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살다 그런 꼴을... 머리끝이 쭈뼛 서더라고"

[공모-가족이야기] '평강공주'였던 엄마의 인생, 마지막은 해피엔딩이길

등록 2013.09.27 20:16수정 2013.09.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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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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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곱 살 난 쌍둥이 조카가 질문했습니다.


"이모, 우리 집 가훈이 뭐야?"

갓난쟁이 때부터 귀가 뚫어져라 주입시킨 것은 '사이좋은 형제'라는 구령이었습니다. 장난감을 갖고 싸울 때면 "그깟 장난감 때문에 형제 사이가 나빠져서야 되겠어?"하며 "그딴 건 우리 집에 필요 없으니 냉장고 위에 올려버린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준댔자 억울한 아이가 토라져 버리면 놀이판은 깨지고 맙니다. 일란성 쌍둥이로 노상 붙어사는 아이들이다보니 오늘의 사건 유발자는 내일은 피해자가 되기에 어렸을 때부터 사이좋게 지내는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익히는 게 백 번 낫다는 생각에서 나온 방법입니다.

"사이좋은 형제, 그거지."
"에이, 가훈이 뭐 그래? 그런 거 있잖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어디서 들었는지 엉뚱한 구호를 대는 통에 픽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 그럼 사랑하며 살자, 그거로 해."
"아니야 이모. 그거 이상해. 사랑하면 살고 싫어하면 죽는다, 그런 거 없어?"

일곱 살 꼬맹이의 아이디어치고는 꽤 신선합니다. 그래서 그날로 우리 집의 가훈은 "사랑하면 살고 싫어하면 죽는다"가 되었습니다.

"나 하나만 참으면 그만인데..."

젊은 날 사진작가 찍은 어머니 새언니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어머니는 30대 1의 경쟁을 뚫고 공무원이 되었다. ⓒ 김효진


한 번뿐인 짧은 인생, 가족들과 오순도순 사랑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족애가 남달라 북적북적, 두 팔 걷어붙이고 식당을 운영하고 형제계를 조직해 나들이나 여행을 다니는 우애 깊은 형제들이 부러웠습니다. 혹은 소설 한 권으로 써내도 모자랄 만큼 가족들의 단절과 핍박이 끈질기다면 그것도 그럴싸합니다. 역경과 고난을 훌쩍 뛰어넘어서, 불굴의 의지로 인간승리의 삶을 사는 것도 한 번뿐인 인생을 멋지게 사는 방법일 테니까요.

43년생이니 일흔을 넘은 우리 어머니의 인생은 꿈을 접고 뜻을 꺾어야 내일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비 고비 어머니가 참고 물러서지 않으면 가족이 해체되고 붕괴되어 지금쯤 가족 누구도 안온한 나날을 보낼 수 없었을 겁니다.

내 나이 스물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일생은 여자로서 그다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다섯 명의 오빠나 남편은 물론이고 아들과 사위도 어머니의 바람막이는커녕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주지 못했으니까요.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여 젊었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미인 소리를 듣는 우리 어머니가 살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나 하나만 참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다시 태어나면 아빠랑 결혼할 거야?"
"절대 안 하지. 내가 알게만 피운 바람이 다섯 번이 넘어. 어찌나 여자들이 꼬이는지."
"바람 피우는데 그냥 놔둬?"
"알면? 알면 어떻게 할 거야? 헤어질 마음이 있으면 현장을 잡겠는데 너희들 넷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라. 내 인생은 다 간 거고, 나 하나 희생하면 니들이라도 행복하게 살겠구나 했어. 그러니까 참아야지 어떡해."

우리 아버지는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가진 귀공자였습니다. 깔끔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서 칼같이 주름 세워 다림질을 한 옷을 입어야 했고, 회사 야유회 때는 백바지와 등산화로 멋을 내곤 했습니다. 물론 그 뒷수발에 어머니의 한숨이 들어가 있었지요.

