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 대소변 받아내도 살아있어 괜찮았어"

[공모-가족 인터뷰] 공주병 울엄마 희순씨의 우울증 극복기

등록 2013.09.06 21:16수정 2013.09.06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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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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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지아부지 없다고 날 알기를 우습게 알고, 지아부지도 생전가야 나한테 큰소리 한 번을 안 쳤는데 지들이 뭐라고 걸핏하면 짜증이고 잔소리야!"
"왜 또… 응?"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희순씨가 수화기 너머로 온갖 말들을 신경질적으로 쏟아냈다. 전날까지만 해도 "응 딸여?" 반색하던 다정한 목소리는 온데 간데 없다. 그사이 아들 셋 중 누군가와 또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몇 년 째 반복되는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레퍼토리다.

삼남일녀 중 셋째이자 유일한 딸인 나는 어려서부터 늘 희순씨의 화풀이 대상이고 하소연 대상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더 심해졌을 뿐더러 아버지의 수술비와 병원비 부담도 적지 않았는데 매월 생활비 부담까지 내 몫이 되었다. 이번엔 또 어느 아들에게 받은 상처로 내게 전화를 했을까.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툼의 시작은 늘 희순씨니까.

우리 희순씨 올해 예순아홉의 친정엄마 희순씨 ⓒ 박선미


희순씨의 생일날 있었던 일이다. 아침 일찍부터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결국 만나지 못했다. 다음날 다시 또 전화를 했지만 자정 무렵 겨우 통화가 됐다. 생일상은 아들며느리들이 차려줘서 잘 먹었고, '낮엔 친구들과 만나서 저녁까지 잘 지냈다'고 했다. 난 '찾아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끊었다. 그리고 이튿날. 희순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엄마 왜?"
"니가 그러고도 딸년이니? 생일이면 하루이틀 전날 미리 전화해서 온다고 약속을 잡던가 해야지, 당일에 전화하면 난 너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희순씨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다 전화를 툭 끊었다. 내 핸드폰 발신 수신번호목록에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는 '희순씨'는 나의 친정엄마다.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에게 우울증이 왔다

엄마는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 간혹 내가 좀 소원하다 싶으면 혹시라도 당신의 우울과 슬픔을 내가 잊은 건 아닌지 악을 써가며 그때 그때 알려준다. 남편을 잃은 고통도 견디기 힘든 일이겠지만 늘 곁에 있는 남편보다도 아버지를 의지하며 산 내게도 아버지의 부재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긴 마찬가지다. 엄마는 딸인 나의 슬픔이나 고통은 전혀 생각지 않는 사람 같았다.

큰소리 한 번을 안 치고 애지중지 키운 맏아들 큰오빠는 갑작스런 암 진단으로 직장을 잃어야만 했고 수술 후 건강은 점차 나아졌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엄마에게 기대려 했다. 엄마는 그 힘겨움을 내게 모조리 쏟아냈다. 무능력한 작은아들과의 갈등도 내게 쏟아냈고, 자기밖에 모르는 막내아들에게 받은 서운함과 화를 모두 내게 쏟아냈다. 나는 엄마의 샌드백이었다.

매번 엄마의 문제임을 알면서도 엄마의 편을 들어주고 다독이다가도 한 번씩 아들들의 편을 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치 애초 화의 근원이 나였던 것처럼 내게 악을 쓰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결국 듣다 지친 나는 같이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다가 남편에게 전화기를 뺏기는 것으로 싸움은 끝이 난다. 그런 후엔 한동안을 연락 없이 조용히 지낸다. 하지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고 다시금 반복된다.

희순씨의 약혼식사진 희순씨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다. 아버지는 쌍커플 없는 큰 눈의 그야말로 요즘 흔히 말하는 훈남 스타일이다. ⓒ 박선미


어떤 날은 당신도 딸인 내게 심했다 싶은지 "미안하다. 내가 자꾸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너한테 아니면 누구한테 얘길 하겠니…" 하며 전화기 너머에서 흐느끼곤 했다. 가엾은 우리 희순씨.

