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있는 조르바를 자주 만나자

[서평]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등록 2013.10.06 16:38수정 2013.10.0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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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7일 오후 3시 14분]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작가 니코스 카잔카키스, 그에게는 1950년대 두 번의 노벨 문학상을 탈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기회만. 그래서 어느 문학비평가는 만일 그리스의 크레타 출신 카잔차키스가 '카잔쵸프스키'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또, 러시아어로 작품활동을 했더라면 러시아의 3대 문호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평을 했다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위대한 소설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이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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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초판 1쇄를 발행한 이래 현재까지 스테디셀러로 꾸준한 발행부수를 자랑하고 있다. 올해 5월 세계문학판 30쇄를 찍어냈다. ⓒ 열린책들

부끄러운 얘기지만 문학을 전공한 나는 이 소설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살았다. 아무리 명저를 안 읽으며 살았어도 그렇지, 제목 조차 몰랐다니. 하긴 우리나라 소설도 몇 권 못 읽고 사는 주제에 그 취미가 그리스에까지 이르기는 힘들었던 것일까. 핑계가 과하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두 인물, 카잔차키스와 조르바!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아직 읽지도 않아 그 내용도 모르면서 그들의 이름에 매료되고 말았다. 이름이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라니!

바이오그래피를 보자니 카잔차키스란 인물은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반을 살다간 혁명가이자 애국자이며 사상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 그리스에서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소설이라는 형식은 그에게 그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도구였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아닐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지 못했으리라. 소설의 주인공 '나'가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1917년 34세의 나이에 그가 갈탄광산 사업을 하면서 그가 고용했던 사람이 '조르바'고.

전쟁 속 조르바


작가 카잔차키스가 태어날 당시(1883년) 크레타 섬은 오스만제국(터어키)의 영토였다. 소설 속 조르바가 젊은 날 참전했던 전쟁의 참상은 우리 한국전쟁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아군과 적군을 나눈 것은 '우리민족'도 그리스와 터어키의 국민 중 하나였던 '조르바'도 아니었다.

그리스와 터어키의 전쟁에 참전한 '조르바'는 총과 칼에 피를 묻혀가며 누군가를 쏘고 베었지만 결국 그리스인이 선(善)이고 터어키인이 (惡)이라거나 또는 그 반대라거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조르바는 그들 모두가 그냥 나약한 인간일 뿐 누구의 편도 아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광분한다. 조르바에게는 '나'와 같이 펜대 굴리는 인간들이 곧 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펜대 굴리는 인간들이 모든 악(惡)의 근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끝없는 인간성의 추락 외엔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자체가 비극이다. 소설의 무대인 발칸반도 오른쪽 저편 시리아에서 요즘 발발한 내전은 너무 시대착오적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21세기에도 전쟁으로 인한 비극은 끝날 줄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근원적 반칙이다.

조르바가 '오, 나의 부불리나'라고 부르던 오르탕스 부인은 전쟁덕(?)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제독들을 연인으로 맞이하며 젊음을 보낸다. 그러나 전선을 떠난 그녀의 연인들은 하나같이 함흥차사다. 전쟁은 그녀의 사랑도 반쪽 짜리로 만들어버렸다. 부불리나는 그녀의 마지막 사랑, 조르바의 품에서 두꺼운 화장을 지우고 그저 한 여자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본능적 인간,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주인공 '조르바'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무한한 자유와 이상을 품은 그러면서도 본능적인 인물. 주인공 '나'를 만나자마자 직관으로 압도한다. 무수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관은 그의 삶을 이끄는 안내자이자 나침반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인생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그러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조르바의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면서 늘 하는 선택과 포기의 갈등 사이에 존재하는 기준은 '이성(理性)'이지 '감성(感性)'이 아니다. '이성'은 무언가 예비하고 정확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감성'은 즉흥적이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독립적이다. 불안하긴 해도 아름답다. 인간이 언제부터 뭘 그렇게 준비했던가. 그저 사냥을 위해 돌을 갈고 나뭇가지를 뾰족하게 하면 되는 것을. 사랑을 나누고 새끼를 낳고 먹을 것을 나누는데 뭔 놈의 이성이 필요한가 말이다. 우리 인생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게 도대체 뭘까.

