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누나 기억 못하는 어머니

[공모-가족인터뷰] 반백년 지나 딸의 모습은 잊어도, 그때 아픔은 여전

등록 2013.09.08 11:26수정 2013.09.0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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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이 나쁜 놈아."


늦은 저녁, 드라마에 몰입된 어머니는 아들인 줄 모르고 자기 아들에게 총을 쏜 악역 배우를 향해 한마디 하신다. 이어 피가 흐르는 장면에서는 "저 피 진짜니? 나 안 볼래"라면서 고개를 돌리시지만, 이내 곧 드라마에 빠져서 "에구 죽으면 안 되는데"라며 애를 태우신다.

일흔 셋 어머니의 하루 소일거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드라마다. 방송 3사의 아침드라마를 순서대로 모두 챙겨보시고 난 뒤에는 케이블 TV의 채널을 돌리면서 재방송 드라마까지 챙기신다. 드라마가 몰리는 저녁 8시 이후부터도 마찬가지다. 가끔 "엄마, 저 여자 왜 그래?"라고 물어보면 "응 저 여자가 사기 치려고 그러는 거야"라면서 앞선 드라마 내용을 꼼꼼하게 말씀해 주신다.

어머니의 두 번째 일과는 옥상 텃밭이다. 드라마 보는 시간 이외에는 거의 대부분 텃밭에 매달려 있다시피 한다. 서른 평 남짓의 옥상 텃밭에는 상추, 호박, 오이, 토마토, 고추, 참깨, 고구마, 옥수수 등 작물이 제법 많다. 어머니에게 봄과 여름에 가장 귀한 작물은 '고추'였고, 요즘은 '배추'다. 김장 비용을 어떻게든 덜어 보겠다는 것이 어머니의 심정이다.

어머니는 수돗물 값을 아끼기 위해 주무시다가도 비가 오면 대여섯 개의 큰 고무 플라스틱 통에 빗물을 담고, 수십 개의 1.5리터짜리 페트병에 물을 채워 둔다. 이 페트병들을 텃밭 화분 곳곳에 박아두면 천천히 물이 빠져나간다는 것을 어디선가 배워 오셔서 장기간 외출할 때마다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늦은 밤이면, TV 드라마 소리와 함께 나지막하게 어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옥상 엄니네 텃밭 소일거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종일 누워계실 때가 많다. 지난 겨울도 그랬다. 그런 어머니는 내게 말을 거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다. 그나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덜했지만, 아들이 밖에 나가 있으면 사람이 그립다고 하신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여자는 있니?"

지난 1월 초, 새벽 2시가 넘어 들어 온 아들에게 잠이 오질 않는다며 말을 거신다. 이어 집 걱정, 형제들부터 손자, 손녀 걱정까지 늘어놓으시는 것이 어머니의 고정된 레퍼토리다. 그 때, 문득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 오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에코페미니즘 관련된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내 어머니의 생을 취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날 어머니와의 차분한 얘기 속에서 몰랐던 것도 많이 알게 됐다.

"자기 죽는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나 없을 때 갔어"

어머니는 20대 중반인 1960년 대 말에 경기도 양평에서 서울 제기동 삼천리 연탄 공장 부근으로 가족들과 함께 집을 얻었다. 아버지가 양평에서 땅도 없이 농사짓는 것보다 서울에서 일자리가 찾는 것이 좋기 때문이라 했다. 때마침 아는 분 소개로 제기동 근처 공장 건설 현장을 소개 받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고향을 등지게 된 것은 다른 이유도 있는 듯 했다. 19살에 출산한 첫 째 바로 밑으로 딸이 하나 있었다. 첫째 아들과 달리 '이연분'이라는 이름의 딸은 무뚝뚝한 아버지를 그렇게 따랐다고 한다. 시골집에서 멀리 아버지가 보이면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두 살배기 딸은 "아찌아찌"하면서 좋아했다. 그런 딸을 무뚝뚝한 아버지도 무척 예뻐했다.

그런 딸에게 어머니는 "젖도 많이 못 줬어"라며 미안해한다. 아버지가 돈 벌러 남의 집 일 하러 가면 농사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애 둘을 다 데리고 다닐 수 없어 어린 딸에게는 아침에 젖을 물리고 큰애만 업고 밭일을 나갔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통에 젖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밭일 끝내고 돌아오면, 혼자 놀던 아이의 발은 오줌 때문에 짓물러 있었다고 한다.