엄마는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사년 째 우울증 약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엄마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자식들에게서 위로받고 싶어했으나 아들들은 외면했다. 딸인 나 역시도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혼자 삭이고 싶었다. 엄마도 나도 서로를 위로할 여유는 없었다. 엄마는 전에 비하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많이 줄었고 우는 날도 많이 줄었다. 지금은 그럭저럭 지낼만 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면 자식들 이름만큼이나 많이 부르셨던 이름이 '희순아'였다. 이름이 촌스럽게 희순이가 뭐냐고 자주 놀리셨지만 아버지의 희순이 사랑은 조용하고도 깊었다.

집 옆의 텃밭에서는 늘 잠시도 쉼 없이 겨울문턱까지 채소들이 자란다. 봄 여름 가을 계절의 흐름에 순서를 지키며, 때로는 날씨의 변덕으로 다음 채소에 이르게 자리를 내줘가며 온갖 채소들이 길러졌다. 가을날이면 흰콩과 검은콩을 수확하고 그리고는 김장에 쓸 배추와 무가 엄마와 아버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콩을 수확하고 난 자리에는 이듬해에 수확할 마늘이 다시 심어졌다. 두 분은 늘 밭일을 함께 했다. 언제나 곁을 함께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없고 홀로 앉아 콩깍지를 따는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해방둥이 우리 엄마는 세상에 없는 귀한 딸

희순씨는 외할아버지가 쉰 살이 되던 해에 태어난 45년생 해방둥이다. 4남1녀 중 늦둥이 막내로 얻은 엄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상에 없는 귀한 딸이다.부잣집 막내 외딸로 자란 엄마에게 세상엔 무서운 사람도 없고 자신보다 잘난 사람도 없었다. 언제던가 엄마의 처녀시절 앨범을 들추다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단아한 외모의 친구 분을 보며 참 미인이라고 했더니 대뜸 "이쁘긴 뭐가 이뻐. 사진이나 이렇지 실물은 나보다 훨씬 못했어"라고 하던 희순씨.

희순씨는 상당히 미인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 학교에 행사가 있어서 학부모들이 참관을 하던 날이면 난 멀리서도 몇 번만 두리번거리면 날씬하고 큰 키에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엄마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엄마는 아이 넷을 낳고도 미인소리 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시집가기 전까지 외할아버지는 종종 택시를 불러서 읍내로 데리고 나가 옷을 맞춰 입히곤 했는데 그런 날은 꼭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고 한다. 한 번은 사전에 허락 없이 사진관 쇼윈도에 엄마의 독사진을 걸었다가 외할아버지의 불호령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당신의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보관하지 않는 엄마인데 아버지가 환하게 웃어서 너무 좋다고 애지중지하는 사진이다. ⓒ 박선미


인근지역에서 집안 좋고 미인으로 소문난 엄마에게도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 약점은 있었다. 엄마는 소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학력에 대한 자격지심을 안고 살았다. 소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 다닐 수 있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는 십오리(6km)가 넘는 읍내까지 걸어서 다녀야 했는데 당시에도 성폭행 사건이 종종 있었던 터라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소학교만 마치고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질 못했다고 한다.

"내가 아무렴 집에 돈이 없어서 중고등학교를 못 갔겠어? 그때만 해도 길이 얼마나 사나웠는지 시집갔다가 처녀가 아니라고 쫓겨 온 여자들이 제법 많았어. 중학교 보내달라고 울고불고 했는데 니 외할아버지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결국 못 갔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매는 늘 고졸이나 대졸만 들어왔었다며 특유의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우쭐해 했다. 외숙모들의 표현을 빌리 면 엄마의 콧대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라 했다. 사진 한 장만 보고 온갖 트집 잡으면서 혼기가 차도록 시집갈 생각을 않는 엄마를 보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속이 탔고 외숙모들은 그런 엄마가 꼴사나웠다고 했다.

"결혼식은 했는데, 3일만 살아보겠다고 했지"

22살에 중매쟁이로부터 아버지의 사진을 받아 보고는 인물은 괜찮았지만 홀시어머니에 장남이라는 이유로 퇴짜를 놨고 엄마의 사진을 본 아버지는 한 눈에 반해 외갓집 문지방이 닳도록 1년을 들락거렸다. 엄마는 아버지가 집에 오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돌아갈 때까지 열지 않았고 그렇게 1년을 보내곤 결국 온 가족의 설득에 못 이겨 결혼을 결심했다.

