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0분도 아니고 9분만 걸으라고 했을까

[석남사 가는 길②] 절을 가득 채운 만리향의 아찔한 향기

등록 2013.11.26 11:20수정 2013.11.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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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서 십여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석남사가 있다. 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인 석남사는 인홍스님과의 인연이 깊은 절이다. 1957년부터 20여 년간 주지 소임을 맡으신 인홍스님은 가람을 보수하고 선원 강원을 개설하며 또 대웅전 및 극락전 등을 중건하여서 지금의 석남사를 있게 했다.  

1950년대의 가난했던 우리나라 형편에 절이라고 예외가 있겠는가. 돌보지 못해서 퇴색되고 무너져가던 절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형편에 불굴의 의지와 각고의 노력으로 절을 일으켜 세웠으니 인홍스님은 가히 석남사의 중창주로 불리어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자연과 함께 9분만 걸으세요

한밤중에 언양읍에 도착한 우리는 절 근처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에 석남사를 향해 출발했다. 이른 아침의 고즈넉한 산사를 만나고 싶어서 일찍 나섰는데,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주차장은 비교적 한산했고 절 밑의 상가들도 이제 막 장사를 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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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마당 한 쪽에 앉아서 예불을 함께 올렸습니다. ⓒ 이승숙


왕복 이차선 도로를 가운데 두고 승과 속의 두 세계가 나뉘어져 있다. 길 이쪽은 온갖 욕망이 끓어올랐다가 사그라지는 속의 세계지만, 길 저 쪽은 넘쳐흐르는 탐욕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청정의 세계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승과 속이 이토록 극명하게 나뉘다니, 새삼스레 마음을 가지런히 하며 숲이 우거진 길 저쪽을 바라보았다.

길을 건너자 '가지산 석남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우리를 맞아준다. 세속의 번뇌를 모두 버리고 오직 한 마음으로 진리에 귀의하겠다는 의미가 일주문에 담겨 있다고 한다. 일체 중생을 다 안고 가겠다는 부처님의 마음도 일주문에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합장을 하고 일주문을 들어섰다.

아름드리 소나무들 사이로 한 줄기 길이 나있다. 자연과 함께 9분만 걸으라는 팻말이 보인다. 십 분도 아니고 왜 굳이 9분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그 정도만 걸으면 절이 나온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찾으라는 뜻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십 분이라는 꽉 채운 숫자보다는 약간 비어있는 듯한 9분을 떠올리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꽃이 피면 온 천지가 꽉 찹니더"

숲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니 속세의 미진은 저만치 물러나버린다. 바쁠 것도 급할 것도 없는 느긋한 걸음으로 절을 향해 올라간다. 길 오른편으로는 암반을 훑으며 물이 흐른다.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 우레 소리를 내며 거칠 것 없이 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걸까. 물이 흐르는 길은 자로 재어서 파낸 듯 바위에 반듯하게 물길이 만들어져 있다. 물빛이 시퍼런 것을 보면 깊이 또한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가니 전각들이 보인다. 밖에서 봤을 때는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는데 절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대웅전을 위시해서 여러 법당들이 둘러 있다. 석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립특별선원이라고 하는데 과연 특별선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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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벗어놓은 신발에서도 수행의 모습을 봅니다. ⓒ 이승숙


석남사는 가지산 자락에 들어서 있다. 가지산은 경상남도 밀양시와 울산시, 경상북도 청도군의 도계에 걸쳐 있는 산이다. 어릴 때 고향 동네의 뒷산에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면 산봉우리들이 끝없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아스라이 멀게 보이던 그 산들 중에는 육화산과 구만산 그리고 운문산이 있었는데 그 산들 너머에 가지산이 연달아서 솟아있으니 우리 동네의 산들은 말하자면 가지산과 뿌리를 같이 하는 형제산인 셈이다.