조르바는 말한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순간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뭐 하고 있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조르바는 목재 운반을 위한 고가선 지지대가 모두 무너져 버리고 사업이 쫄딱 망했어도 춤을 춘다. '나'도 따라 춤을 춘다. 조르바의 사업제안에 찬성했고 그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으니 그 뿐이다. 현실을 도피해 크레타 섬으로 도피해 있던 '나'에게는 조르바를 만난 것 만으로도 행운이자 성공인 것이다. '나'는 아직 젊으니 돈은 중요치 않다. 65세의 노인 조르바도 마찬가지다.

'조르바'는 자신의 의지와 직관에 대해(본능에 대해) 종교적 믿음을 갖고 있다.

"인간이란 참 묘한 기계지요. 속에다 빵, 포도주, 물고기, 홍당무 같은 걸 채워 주면 그게 한숨이니 웃음이니 꿈이 되어 나오거든요. 무슨 공장 같지 않소. 우리 대가리 속에 발성 영화기 같은 거라도 들어 있나봐요."

도자기 만들 때 사용하는 돌림판을 운전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집게손가락 두마디를 자르는 사람, 여성이 부르는데 잠자리를 해주지 않는 남자들이 지옥에 갈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조르바 밖엔 없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전 재산을 조르바와의 사업에 몰빵한 '나'나 하룻밤의 열정을 자신의 목숨과 바꾼 '과부'는 비극적인 선택을 한 것 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젊은 나이에  조르바와 같은 친구를 얻은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과부'의 선택은 시대와 마을의 정서(종교)를 감안하면 그녀를 연모하던 청년의 자살이나 '나'와의 동침이 아니었더라도 비극은 예정되어 있었다. 교조적 그리스교도들의 몽매한 이중적 잣대는 한 여성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과부'가 교회당 앞마당에서 피살되는 것이 시사하는 바다. 과부를 구하려고 했던 조르바와 과부를 죽인 남자의 화해는 폐쇄적인 마을 남성들 인간성의 회복을 암시한다.

''나'와 헤어진 돈 한푼 없던 조르바는 7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의 류바를 아내로 맞이하고 펜의 압력에 눌려 엽서가 찢어질 듯한 필체를 자랑한다. 그런 조르바가 귀한 녹암을 발견했다고 '나'더러 시베리아까지 보러 오라고 한다. 극심한 불경기에 장난 같은 조르바의 제안이 야속했던 '나'는 물론 가지 않았다. 조르바로부터 충고를 담은 편지가 날아든다.

"이런 말을 해서 어떨른지 모르지만 당신은 가망없는 펜대운전사올시다. 평생에 한번이라도 그 아름다운 녹석을 봐야 하는 건데, 당신은 보지 않았어요. 일이 없을 때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지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그러나 어제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는 두목 같은 펜대 운전사에게는 지옥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조르바는 본질에 접근하는 삶에 천착한 것 같다. 껍데기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그 따위 삶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거냐'는 거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면서 독도를 오염시키는 주범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는 뉴스를 접하면서 왠지 우린 알맹이는 어디다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배상과 사과는 커녕 오히려 돈을 위해 당시 한국의 위안부 소녀들이 자원했던 것이었다며 헛소리 하는 일본 위정자들에 열이나 낼 줄 알았지, 정작 할머니가 된 피해자들의 존엄한 삶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대한민국 정부와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가해자는 일본만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본질에 접근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조르바의 충고는 '나'를 좋아하고 아끼기 때문에 반갑다. 영화<시네마천국>의 알프레도가 죽기 전 토토를 그리워했던 것 처럼 조르바도 '나'에게 자신이 아끼던 산투르를 남겼으니까.

조르바의 무학의 통찰(딴지일보 김어준 총수표현)은 철학, 종교, 문학, 전쟁, 성(性) 등 인간의 모든 테제들을 아우른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는 위대한 이야기가 된다. 비록 노벨 문학상은 두 번이나 노미네이트되고도 놓쳤지만... 하긴 저 러시아 3대 문호 중 누구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없었다.

덧붙이는 글 <그리스 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열린책들, 2009


#조르바 #부불리나 #나 #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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