"내가 외할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서 결혼식은 했는데 가서 3일만 살아보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오겠다는 조건을 달고 했지. 근데 가서 살아보니까 니 아버지가 너무 잘해주고 좋더라고. 니 할머니도 잘 해주고, 그래서 그냥 살았어. 시집가서 밥이며 반찬이며 다 니 할머니한테 배웠어."

사남매의 돌 백일기념사진들과 약혼식날 친지들과 함께 상단 좌측(본인) 우측은 약혼식날 외숙모들과 작은아버지 하단 우측 막내남동생과 엄마 아버지 그리고 연년생의 두 오빠 ⓒ 박선미


희순씨는 23살에 아버지와 결혼식을 올리고 24살에 큰 오빠를 낳고 이듬해에 둘째 오빠를 낳았다. 손이 귀했던 집안에 아들을 연년생으로 둘을 낳았으니 홀시어머니였던 할머니의 기쁨은 말도 못했다. 매번 산후 몸조리까지 손수 다 해주셨다.

2년 후 딸인 나를 낳느라 산달이 다 돼서 엄마는 외갓집으로 갔고 셋째도 아들을 기대했던 할머니는 딸이라는 소식에 "대충 몸조리 했거든 어서 집으로 오라"고 했다고. 엄마는 그때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서운했다고 한다.

"집에 왔더니 니 할머니가 '그깟 딸년 낳느라 친정까지 갔냐'고 하는데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어. 니 아버지하고 난 딸이 낳고 싶었고, 널 낳는데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니 아버지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

할머니는 두 아들손자만 예뻐하셨고 난 늘 옆집 손녀딸만도 못했다. 엄마는 그 점을 늘 못 마땅해했다.

"먹을 게 생겨도 니오빠들만 몰래 손에 쥐어주고 넌 한 번을 안 주더라. 그래서 내가 넌 옷이며 신발이며 더 사주고 그랬어. 내가 너만 장날마다 장에 데리고 갔던 게 뭐 사 먹이느라고 그랬지. 동네서 옷도 젤 잘 입혔어. 쬐그만게 빨강에 분홍에 입고 뛰어 다니면 그렇게 예쁘고 좋을 수가 없었어."

엄마는 내가 내 옷을 직접 고르기 시작한 후부터 절대 분홍, 빨강은 입지도 신지도 않는 걸 모른다.

엄마가 좋아하는 건 뭐든 다 좋다던 아버지

마늘이며 양파까지도 모두 텃밭에서 기른다. 햇양파를 고추장에 찍어드시기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도 아버지 생각에 양파는 아직도 꼭 심으신다고 한다. ⓒ 박선미


평소 흥얼거리며 노래하길 좋아하던 희순씨는 노래자랑만 열리면 무조건 참석했다. 음색이 고와서 박자 음정이 대충만 맞아도 번번이 상을 받아왔다. 집안 거실엔 아직도 '안성시민노래자랑' 시계며 액자가 걸려있고 부엌에는 '주민노래자랑', '조합원노래자랑' 등등 듣도 보도 못한 노래자랑 상으로 주방 살림살이가 즐비하다. 우리 남매는 그런 엄마를 창피하고 못마땅했지만 아버지는 늘 엄마편이셨다. 엄마가 좋아하는 건 아버지도 뭐든 다 좋으셨다.

"니들이 하도 뭐라고 해서 난 노래자랑 안 나갈라고 해도 니아버지가 괜찮다고 갔다 오라고 해서 나가고 했지. 난 별루였어."

노래자랑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아버지한테 슬며시 얘기를 하셨다.

"이번에 저기서 노래자랑이 열리는데 상품이 좋더라고. 근데 저것들이 못 나가게 해. 내가 자꾸 그런 델 다녀서 창피하다고 싫대. 그래서 이번엔 안 갈라고…."

풀 죽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이르면 아버지는 얼른 엄마를 다독였다.

