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 대목"이라던 한의사가 한숨 쉰 까닭

[공모-김장이야기] 부모님의 김장 날, 젊음의 허리를 빌려드리자

등록 2013.11.25 16:39수정 2013.11.2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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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책상에 앉으면 하던 일을 끝마칠 때까지 진득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나의 집중력은 '칼퇴'라는 즐거움을 다수 선사하기는 하지만 허리디스크라는 평생 친구도 생기게 해주었다.


허리디스크를 친구 삼아 살아온 지 어언 5년. 직장을 다니며 허리디스크를 치료하다보니 난 지난 5년간 주치의 선생님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만났다. 주말의 한의원은 20~30대의 남여 직장인과 40대 이상의 중년 직장인들로 늘 북적거렸다.

얼마 전, 출산 후 허리디스크가 심각해지고 나서 난 어쩔 수 없이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휴직 이후 처음으로 평일에 찾아간 한의원은 정말 한산했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가도 기다림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추나치료와 침 치료를 받으며 주치의 선생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허리 디스크가 현대병이긴 한가 봐요. 직장인들이 못 나오는 평일은 이렇게 한산하네요"라고 선생님께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갑자기 깊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곧 '대목'이 시작돼요. 그게 사실 병원 입장에서나 대목이지…. 저도 처가와 지방 고향집에서 김치를 얻어 먹는 자식된 입장으로서는 참 안타까운 시즌이죠. 이제 곧 평일이 더 북적거릴 겁니다. 날씨도 추워지기 시작하는 환절기인데다, 김장하느라 지친 50, 60대 어머님들이 끊어질 것 같다는 허리를 부여잡고 병원에 오시거든요."

김장철에 평일 허리디스크 전문 한의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라고 한다. 환자들은 모두 나이 지긋한 우리네 어머니 또래의 주부들. 사는 김치는 너무 비싸다며, 자식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며, 사오십 포기의 김치를 담그고 큰돈을 번 것처럼 좋아하는 우리 어머니들은 병원에 찾아와 김치 값 좀 아끼겠다고 김장했다가 병원비만 더 크게 쓰고 간다며 속상해들 하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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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과 여건, 그리고 건강이 허락된다면 부모님의 김장 날, 젊음의 허리를 어머니가 필요한 순간에 빌려드리자. ⓒ 고정미


허리디스크 환자인 필자는 허리에 안 좋은 동작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앉아 있는 자세, 특히 쪼그려 앉아 있는 자세는 허리에 치명적이다. 뿐만 아니라 무거운 짐을 드는 것도 절대 안 된다. 이 말인즉슨, 김장은 허리에 안 좋은 활동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집안 일을 하시며 허리를 이미 많이 쓰셨고, 슬슬 골다공증도 시작되는 나이. 김장이란 버거운 행사를 끝내고 나면 우리 어머니들의 허리는 말이 아닐 것이다. 상황만 짐작해보아도 왜 허리디스크 전문 한의원이 김장철에 대목을 맞이하는지 일반인인 나도 알 수 있었다.

문득, 돌아오는 토요일에 40포기 정도 김장을 할 거라고 하셨던 친정엄마, 주말 즈음에 김장을 하려고 한다던 시어머님이 생각이 났다. 선생님께 김장할 때 허리디스크 방지를 위해서 좋은 방법이 없는지를 물었다.

"안 하는 게 제일 좋죠. 사실 김장이라는 게 옛날에 겨울에 먹을 야채가 없어서 한 거지, 요새 배추 안 나오는 철이 어딨어요. 그냥 조금씩 자주 해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우리도 서양처럼 조리 문화가 입식이었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요. 서서 하는 게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것보다 허리에 훨씬 무리가 덜 가거든요."

어머니께 "김장 안 하는 게 제일 좋다"는 말을 어떻게 할까

진료를 마치고 나오며 핸드폰을 꺼냈다.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께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 끔찍한 허리디스크의 고통을 두 어머니께선 절대 겪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다 그만두었다. 주부로 살아온 지난 세월, 매년 김장을 하셨던 분들이다.

'조금씩 자주 만들어 드시는 게 낫다'고 말씀드리면 아버님이 묵은 김치 맛도 보고 싶어 하실 거다, 김장 김치로 만든 음식은 맛이 다르다, 우리도 챙겨줘야 하는데 조금씩 자주 할 수는 없다 하실 것이다. '굳이 하시겠다면 바닥에 신문지 깔고 하시지 말고 식탁 같은 곳에서 서서 하시는 게 낫다'고 말씀드리면 지나온 세월의 타성에 대답은 "그래, 그래" 하실지언정 실행하지는 않으실 게 뻔했다. 그 수많은 재료를 식탁 위로 올릴 공간도 없고, 어머니들은 무거운 재료를 식탁에 올리시는 것 자체가 무리가 될 수도 있으니.

다시 핸드폰을 꺼내 신랑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말에는 약속 잡지 말라고. 그리고 친정엄마에게는 김장을 토요일에 하시라고, 시어머님께는 일요일에 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간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주말에 쉬어야 한다며 딸과 사위, 며느리와 아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혼자서 그 많은 것을 만드시고는 밤에 혼자 끙끙 소리 없이 앓았을 어머니들께 갑자기 죄송스러워졌다.

이번 주말에 절인 배추를 옮기는 일, 손질 할 또는 손질 한 재료를 운반하는 일, 통에 담은 김치를 김치냉장고로 옮기는 일 등의 힘쓰는 일은 신랑에게 맡겨야겠다. 그리고 내 허리가 신통치 않아 쪼그려 앉아 해야만 하는 작업들은 못 돕겠지만 재료를 다듬는 일, 무채를 써는 일, 풀을 끓이고 필요하신 양념을 전해드리는 일, 양념을 버무리고 절인 배추에 채우는 일 등은 식탁을 조리대 삼아 서서라도 도와드려야겠다. 그리고 수고하신 어머니들 위해 그 날 저녁 한 끼는 내가 돼지고기를 삶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의 회사 친구들, 선배들에게 김치를 어떻게 공수해 먹고 있느냐 물으면 백이면 백 "친정이랑 시댁에서 반반 받아 먹고 있어" 혹은 "엄마가 해주지"라고 답한다. 우리가 오늘도 맛있게 먹는,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고마움이란 맛은 당연해져버린 우리 엄마들의 김치.

지금 우리 어머니들의 정성과 고생, 허리 통증을 수 포기의 김치로 담그는 김장이란 철이 왔다. 상황과 여건, 그리고 건강이 허락된다면 부모님의 김장 날, 젊음의 허리를 어머니가 필요한 순간에 빌려드리자. 내 어머니의 허리 통증과 맞바꾼 김치 맛보다 더 맛난 김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니. 거기다 가족의 화목과 사랑은, 덤이 될 테니까.
덧붙이는 글 '김장 이야기' 기사공모 응모글입니다.
#김장 #어머니 #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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