딸이 세 살 되던 해 많이 아팠다. 아이가 아파도 없는 살림에 읍내에 있는 병원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자꾸만 열이 나는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젖은 수건으로 밤새 온몸을 닦아 줬다. 그러다 잠시 물을 갈러 나갔는데, 방안에서 아버지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연분이가 자기 죽는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내가 나가 있을 때 간 거야"라고 한다.

어머니는 "그 때가 네 큰형이 네 다섯 살 때였는데, 밤에 '엄마 연분이 데려와'라며 울더라"며 그때 상황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마치 남일 얘기하시듯 매우 담담하게 말 하신다. 그러나 반백년 전에 말이 또렷이 기억될 정도면 당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느껴진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듯하다. 재작년 돌아가시기까지 내가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20 여 년 전 훈련소 마지막 날 면회 오셔서, 내 손을 꼭 잡은 채 마른 연병장에 굵은 눈물을 흘리시던 것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무뚝뚝했던 아버지와 딸에게 미안해하던 어머니는 죽은 딸을 동네 어귀에 묻었다.

어머니에게 양평의 기억은 가난이었다. 어머니는 연분이 누나가 죽고 난 뒤에 유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이가 예정일을 지나도 나오지 않아 걱정했는데 고추장 가져오다 부엌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옛날 시골집 부엌은 화덕이 있어 마당보다 깊었다. 넘어지면서 무엇인가 만삭의 어머니 배를 때렸다고 한다.

그 날 밤 꿈에 어머니는 꿈을 꿨다. 어머니가 맑은 샘에서 물을 마시려 바가지를 드는 순간 유리에 금이 가듯이 바가지에 금이 갔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유난히 아픈 배를 부여잡고 일어나보니 하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첫 번째 유산을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의 머리가 깨졌다고 한다.

죽은 아이보다 산모가 걱정되는 상황이었지만 가난은 여전히 병원을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에 어머니는 또 한 번 유산을 했다. 아침에 하혈을 했는데 만두 만하게 튀어 나왔다고 한다. 그 때도 병원은 먼 이야기였다. 그렇게 시골에서의 아픈 기억은 서울행 결정을 서두른 이유였을 것이다.

뱃속에 있는 나를 지우려 했다는 어머니

서울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서울에서의 집은 정릉천 부근으로 경춘선 기차가 다니던 때였다. 당시 세 살이었던 작은형은 기차 소리가 나면 벽에 바짝 붙어서 바들바들 떨었다고 한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라는 동요가 있는데 그 노래를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100 데시벨(dB)의 기차 소음에 어린 작은형은 경기를 일으킨 것이다.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 왔을 때 또 꿈 이야기를 하신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하얀 옷을 입을 산신할매가 꿈에 나타나 '너에게 오남매를 줄 테니 더 욕심 부리지 말아라'고 하셨어. 그 때문에 네가 태어난 거야"라고 하신다. 없는 살림에 입 하나 느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어머니는 뱃속에 있는 나를 지우려 했다고 한다. 내 밑으로도 아이가 생겼는데, 그 때는 어쩔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내게 어머니의 젠더는 없었다. 그저 어머니였다. 내게 이 날 새벽의 이야기는 어머니에 앞서 여성이었고, 가부장제와 빈곤이 그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음 날, 식사 준비하는 어머니에게 연분이 누나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나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안 나" 하신다. 50여 년이 지나 죽은 딸의 모습은 잊어도, 그 때의 아픔은 절대 잊지 못하는 듯했다. 그 날 이후, 간간히 어머니 인터뷰를 계속 하고 있다. 아예 영상으로 찍으면서 어머니의 생을 기록하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 댈 때마다 "안 해", "얘가 미쳤나", "이제 그만"이라 역정도 내시지만, 아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싫지는 않으신 듯 이야기를 하신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 조카들, 또는 내 아이들이 할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해 할 때, 이 영상을 보여줄 날을 기대해 본다.

70년대 후반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음산한 음악과 함께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등장할 때면, 나는 어머니 품에 파고들면서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감싸 안아 주시면서 두 손으로 귀를 막아 주셨다. 그때 어머니의 거친 손이 무척 따뜻했다는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덧붙이는 글 <가족 인터뷰> 응모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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