" 소리 한 번을 안 했어. 종들이 아프면 약도 지어다줬지. 성악을 잘해서 갈마지기 방죽에 나랑 앉아서는 '봄도 가고 여름도 가고', '뜸북새', '아 맹세하노니, 그대를 기다리노라'… 온갖 명곡들을 불러 주었었어("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내 맘 속에 사무쳐~… 노래를 부르며 완철의 눈이 붉어진다-기자 말). 나한테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오빠는 악기로 연주하기도 했지. 바이올린이랑 클라리넷 연주가 일품이었어. 균섭 오빠(둘째 오빠이자 실질적 장남 역할을 한 오빠)가 양반집에서 깽깽이 나면 안 된다고, 보는 데서 악기를 부수기도 했어. 니꼬르 파가니니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영화도, 나를 데리고 보러 갔어. 갈 때가 가까워지니, 오빠 모습이 더 눈에 선해….

아주 어려서부터 보통학교 사학년까지 나는 서당골댁네서 아버지랑 춘섭 오빠와 함께 살았어. 그러니 나는 서당골댁을 생모로 알았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눈꼬리가 차가워지고 말이 따뜻하지 않은 어머니를 느끼게 된 거여. 게다가 나 사학년 때 서당골댁이 풍이 심해진 아버지를 머슴 등에 지우고 나까지 딸려, 큰오빠네로 보내 버렸어.

네 번째 여자 영매랑 군산으로 나가 살다 풍을 맞아 돌아온 것도 미웠고, 아들까지 낳았는데도 정실로 들이지 않는 것도 서러웠겄지. 이미 재산분배도 했었거든. 그 후로도 내가 엄마를 찾아가면 차갑게 모르쇠를 하며 "큰 오빠네가 니 집이라"며 떼어내더라구. 울며 치마꼬리를 잡고 늘어지면, "내가 쫓아내야 니가 오빠네로 가서 정을 붙인다"며, 찬바람이 씽씽 불게 했어.

거그다가 동네 사람들이 "땅 속 어무니가 진짜 어무니냐? 서당골 어무니가 진짜 어무니냐?" 그런 말들을 했었어. 그러니 자연스레 눈치를 챈 거지. 그 후로는 "내 엄니는 꽃상여 타고 후유고개를 넘어갔단다. 어화 어화 갔단다"하며 혼자 청승맞게 울곤 했어. 나는 어려서부터 천당과 지옥을 같이 산 거제.

양반이라면 이가 갈려, 안씨네고 너그 최씨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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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영루 왼쪽 계곡을 건너면 금당과 팔상전이 있는데, 옛 쌍계사 터로 알려져 있다. ⓒ 김종길


재산 분배는 아버지 병이 깊어지기 전에 하셨어. 춘섭 오빠 몫이라고 서당골댁한테 더 주었지. 나는 딸이라고 직접 주지를 않고, "완철이는 판검사라도 할 것 잉게, 꼭 높은 공부를 시켜야 헌다" 하시며 다른 오빠들에게 더 줬었어. 그랬는데 전쟁 끝나고 바로 혼인을 시켜버린 거여. 그게 내 평생의 한이야, 그게~. 양반이라면 이가 갈려, 안씨네고 너그 최씨네고.

보통학교 때 일본 선생님들 중 어떤 분들은 춘섭 오빠랑 친하게 지내며 서당골댁네로 놀러도 오고 자고 가기도 했지. 오빠는 일제시대부터 사범학교를 다니며 조선노동당 비밀당원으로 좌익활동을 했던 거 같아. 오빠 또래 청년들이 집에서 자주 모였어. 누가 오나 나한테 망을 보라고도 했지. 그 책들을 나도 많이 훔쳐봤어. 쁘로레따리아뜨, 쏘비에뜨, 레닌, 막스…. 그런 것들이 뭔가는 잘 몰라도 오빠가 하는 거니까 좋은 거려니 했지. 김일성대학 교수라는 사람도 그 집에 왔었어. 오빠가 그 교수랑 멀리로 교육을 간다며 깔끔한 신사복에 도리우찌라는 납작 모자를 눌러 쓰고 나가서는 한참을 안 오기도 했지. 이제는 이런 이야기해도 별 일 없겠지야? 풀어놓고 죽어야지.

균섭 오빠는 일제 때부터 헌병을 했고 해방 후에는 대위까지 됐어. 그러니 건준이니 인공이니 전쟁이니 그 난리통에도, 우리는 한 집안에 우익과 좌익 대장급이 다 있는 거잖아. 춘섭 오빠가 많이 서러웠겠지만 앙갚음을 할 사람은 아니지. 인민군이 오면 춘섭 오빠가 막아주고 국방군이 오면 균섭 오빠가 막아주고 해서, 우리 집안은 어느 쪽으로도 별 피해가 없었어. 나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아침마다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깊게 절을 하신 덕인지…. 식솔들이나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 덕 안본 사람이 없응게, 지주집이라고 해꼬지하는 사람도 없었어. 그 지리산 자락으로는 한 번씩 뒤집어 질 때마다 기막힌 일들이 많았더라구.

전주로 재금 나간 균섭 오빠네서 전주여중 이학년을 다니다가 6·25가 났어. 그래서 남원 큰오빠네로 다시 들어 왔지. 인민공화국 지부가 우리 집 사랑채에 차려지기도 했어. 젤 넓기도 하구 먹을 거랑 쓸 만한 물건이랑도 많응게 그랬겠지. 그때도 머 그냥 내 줄 거 다 내주고 서로 잘하고 그랬어.