가지산의 첩첩한 산주름 아래 석남사가 있다. 계곡을 건너 절로 들어서니 네모난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 서있는 법당들이 정갈하면서도 차분하게 느껴진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해줄까. 탑이 있고 법당이 있고 그리고 가끔씩 풍경 소리가 들려오는 등, 다른 절과 별다를 것 없이 보이는데 그런데도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단청이 주는 효과가 아닌가 싶다.

석남사를 색깔로 표현하라면 보라색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법당을 칠한 단청색이 보라색톤은 띠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시켜 주나 보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수행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정갈하면서도 따뜻한 인상이 초심자들에게도 전해져 오는 듯하다. 큰 불사를 해서 위세를 높이는 절들이 많은데도 석남사는 그런 세태에 물들지 않고 조촐해 보였다. 그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불가의 전통 덕분일까. 아니면 석남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미덕의 발로일까.

아침 예불이 막 시작되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절 마당을 감싸고 흐른다. 뜨내기 객들도 조용히 마음속으로 합장을 한다. 댓돌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사부대중들의 신발들도 합장을 하고 있는 듯 나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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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향이 피면 온 천지가 꽉 찹니다. ⓒ 이승숙


큰 법당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예사롭지 않은 향내가 풍겨온다. 부처님 전에 올린 향 내음이 마당까지 풍겨오는 걸까. 마음으로 킁킁대며 향을 찾아가니 법당 앞에 있는 나무에서 나는 향내이다. 자잘한 꽃이 가득 피어있는 그 나무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오묘한 향내가 난다. 천상의 향기인 양 아찔할 지경이다. 마침 지나는 노스님이 계시길래 꽃 이름을 여쭈어 보았더니 "만리향이지요, 꽃이 피면 온 천지가 꽉 찹니더" 하시며 알려주신다.

만리향의 향내는 부처님의 말씀인가

법랍이 얼마나 되셨을까. 곱게 나이를 잡수신 할머니 스님이다. 우리와 다른 모습 때문에 스님이라면 왠지 대하기가 어려운데 노스님에게서는 온화함이 느껴진다. 속세와의 인연을 멀리 하신 몸인데도 이리 느껴지는 것은 모성이 지닌 포근함 때문일까.

가던 길을 몇 걸음 내처 걸으시던 스님이 돌아서더니 "금목서" 하며 또 일러주신다. 그 꽃나무의 이름이 만리향이기도 하고 또 금목서라고 달리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 일러주고 스님은 또 걸음을 내딛으셨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정신을 집중한 듯 진중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스님은 맑고 가벼워 보였다. 오랜 수행을 통해 얻은 가벼움인지 스님에게서는 속기(俗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비구 스님들과는 또 다른 온화함이 비구니 스님에게서 느껴졌다. 누구라도 다 편안히 맞아주실 것 같은 따뜻함을 석남사에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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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말씀을 대신한 듯 만리향 향기가 널리 퍼집니다. ⓒ 이승숙


석남사는 누구라도 선뜻 신발을 벗고 법당 안으로 들어설 수 있을 듯이 친근하고 편했다. 만리향이 피면 온 천지가 꽃향내로 꽉 찬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절을 어려워하던 남편까지 가볍게 예불 소리를 따라하고 있다. 알 수 없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전해져 왔다. 부처님의 법이 만리향에 담겨서 온 천지에 널리 퍼져나가나 보았다.

예불 소리를 뒤로 하고 석남사를 내려온다. 코끝에는 만리향의 잔향이 은은하게 남아도는 듯하다. 은근하게 돋보이던 보라색의 단청과 잔잔하게 들려오던 예불 소리를 가슴에 담은 채 우리는 산 밑으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는 오른쪽이었던 계곡은 이제 왼쪽에서 같이 내려온다. 바위 사이로 흐르던 물은 움푹 팬 소를 만나면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하며 내내 우리와 함께 길을 걷는다. 그러더니 마침내 제 갈 길을 찾아 가버린다. 우리도 우리의 길을 찾아 내려온다. 탐욕과 성냄을 내려놓고 거닐던 피안의 세계에서 사바세계로 다시 넘어왔다. 만리향의 은은한 향내를 가슴에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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