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엄마, 너무 힘들었지?"

[가족이야기] 이제 아버지 곁에서 편안하세요

등록 2013.09.07 16:31수정 2013.09.0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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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열흘이 훌쩍 지났습니다. 꿈결에 먼지처럼 그렇게 엄마가 가신 지도..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

매년 엄마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김장을 담가 오셨고, 그리 하신 지도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혼자 사시는 당신이 겨우내 드셔야 열 포기 남짓이겠지만, 당신 드실 것보다는 아들 삼형제, 손주들 먹일 김치를 집집마다 나누어주는 낙으로 늘 백 포기가 넘게 김장을 담그곤 하셨습니다.

작년에도 "이제는 힘들어서 못 하겠다, 이번이 마지막이다"라고 하셨지만, 재작년에도 또 그 전 해에도 해 오시던 말씀이라 올해도 김장을 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올해 철원으로 귀농을 한 저로서는 엄마의 김장 배추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보 농군으로 처음 심는 배추, 혹시 하는 마음에 엄마가 늘 담그시는 백 포기의 두 배인 이백 포기의 배추 모종을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 일주일 전에 심었습니다.

"엄마, 배추가 하나도 죽지 않고, 잘 컸어요" 의기양양하게 엄마에게 전화로 자랑을 했습니다. 엄마는 "그래 잘했다, 좋구나" 하셨지만, 왠지 목소리는 평시와는 달랐습니다. 주무시다 깨셔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를 마쳤습니다.

엄마를 응급실로 옮겼다는 형의 전화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불과 서너 시간 후, 형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가 쓰러지셔서,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큰 일이야 있겠냐만 그리 알아라"

평상시 앓으시는 지병은 없으셨고, 몇 번 응급실로 모신 적이 있기에 어둑해지는 저녁 참에 안산으로 갈 일이 한심해 다음 날 아침에 병원으로 가야지 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엄마와의 면회

요로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전 날 밤에 중환자실로 옮기셨다는 말을 철원에서 출발하며 들었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동생의 말에 병원까지 가는 내내 불안했지만, 설마 했습니다.

정해진 점심 면회시간, 산소 호흡기와 갖가지 호스가 잔뜩인 엄마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만, 또렷하게 "배 고프다, 아들, 죽 좀 사다 줄래"하는 엄마의 평시의 말투와 그래도 처음보다 호전되고 있다는 주치의의 말에 내심 안심을 하였습니다.

"차도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조금 더 두고 봐야 하고, 며칠이 고비입니다. 지켜봐야 합니다. 위독한 상태이십니다"라는 주치의의 말이 뒤따랐지만, 여전히 설마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엄마 방에서의 세 시간

저녁 면회에서 엄마도 다시 보고, 점심 상황에 비해 어떠신 지도 확인하려 병원에서 나와 엄마 집, 엄마 방으로 갔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 한 터라 점심도 먹고, 엄마 침대에 길게 누웠습니다.

그렇게 얼마 후,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엄마의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지금 엄마 집으로 출발했으니 기다려라."

형의 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엔 뭔가 했습니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볕 비치는 엄마 방 한 구석에 앉아있으니 엄마와 그 방에서 습관처럼 같이 보냈던 순간 순간들이 떠오르며 눈물이 흐르고, 결국은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임종

점심에 또렷하시던 엄마, 저녁 면회에서는 힘들게 뭐라 그러셨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다행히 정신은 잃지 않으신 탓에 계속 눈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방법이 24시간 투석인데, 투석을 한다 해도 사실 확률은 10%도 안 되니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치의의 설명에 왜? 멍해졌습니다.

그래도 투석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데, 가족들이 결정하라고 합니다. 연명치료도, 심장소생술도 생각해 보랍니다.

괜하게 고생시키면 죽어서라도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엄마의 수 차례의 당부와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지 라는 미련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결국 엄마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의 치료를 중단한다는 각서에 형제들 모두 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은 지 불과 얼마 만에 엄마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거짓말처럼.

아버지 곁에 엄마를 모셨습니다

안산에서 서울로 엄마의 시신을 모시고, 상가를 차리고, 손님을 받고, 그렇게 잠결처럼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한 줌 재가 되셨습니다.

44년 전 꽃답던 젊은 시절 아버지는 엄마 곁을 먼저 떠났습니다. 어린 형제 셋 허전한 당신 무릎에 앉히고, 얼마나 애달프셨을까, 얼마나 아버지가 원망스러우셨을까.

그렇게 사셨을 엄마를 아버지 곁에 모셨습니다. 평생 남들에게 자랑거리셨던 세 아들보다는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리 훌쩍 우리 곁을 떠나신 분을 아버지에게 돌려드렸습니다.

부디 평생 힘들게 지셨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아버지와 같이 편안하세요, 엄마..
덧붙이는 글 <가족이야기> 응모글
#엄마 #죽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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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여행과 느리고 여유있는 삶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같이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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