"느이 아빠가 친구들끼리 술 마시면서 하는 얘기가, 현장을 덮쳐도 딱 잡아떼라고 하더라. 바람은 피워도 가정을 깰 생각은 없었던 거지. 결혼하는 그 날로 평생 월급봉투에 손 하나 안 대고 갖다 줬으니까 가장으로 내 할 도리는 한다고 당당했었다."

콧대 높은 평강공주의 비극

모던한 스타일의 정장이 돋보인 결혼식 단칸방에서 고등학생 시누이와 신혼 부부가 살았던 신혼시절 아버지는 어머니를 여읜 누이동생이 불쌍해 신혼 티를 내지 않았다. ⓒ 김효진


결혼생활 31년,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평강공주가 되고 싶었던 어머니였습니다. 쓰러져 가는 시골집 장남에게 시집가겠다니 외가 쪽은 모두 뜯어 말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맞선 이후 그 남자의 홀어머니가 돌아가셨다던 비보에 어머니는 결심을 굳히고 말았다고 해요. 단칸방에 사는 가난한 남자와 고등학생 여동생의 끼니가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자신을 따라다닌 숱한 아가씨들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우리 어머니와 결혼했냐는 것입니다. 남달리 코가 오똑한 어머니는 일평생 "코가 높아서 느이 엄마가 고집이 좀 쎄야지"라는 아버지의 푸념에 시달려야 했는데요. 그 시절에는 그게 흉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아내를 이겨먹으려는 못난 남편의 자존심 때문에 어머니는 시집가는 그날로 기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니 데려다가 고생만 시킬 걸 죽고 못 살았다는 부잣집 아가씨랑 하지 아빠는 왜 엄마랑 결혼을 했대?"
"그러게 말이다. 느이 할머니가 사주를 봤는데 남편 출세시킬 여자라고 탐을 냈다더라. 서울 본사로 발령 났을 때 보니까 시골사람은 시골사람이더라. 택시 문고리 잡고 여는 법도 몰라서 당황할 정도니 말 다했지."

다섯 오빠 아래로 언니 둘이 어린 나이에 죽고 태어난 우리 어머니는 귀여움을 독차지해야 하는 막내딸입니다. 그런데 큰오빠의 맏딸과 같은 나이에 한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오빠들과 나이 터울이 한참 납니다. 동네에서 딱 입방아 오르기 좋은 사건이었지요. 감나무집 막내딸 우리 어머니는 나이 지긋한 부모님의 감추고 싶은 은밀한 사생활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느이 큰 외숙모가 외할머니 흉을 얼마나 봤다고. 며느리랑 시어머니가 같이 임신을 했으니 어이 없는 일이긴 하지. 그래서 만날 내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니 때매 내가 며느리한테 우세한다' 그랬어. 마흔두 살에 나를 낳았으니 노산이지. 그런데 큰 외숙모는 마흔 일곱인가 다섯에 막내아들을 낳았으니 째지도록 흉을 볼 것도 없었던 거지."

기골이 장대했던 외할아버지는 감나무 과수원을 돌보지 않고 산천유람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나름 획기적인 장사법을 시도하다 쫄딱 망하기도 했는데요. 울릉도에서 밭뙈기 무를 사와 깊은 땅 속에 저장해놨다가 이듬 해 시세차익을 많이 남기고 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봄에 파보니 몽땅 썩어버렸더랍니다. 그래도 언제나 당당한 분이셨습니다.

"할아버지 말씀이, 여자들이 밥도 주고 옷도 사주고 굴비 엮듯이 모여서는 척척 알아서 해준다는 거야. 가는 곳이 내 집이라나. 연세 들어서는 아들들 집마다 돌아 댕기며 '키워놨으니 내 돈 내놔라.' 키운 공을 주판 두들겨서 받아낼란다, 돈 줄 때까지 아랫목 차지하고 앉아있어서 숙모들이 질겁을 했다."

막내아들네와 시골집을 지켰던 외할머니는 육식은 입에도 대지 않던 소박한 인내의 여인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느 동네 물동이 이고 가던 처녀가 예뻐 따라가 보았더니 그게 우리 할머니였다고 합니다. 열여덟에 시집 와 이듬해 큰아들을 낳았는데, 속앓이를 많이 했는지 구안괘사로 평생 한 쪽 입 꼬리가 돌아간 채 삐뚤어진 얼굴로 살았습니다.