"아녀 괜찮어 갔다 와."
"그치 여보?"

엄마는 늘 그런 식이었다. 워낙 아버지성품이 조용하시기도 했지만 생전 큰소리가 나는 일도 없었고 엄마의 부탁이나 청은 뭐든 다 들어 주셨다. 살면서 아버지가 한번은 미웠을 법도 한데 전혀 없었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얘기를 꺼냈다.

"10년 전인가 바람은 아니었는데 니 아버지가 다른 여자랑 친하게 지내니까 미칠 것 같더라."

사연은 이랬다. 포도농장을 하고 있던 외갓집에 일손이 부족하면 아버지가 이따금 다니러 가신 일이 있다. 외갓집 포도농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자꾸 아버지에게 신세한탄을 하는 모양인데 매번 받아 주는 모습이 그렇게 밉고 싫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 날은 참다못해 막내를 불러 외갓집 포도농장에 가서 아버지를 모셔오게 했다.

"사실 화를 낼 일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현관문 들어서는 니아버지를 보니까 순간 부아가 치밀고 눈이 뒤집히더라. 멱살을 잡고 소리소리 질렀지 뭐. 그날 니 외갓집에 전화해서 아무리 일손 부족해도 니아버지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 난리를 쳤어. 그게 끝이었어."

돌아가시는 날까지 끔찍했던 아버지의 엄마 사랑

집옆의 텃밭에서 콩깍지를 따는 희순씨 무거운 것을 옮겨야 할 때는 "OO아부지 이리와서 이것 좀 들어줘봐"하며 아직도 아버지를 부르신다. ⓒ 박선미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년 전 지붕을 덮던 마당의 감나무며 은행나무를 베어냈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더니, "가을이면 마당에 감낭구잎 은행잎 잔득 쌓일 텐데 느 엄마 비질 할라믄 심들어. 나두 읍는데 누가 맨날 마당 쓸겄니" 하셨다.

이미 두 차례의 암수술을 받은 아버지가 그로부터 3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다시 암 선고 받은 며칠 후의 일이다. 더는 힘들다는 걸 아셨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엄마 사랑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끔찍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하고도 반년의 세월이 흘렀다. 예순다섯에 혼자가 된 엄마는 예순아홉이 된 지금도 혼자라는 사실에 여전히 기가 막혀한다.

"난 니 아버지가 암으로 수술을 두 번이나 했어도 금방금방 털고 일어났으니까 세 번째도 또 그럴 줄 알았지. 침대에 누워서 대소변 다 받아내게 해도 살아있어서 괜찮았어. 가끔 니 아버지가 아픈 게 힘들어서 나한테 소리 지르고 화내도 잠깐은 서운했지만 얼마나 아프면 나한테 저러나 했어. 나 두고 혼자만 가려니는 생각도 안 했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 겨울 몇 달 동안을 엄마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우는 날이 많았다. 그런 엄마를 달래서 집으로 모시고 오느라 막내남동생 내외가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다. 엄마는 고개를 숙인 채 콧물을 훔치며 콩깍지만 벗기더니 조용히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때만큼 외롭진 않아서 살겄어. 아직도 보고는 싶지 왜 안 보고 싶겄니."

우리는 한참을 콩깍지만 벗기고 더 이상 아버지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잊기 위해서는 사랑한 만큼의 세월이 흘러야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올해 예순아홉의 희순씨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이제 겨우 3년여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다.

인터뷰 글을 정리하고 요사이 한참 동안 연락이 없는 희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왜…?"
"엄마 왜 기운이 없어? 어디 아퍼?"
"아니 누워있어서 그래. 왜 무슨 일 있어?"
"하도 연락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나하고 해봤지."
"무슨 일 있을게 뭐 있니. 너 회사일 바쁜데 자꾸 전화하기 그래서 안 했지."
"우리 희순씨가 어쩐 일이래? 내 사정을 다 봐주고?"
"너라고 살림하랴 직장 다니랴 여간 힘들것어."

언제 또 희순씨의 샌드백이 될지 모르지만, 시간을 잘 견디고 있는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가족 인터뷰> 응모글
#가족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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