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체'였다면, 어디쯤에서 모험을 멈췄을까

[올라! 남미 아르헨티나 배낭여행 39] 체 게바라

등록 2013.11.25 16:07수정 2013.11.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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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자라 초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통령 궁인 카사 로사다에 걸려있는 체 게바라 초상화.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 세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체 게바라(이하 체)이고 다른 하나는 마라도나, 그리고 마지막이 현재 로마가톨릭 수장인 프란시스코 교황이다. 지금은 축구선수였던 마라도나보다는 리오넬 메시가 더욱 유명하다고 한다.

세 사람 모두 20세기의 사람들이지만 체가 1928년생이므로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전 사람이다. 아르헨티나 사람이지만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한 시간보다 밖에서 활동한 시간이 더 많았던 인물이며 아르헨티나 밖에서 더욱 유명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쿠바에서의 성공한 혁명과 비록 실패하였지만 볼리비아, 콩고 등에서의 활동으로 체는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혁명의 아이콘으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체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체라고 가정한다면, 그의 인생 어느 지점쯤에서 모험을 멈추었을까? 아르헨티나의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거나, 쿠바 혁명 성공으로 카스트로에 이은 2인자가 되거나, 쿠바 중앙은행장, 또는 다시 콩고와 볼리비아의 혁명 참여 등. 그러나 나라면 아마도 쿠바에서 카스트로와 함께한 사회주의 혁명 성공 정도에서 만족해하며 주어진 권력을 향유했을 것이다.

체의 사회주의 혁명의 정치적 의의나 성과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가 추앙을 받는 이유는 그가 결코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체는 혁명에 의한 성공의 결과물을 개인적으로 향유하기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세상이 되기를 꿈꾸었다. 소수의 권력자에 의하여 핍박받는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희생에 더욱 소중한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던 신념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수많은 세계의 위인들은 모두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는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위인들 중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른 후 타의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그 편안함을 초연히 버리고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 다시 낮은 곳에서 새롭게 대중을 위한 고난의 길을 자초하며 걸었던 인물을 나는 체 게바라 단 한 사람 말고는 알지 못한다.

물론 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그가 부대를 통솔하면서 부대원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든가 또는 게릴라 활동 중에 붙잡힌 포로들을 잔인하게 처벌하였다는 비난도 있다. 또한 체가 쿠바, 콩고, 볼리비아에서 벌인 일련의 혁명과정에서 반혁명 세력과 수많은 농민들의 피해를 가져온 부정적인 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잘못된 과정과 결과는 체가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죽이면 결과적으로 살인죄가 되지만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세간의 이야기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모든 위인들의 평가는 사소한 잘잘못에 이르기까지 당연히 공과를 분명히 나누어 판단해야 한다. 체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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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조형물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 있는 체 게바라 동상.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이며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원래 이름은 정말 길다.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 이다. 그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북부 도시 로사리오에서 바스크와 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두아르 라파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무신론자였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 죠사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1824년에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등 라틴 아메리카 해방군과 아야쿠쵸에서 싸운 페루 부통령 호세 드 라셀나의 후예이고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세 때 심한 천식을 앓게 되었는데 그의 부모는 아들의 건강을 우선시하여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그가 어렸을 때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럭비 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으며 발작할 때에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참여하곤 했다. 그의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과테말라와 볼리비아를 거쳐 1955년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쿠바 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에 뛰어든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발전을 이끌어가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을 위한 준비에 참여하였다. 1959년 11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쿠바국립은행총재로 일했으며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부장관 직책도 함께하였다.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며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고 다른 별명으로 쿠바사람들은 체를 '아바나의 백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쿠바의 정부 요직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시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체는 사라져 버린다. 이 때 체는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의 CIA가 개입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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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수도 아바나 체 게바라 조형물 아바나 정부청사의 체 게바라 조형물, 밑의 스페인어 뜻은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 ⓒ 위키피디아


총살 후 그의 시체는 볼리비아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를 단순한 한명의 게릴라로 격하 시키려는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죽음은 혁명의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그의 시체는 죽은 지 30년이 지난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국적의 인물이지만 그의 유해가 묻혀있는 쿠바를 비롯하여 중남미 전체를 포괄하는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아이콘으로 깊이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체 게바라는 생존해있던 활동기 보다는 오히려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야말로 요즘 흔히 하는 이야기로 전설이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의사의 안정적인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를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체가 이야기했던 불가능했던 꿈을 마지막으로 글을 맺는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과대학 #볼리비아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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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의 니나 또는 슈타인처럼, 여행과 사진 그리고 건축,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의 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 수타니파타의 그물에 걸리지않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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