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죄인에서 밑바닥 노동자까지... 내 손이 부끄럽다

[공모-가족이야기] '보통의 삶'이 행복하다는 어머니

등록 2013.09.27 09:48수정 2013.09.2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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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면서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가수 이미자의 노래 <여자의 일생>의 한 대목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참아야 했던 여성들의 애처로운 처지가 묻어난다. 수많은 중년 여성들이 이 노래를 '가슴'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만큼 아팠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이 글의 주인공도 그렇게 아파했던 사람 중 하나다. 여자아이로 태어나 설움을 받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모성애를 강요받았던 애처로운 사람. 이제는 엄혹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피해간 딸을 위해 '어머니의 일생'을 써내려가는 사람, 바로 내 어머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흘러든 열아홉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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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마른 논둑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 이 시절 그녀는 <여자의 일생> 같은 이미자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 정지연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노래방 18번이라는 어머니. 나는 살면서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불러봤을까. 올해로 53세인 그녀는 전남 영광군 염산면 신성리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30분쯤 걸어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단다. 그녀는 8남매 중 차녀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의 농사일을 도왔다. 이따금 아픈 어머니몫까지 해야 하는 날이면 학교를 빠져야 했다.

"처음엔 공부가 재밌었지. 잘하기도 했고. 근데 며칠 학교 빠지고 가니까, 아예 모르는 걸 배우고 있더라. 그러다 보니 점점 재미가 없어지더라."

그렇게 시큰둥하게 학교에 다니던 그녀는 16세에 고향을 떠났다. 당시 부산에 살고 있던 이모가 그녀를 공부시킬 참으로 불러낸 것이다. 공부는 제쳐놓고라도 꽃다운 열여섯에 도시에 가 산다는 생각에 그녀는 얼마나 설렜을까.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부음 소식 때문이었다. 종종 몸이 아프긴 했어도 누구보다 강했던 어머니의 죽음,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줬다. 이별이란 말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그 단절은 지금도 그녀의 인생에 가장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봤다. 얼핏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으로의 복귀였다. 하지만 그녀는 더없이 외로웠다. 어머니가 없는 집, 친구들이 떠나버린 고향은 이미 그녀에게 상실의 공간이 됐던 것이다. 그 마음을 달랠 길이라고는 마른 논둑에 앉아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여자의 일생>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부산에 간 것은 3년이 지난 뒤였다.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고향에서 밀려나 낯선 도시로 흘러들어 간 것이다. 그녀는 부산 반송에 있는 한 직물공장에 취업했다. 새어머니의 소개로 간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주·야간 교대로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실 뽑기, 직물 짜기, 재단하기 등 숙련도에 따라 주어지는 일은 달랐으나 환경은 비슷했다. 먼지투성이의 좁은 작업 공간. 열아홉 소녀는 누구와도 마음의 짐을 나누지 못하고 고된 노동과 외로움을 홀로 감내해야 했다.

스물 셋, 생명을 잉태하다

그녀는 22세 때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맏딸인 나를 낳았다.

"뱃속에 있을 때, 낳았을 때, 처음 엄마라고 불렀을 때 느낌이 다 달랐지. 특히 엄마라고 불렀을 땐 진짜 기분이 묘하더라. 내가 진짜 엄만가 보다, 싶었지."

열 달을 뱃속에 품어 세상 밖으로 내보낸 생명이 너무도 감격스러웠던 그녀. 이후 3년 뒤에는 아들도 낳았다. 당시 그녀 나이 스물다섯.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딸이 크면 클수록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고분고분한 법이 없었고, 스스로 좋다 싶은 것을 찾아다녔다.

반면, 아들은 수줍음이 많았다. 그녀를 닮았다. 엄마 손을 놓을 때면 울음을 터트렸고, 누나를 상대로 여자아이처럼 질투를 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나는 어려서는 아빠 무서운 줄 모르더니, 커서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여자애가 혼자 해외여행 다니고 그러면 걱정이 되지. 근데 말린다고 들을 애인가 말이지. 그냥 참 대단하다 싶더라. 하긴, 요즘은 여자들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니까, 그건 부럽기도 하고."

그녀는 자라나는 딸을 통해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더는 '참아야 하기에 눈물만 흘리는 여자'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때문에 딸에게도 원하는 만큼의 자유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여자보다는 어머니로서 사는 인생에 접어든 지 오래였다.