아버지뻘 큰오빠네 집에서 살았던 그 시절

집안 결혼식에 들렀다가 찍은 흔치 않은 부부 사진 "평생 아버지처럼 오빠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겠다"던 아버지는 아내를 많이 의지하면서도 경상도 남자의 자존심을 내세웠다. ⓒ 김효진


다섯 아들 가운데는 일본유학 후 서울에서 은행지점장을 지낸 아들도, 읍내 유지로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아들도 있었으니 어깨에 힘주며 살 수도 있었을텐데 드센 며느리들 앞에 쩔쩔매는 시어머니였습니다. 큰오빠가 아버지뻘이었던 어머니 역시 시누이 노릇은 고사하고 오빠네 식솔이 되어 새언니들의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큰외삼촌네는 금슬이 참 좋았어. 느그 큰외삼촌이 마누라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허허했으니까. 그 집도 딸 넷에 아들 둘이니 입은 많았지. 아버지랑 딸들이 사이가 좋아서 밤새 이야기꽃이 끊어지지 않는 거야. 큰외숙모가 중학교만 마치고 그만두라는 걸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가야겠더라고. 며칠 밥을 안 먹고 굶었더니 서울 외숙모가 학비를 대겠대. 방학 때마다 서울 올라가서 식모처럼 집안일 다해주고 애들 뒷바라지하고 나면 개학할 때쯤 학비를 주는 거야. 서울에서 돈이 안 내려오면 월사금도 못 냈어. 학비를 못 내면 시험도 치지 말라고 해서 눈물도 꽤나 쏟았지."

고만고만한 또래 여자아이들인 조카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어머니가 느꼈던 상대적 외로움을 컸을 것입니다. 넉넉지 못하던 시절이니 당연할지 모르지만 큰외숙모는 우리 어머니만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 자식 입에 들어갈 계란프라이 하나라도 아끼려는 에미 마음이었을 겁니다. 덩달아 같은 나이이고 동창생이었던 큰조카 언니도 어머니 때문에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해. 나랑 나이가 같으니까 피해를 많이 보게 되는 거지. 그렇다고 서울 둘째오빠네서 살기도 싫더라. 살림은 넉넉한데 그 집은 만날 어찌나 싸우는지. 느이 둘째 외숙모가 부잣집 딸이라 기도 펄펄하고 치맛바람이 말도 못했거든. 치마 두른 여장부였지.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핏대를 올리고 자기 분에 거품 물고 기절해 버리는 거야. 속이 시끌시끌해서 여긴 사람 살 데가 아니다 싶었지."

세월이 지나면 아픈 추억은 잊혀지는 법입니다. 더구나 상처 준 사람은 상처 받은 사람의 까맣게 딱지 앉은 마음을 결코 짐작하지 못할 겁니다. 그 시절의 서러움을 누르고 어머니는 기꺼이 큰오빠네 딸들을 식객으로 거뒀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 온 이후 직장생활로 대학교 통학으로 서울에 머물 곳이 필요했던 외사촌 언니들은 길게 짧게 우리 집 식구로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상처 입은 마음 한 켠 그분들께 입은 은혜와 사랑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3대 독자 외동아들인 우리 아버지에게 피붙이라야 누이들뿐이었지만 먼 친척들과 사돈의 팔촌까지 서울나들이에는 으레 우리 집에 머물러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차비를 얻어가는 게 당연한 수순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결핍,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 어머니는 가장 가난하고 외로웠던 시절의 아버지에게 정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남자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우리 아버지는, 딸로서 이렇게 평하긴 뭣하지만 이기적인 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 싫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은 우리 사남매 역시 어머니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내 딸만은 남편 사랑 듬뿍 받고 살기를 바랐는데

30여년을 거슬러 올라 젊디젊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불행하게도 어머니에게는 닥치지 않았으면 좋을 슬픈 일이 또 일어납니다. 자신의 불행을 자식에게만은 대물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일 텐데 그러고 보면 나의 어머니는 참으로 모진 인생을 사신 게 분명합니다.