나는 학교가 늦어서, 중학교 이학년이어도 열여덟이었거든. 그러니 쉽게 배우고 잘하잖아. 선전부장을 맡아 밤마다 여자들을 모아놓고 노래도 가르치고 연설도 하고 그랬어. 완장도 찼지, 하하하~. 여맹 뭣은 아니고 선전부장을 했던 거야. 우리 마을서는 절대 안 하지. 그랬다간 동네 일가랑 집안에서 난~리가 났게? 일부러 멀리 못 알아보는 동네로 나를 보냈어. 세상이 뒤집어졌으니 균섭 오빠는 제주도로 피신을 해 있었고, 병석에 계신 아버지도 크게 말리지를 않았지.

딸들 신세 서러운 건 양반이나 상놈이나 다 똑같은 거 같더라구. 갓 태어나 생모 잃고 이리저리 치인 설움을, 그 선전부장 일에 담았는가도 모르지. 딸이라고 재산 안 물려 준 것도 서럽고. 춘섭 오빠 때문에라도 인민공화국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지. 양반집이니 부잣집 어른들은 세상이 망쪼가 들었다고 한탄들을 해쌌더만, 나는 신이 나고 좋았어.

"짚자리에 떨어지는 날부터, 쓰지 못할 계집이라고, 갖은 학대 다 받았지 않느냐."

원래는 힘찬 노랜데, 가사가 서럽고 딱 나를 위해 만든 노래 같아서, 혼자 구슬프게 부르며 울기도 했지. 진짜 어렵게 산 사람들이 보면 참 가소로웠겠어. 응? 하하하~. 그때 춘섭 오빠는 곁에 많이 없었어. 어딘가는 몰라도 공화국 상부로 배치가 되었다고 했어. 그 선전부장 한 얘기는 전쟁 끝나구는 입을 딱 닫았지 야~.

우리야 별 탈 없었지만, 그때 공화국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다 죽고 잡혀가고 난리가 났었지. 니가 전에 그 무슨 노동당 여성위원장인가 한다 그럴 때, 내가 겁이 난 게 그거여. 그러다가 세상이 또 뒤집어져서 춘섭 오빠가 지리산으로 들어간 거야. 처음에만 해도 가끔씩 내려왔다 가곤 했지. 그 잘생기고 깔끔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구, 까칠하고 덥수룩 하더라구.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문득 집에 왔는데, 복숭아를 한 아름 가져왔더라구. 나를 보자 그걸 봉지째 주면서 너 줄라구 사왔다는 거야. 내가 복숭아를 못 먹는 걸 오빠가 모를 리도 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오빠 고마운데, 나는 못 먹으니까 오빠가 먹어"하고 다시 밀어주니까, 열 개도 넘는 복숭아를 앉은 자리에서 다 먹더라구. 그게 마지막일지 오빠는 알았나봐~. 어버지랑 어머니를 찾아 큰 절을 하고는 다시 나를 부르더라구. 까끌까끌한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너는 내 동생이지, 너는 내 동생이지…" 하며 하염없이 만져주고는… 갔어.

쌍계사에 은행나무 천진데, 어디서 내 오빠를 찾겄냐

아버지는 전쟁 중이던 1951년 음력 칠월, 환갑을 몇 달 앞두고 돌아가셨어. 춘섭 오빠만 임종을 못했지. 소식이야 들었겠지만 장례에도 못 왔어. 모르지, 남들 모르게 왔다 갔는가도…. 춘섭 오빠도 없는 아버지 장례가 나는 너무나 서러웠어. 전쟁 중이라도 초상은 제대로 차렸지. 배고프던 전쟁 중에 온 동네 사람을 다 불러 먹이고 가신다고 사람들이 치하들을 했어. 이짝 저짝 다 불러서 한테 멕이고 가셨어.

오빠는 전쟁 끝날 무렵에 지리산에서 토벌이나 동상으로 가신 거 같아. 산사람들이 '춘섭이가 동상이 아주 심하더라'는 말도 했고, 피아골서 총상이 심한 거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어. 한동안 꿈에 자주 보였어. 묘똥 위에서 나를 붙잡고 '나는 죽었다. 나 제사 좀 지내 달라' 그러기도 하고. 쌍계사 은행나무 밑에 시신을 모셨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나중에사 니 오빠랑 여러 번 가봤어. 쌍계사에 은행나무 천진데, 어디서 내 오빠를 찾겄냐.

모실아래, 접내미, 석새미, 동재뜰, 범말, 돌촌, 섬말, 사리반, 꽃쟁이고개, 에끼재…. 오빠가 갖가지 꽃을 따주며 나를 업고 노래를 불러주며 데리고 다닌 곳들이야. 서모는 그러고도 한동안을 거의 잡숫지도 않고 그 작은 몸으로 새끼를 찾아 그곳들을 헤매다녔어. 꿈에라도 그 에미와 새끼가 서러움 없이 웃었을까.

그 중간 어느 땐가부터 서당골댁도 완철도 집안 누구도 각자의 기억 속에 춘섭을 눌러 덮었다. 스물넷 외아들을 가슴에 묻은 채 보절면 그 집을 떠나지 않고, 서당골댁은 홀로 아흔을 넘겼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 새벽마다 경대 앞에 앉아 동백기름과 참빗으로 쪽을 지시고, 새벽기도를 나가셨단다. 2004년 서당골댁이 돌아가시자, 살아생전 그녀를 "저그요~"라고만 호칭한 순흥안씨네 아들네가 남은 재산을 챙겨갔단다.

춘섭이 죽은 나이가 스물넷 즈음, 그 나이에 완철은 양반을 벗어던지고 서울로 비집고 들어섰고, 그 나이에 나는 신발도 꿰지 못한 채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왔다. 서당골댁이 죽은 2004년 민주노동당은 열 명의 국회의원에 환호했고, 2013년 지금 진보정치는 폐색 혹은 암중모색이다.
덧붙이는 글 <가족인터뷰> 응모글
#가족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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