마흔 살, 가장이 된 아내

대형상점이 본격적으로 동네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던 2005년, 그녀는 조그맣게 운영하던 슈퍼마켓을 정리했다. 주말이면 대형상점에서 넘치게 물건을 사는 손님들도 동네 슈퍼에서는 정을 내세워 두붓값을 깎던 때였다.

슈퍼마켓을 처음 시작하던 때는 2000년 무렵으로 그녀 나이 마흔일 때였다. 당시 IMF 이후 좀처럼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은 가장들을 대신해 많은 아내들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살림만 하던 여성들이 포장마차를 차리고, 보험외판원이 되고, 식당일을 찾아 전전했다.

그녀도 그런 아내, 그런 어머니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작은 슈퍼에서 하루 벌어 낸 수익으로 생활비와 아이들 학원비를 다 충당하기란 어려웠다. 급기야 물건값을 메우기도 버거워졌을 때, 그녀는 카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물건값의 얼마, 생활비의 얼마를 카드로 충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빚이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런 사람이 그녀뿐만 아니었는지 언론도 연일 서민들의 카드 사용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무분별하게 카드를 사용하고, 돌려막던 사람들의 행태를 경고한 것. 일명 '카드 대란'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가정경제를 떠안았던, '빚진 죄인'이 됐다.

쉰 살의 밑바닥 노동자

가게 정리 후, 그녀는 몇 년간 친척 가게와 동네 식당에서 일을 했다. 욕심 없이 먹고 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독립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문제였다. 하나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하나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다. 그녀는 일할 곳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곳이 지금 일하고 있는 청소용역업체였다.

"슈퍼를 그만두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여기서 일 못했을 거 아니야. 6년만 더 일하면 연금도 나오는데. 밤에 하는 일이라 피곤하긴 해도 다른 건 재밌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좋고…."

지난 4년 동안 그녀는 백화점에서 야간 청소를 했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가방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그녀가 쉰이 넘어 주5일, 하루 10시간을 백화점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서 좀 어려웠지. 특히 바닥 청소하고 왁스작업 할 땐 자국이 안 남게 잘해야 하는데 그게 여간 어렵더라고. 근데 하다 보니까 되대."

정말로 그녀는 빠른 속도로 노하우를 터득해 갔다. 바닥에 세제 자국이 안 생기게 하려면 한여름에도 선풍기를 켜선 안 된다는 것, 더위 속에 일하려면 아찔한 휘발성 세척액을 쓸 때조차 마스크는 사치라는 것 등등.

그녀는 매장에서 파는 물건이 아닌 그 앞 청소 상태에 만족했다. 반면 백화점 손님을 안내하기 위해 매장 내 영어 간판을 읽는 건 숙제였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샤넬·마크 제이콥스가 영 낯설기 때문이다. 열아홉에 가졌던 직장이나 쉰 넘어 가진 직장이나 노동조합은 꿈도 못 꾼다. 그러니 임금에는 언제나 '최저'란 말이 앞에 붙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곳만큼 소중한 곳도 없다. 명품이 있어서가 아니다.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일터에서 제법 실력도 인정받는다. 꼼꼼하게, 성실하게 쓸고 닦으니 주변 칭찬도 자자하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몇 년은 더 일하고 싶다는 그녀. 함께 일하는 150명 가량의 직원도 남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가 소속된 업체 직원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고, 나이는 50대가 가장 많다. 다시 말해 그녀는 이곳에서 가장 보통의 사람이다. 보통의 존재라는 사실이 주는 묘한 안도감. 그래서 지금 그녀는 행복하다. 오늘도 곁들임 반찬을 두 손 가득 싸들고 집을 나서는 그녀. 오후 11시가 돼서나 먹는 저녁상은 그 덕에 푸짐해지리라.

그녀 자신이 만족하는 삶. 그러나 자식 눈에는 여전히 애처로운 삶. 그 간극이 서러운 것은 나만일까. 이제라도 그들 인생을 살라고 세상이 달래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여자에서 어머니로, 참고 참아야 했던 그 일생을 써내려간 딸의 손끝은 부끄럽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가족 인터뷰 응모 기사입니다.
#여자의 일생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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