"살다 살다 그런 꼴을 볼 줄은 몰랐지. 막내가 도어록을 띠리리 열고나니까 대문에 걸쇠가 걸려 있는 거야. 머리끝이 쭈뼛 서더라고. 이혼 조정을 앞두고 있을 때니 그 시간엔 당연히 빈 집일 거라 생각했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데 이상한 예감이 들더라."

사흘 동안 어머니를 오금 저리게 한 그 사건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을 온다 해도 영화(?) 누릴 것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우친 어머니는 딸들에게 "절대로 희생할 마음으로 결혼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달고 살았습니다.

부부는 다른 사람은 모르는 치부까지도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외고집인 우리 아버지에게 맞춰 살았다고는 하지만 애증은 엉겅퀴처럼 어머니의 마음을 좀먹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남편과 아이들을 할퀴기는 고양이 발톱이 되기도 했지요.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는 일벌레 남편과 온 집안을 어질러놓는 어린 사남매. 갑상선 항진증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죽 한 그릇 끓여주는 사람 없이 앓아 눕곤 했습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남매의 성장기에 육아경험이 전무했던 어머니는 이끌어주고 등 두드려 주는 사람 없이 한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내딸이 사랑 하나로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말렸지만 마지막엔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게 양가에 손 벌리지 않고 결혼을 준비하는 모습이 기특하다고 했습니다. 붙박이 가구며 집기가 달린 오피스텔에서 단출하게 신접살림을 시작한 젊은 부부는 어머니의 자랑이었습니다.

우리 막내가 결혼했을 때는 강해 보였으나 역경의 파도 앞에 한없이 심약했던 우리 아버지가 IMF라는 거대한 태풍을 맞고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한 후였는데요. 하루아침에 지하 월세집으로 추락했던 시절, 우리 사남매가 모두 대학을 마칠 정도로 장성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나지 않아 믿거라 했던 사위는 어머니의 눈에 피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무서운 진실

막내가 이혼하겠다고 혼자 법원에 이혼서류를 냈을 때도 마지막까지 두 사람이 화해하기를 바라던 어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여자의 직감으로 남편의 수상한 낌새를 맡아도 헤어질 것이 아니니까 평생 뒷조사 같은 것은 해본 적 없는 어머니였습니다.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들은 더러 사설 기관에 의뢰해 결정적 증거를 잡기도 한다지만,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깨끗하게 합의 이혼으로, 뒤돌아 서더라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잘 지내길 바랐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날 끝끝내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현장과 마주친 것입니다.

"심장이 덜컹덜컹 내려앉는 줄 알았다. 막무가내로 문을 닫으려는 걸 막내가 발을 밀고 들어가 짐을 챙겨왔지."
"그럴 때 경찰을 불러야 한다던데.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엄마 참 바보다."
"머릿속에서 사이다 기포가 뽀글뽀글 터지는데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저걸 어떡해? 저걸 어떡해? 입만 마르고."

막내의 이혼은 "이혼은 없다"던 우리 집안에서는 충격이었습니다. 갓난쟁이들이 걸음마에 익숙해지고 하루하루 말이 늘 때였습니다. 세 살짜리 쌍둥이 아이가 둘이나 달린 싱글맘이라니. 부모의 불화를 피부로 눈치 챈 아이들은 한 번씩 그악스럽게 울어댔습니다.

주변에서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묻어두고 살라고, 여자는 약자니까 아이들은 아빠 쪽에 떼버리고 오라고, 애기엄마가 젊으니까 이 꼴 저 꼴 보지 말고 팔자나 고치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들을 건넸습니다. 우리는 가족이기에 막내의 아픔에 반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을 뿐이지 세상은 냉정했습니다.

"둘이 사이가 그렇게 벌어진 줄을 몰랐어. 막내가 좀 입이 무거워. 3년을 참았다는데 까맣게 몰랐지. 죽고 못 사는 부부인 줄만 알았거든. 어떻게든 살아보게 하려고 애들 아빠한테 '서로 이해하며 지내라'고 하니까 '외롭다'면서 눈시울이 글썽글썽하더라. 쌍둥이 밑에 들어가는 게 좀 많아? 생활비 대느라 밤늦게까지 힘들겠지. 하루 종일 애 둘이랑 씨름하면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나면 녹초가 되는 니 동생도 불쌍하고."

가만히 끊으려 해도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이혼입니다. 갈라서고 싶은 수많은 순간을 견뎌 온 우리 어머니에게 저도 "아빠와 이혼하라"고 권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아버지와 사랑 받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폭탄 터지듯 터져 나오는 부부 간의 앙금도 그렇고, 십년이 넘어도 이십 년이 넘어도 똑같은 말싸움이 되풀이되는 영원히 상황에 지친 탓입니다.

부부에게 사랑이란 열정보다는 의리

여자 셋 쌍둥이 두 남자 바람 잘 날 없는 우리 집에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이 행복한 하루는 없었을 것이다. ⓒ 김효진


그런 세월을 넘어왔으면서도 이혼을 떠올리는 딸에게 일흔의 어머니는 처음에 "참고 살라"는 말부터 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고초를 겪을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여자 입장에서 "고쳐지지 않을 것 같으면, 부부 사이가 나아질 것 같지 않으면 하루라도 젊었을 때 결단하는 것이 낫다"는 조언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우리 가족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새롭게 조명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젊은애들 이혼하는 거 보니까 이거 하나는 알겠더라. 느그 아버지가 그래도 기본은 되어 있었다는 거. 어떻게든 끝까지 자기 책임과 의무는 다하려고 했다는 거. 요즘 남자들이랑 비교하면 그것만으로도 후한 점수를 줘야겠더라."

언젠가 아버지는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우리 마누라 불쌍하니까 잘해줘야지' 하다가도 대문만 열면 짜증이 확 몰려오니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 부부에게 사랑이란 확 달아오르는 열정이 아니라 의리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일곱 살배기 쌍둥이들에게 가르치는 사이좋게 놀기 위한 양보와 배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한 꿈결처럼 아득한 어린 시절, 밥상을 뒤엎는 아버지 앞에서 흐느껴 우는 어머니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부부가 함께 맞들면 한결 가벼웠을 우리 집안의 고비 고비에 나의 어머니는 격려하고 박수쳐 주는 지지자 없이 벼랑 끝을 홀로 위태롭게 헤쳐 나와야 했습니다.

"부부가 평생 끝까지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좋지. 그런데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면 어떡해. 사람 일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거든. 그럴 때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갈라서든가, 그쪽을 정리하고 가정을 지키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그건 아니지."

우리 어머니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기를

스물너덧에 휠체어를 타게 된 저 역시 어머니에게는 눈물의 자식입니다. 어머니보다 키 큰 딸을 업고 먹이고 씻기는 부담감에서 자유롭게 해드리려고 저는 산골짜기 장애인 시설로 들어갈 결심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흘 만에 "아직은 너를 돌볼 힘이 있다"며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쭉 체력이 달려서 큰딸을 돌보지 못할까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죽기만큼 싫다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머니는 포기하고픈 순간에 기꺼이 우리 사남매를 보듬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쌍둥이 손자들이 활짝 웃을 수 있도록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힘껏 지원하는 일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포용력이 바람 잘 날 없는 우리 가족을 와해되지 않고 함께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인생의 끝이 새드 무비가 아니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감동의 전율로 강한 울림을 준다 해도 한 여자에게 새드 무비는 너무 가혹합니다. 더 이상 풍랑 일고 화염에 휩싸이는 재난영화도 아니어야 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은 더 행복하게, 어머니의 마지막은 오래도록 잔잔한 미소가 남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기를… 부디 하나님이 이 소원만은 꼭 들어주시길 간절히 간절히 바라봅니다.
#가족인터뷰 #우리어머니 #바람 #평강공주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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