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고과 점수 후하게 준 저, 비겁한 건가요?

다가오는 고과 시즌, 또 다시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등록 2013.12.12 15:59수정 2013.12.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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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니 곧 인사고과의 시기가 온다. 모든 직장인들의 초미의 관심사. 이것을 위해 산다는 사람, 애써 무심한 척 하는 사람,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보다는 불만이고 슬픈 사람이 더 많은… 필자도 직장 생활 17년째지만 아직도 막연히 두렵고 어렵다. 싫다. 그러나 우리는 옥석을 가려야 하고 그래야 조직이 강해지고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직급이 낮았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만 고과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 못지 않게 부하 직원들에게 점수를 내리는 것 역시 만만치 않게 어렵고 괴로운 일이다. 필자의 직장은 계량적 수치로 평가를 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업종에 속하긴 하지만, 이 순간이 오면 내 스스로 얼마나 우유부단한 인물인가 하고 놀라곤 한다.

3명의 직원들을 평가했던 기억이 있다. 직원1은 아주 부지런하고 근면한 생활에 업무도 똑소리가 났다. 직업의 특성상 창의성이나 열의가 정말 중요했는데 이 직원은 그런 면에 있어서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나와 친밀도도 높았다.

직원2는 직원1 만큼 부지런하고 헌신적이지는 못했지만 창작의 열의가 대단했고 분위기를 밝게 이끄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열의가 넘쳐서 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욕구를 감추지 못하다 보니 다른 직원들의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직원3은 조금 문제가 있었다. 근무 태도도 요령을 피우는 것이 눈에 거슬렸고 일종의 왕자병 같은 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걸 애써 부정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3명 모두에게 90점 이상을 준 이유

이토록 나름대로의 판단이 명확했으니 아마 시험점수로 나왔으면 이랬을 것이다.

90점 , 80점 , 70점


그런데 나는 쉽게 점수를 결정하지 못했었다. 평소 웃는 얼굴로 혹은 무덤덤하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잘 지내던 회사 동료들에게 그들에 대한 나의 생각과 평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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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엔 이런 인사고과 만큼이나 칼로 무를 배듯 명확하지도 않은 그러나 개인에겐 매우 중요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 sxc


특히 고만고만한 경쟁관계에 있는 직원을 셋이나 상대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간부가 된 지 얼마 안 된 나에겐 쉽지 않았다. 팀워크가 깨질까봐 겁이 났고 일방향적인 고과제도의 불합리와 그러면서도 개인에게 돌아가는 파급이 이 조직생활에서 얼마나 큰 것인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1차 고과자였고 내 위로 2차 고과자가 있었는데 조정하는 절차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결정권은 2차 고과자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이때 나는 비겁하게도 이런 결론을 내놓았다.

94점 , 92점 , 90점

결국 나는 내가 직접 상대하는 직속 부하들 에게는 90점 이상의 좋은 평가를 내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차별된 상대 평가는 내 상사에게 고스란히 바통을 넘겨버리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에게 매우 큰 실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에게만 이런 고민이 있던 걸까?

우리 사회엔 이런 인사고과 만큼이나 칼로 무를 베듯 명확하지도 않은 그러나 개인에겐 매우 중요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달라진 부하직원,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매우 성실한 직원이 있었다. 그리고 명령을 내리면 몸을 사리지 않고 철야든 특근이든 감행하고 상사의 개인적인 수발까지 자발적으로 하는 친구였다.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일한 지 1년 정도 지나 순조롭게 사원 딱지를 떼고 대리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이제 경력에 걸맞은 도약을 하기 위해선 꼭 해야만 하는 더 중요하고 책임 있는 일들이 그에게 맡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팀의 막내, 일개 사원이었던 그에게 발견되지 않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단의 서러운 시절을 힘겹게 견뎌 내고 직급이라는 호칭을 달게 되면 그동안 꽁꽁 감춰뒀던 날개를 활짝 펴서 기대 이상으로 높게 훨훨 날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렇게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동안 직접 나서서 일을 해결하기보다는 철저히 순종과 순응으로 수동적인 업무로 일관하고 '판단'이나 '결단' 혹은 '책임'이란 것에 낯설었던 녀석에게 '책임'이란 청천벽력이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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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직장은 계량적 수치로 평가를 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업종에 속하긴 하지만, 이 순간이 오면 내 스스로 얼마나 우유부단한 인물 인가하고 놀라곤 한다. ⓒ sxc

그동안 훌륭한 어시스트로서 상사와 동료들에게 호평을 받던 인재가 갑자기 무능력자로 전락하게 됐다. 몇 번의 야단을 치면서도 설마 설마 했던 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한 눈을 껌벅이면서 사과와 다짐을 하는 모습에도 지쳐 한계에 다다를 무렵에 고과 시즌이 다가 왔다. 어떤 평가를 내려야 옳은 걸까?

여전히 야근과 특근을 가리지 않고 부족한 성과를 메우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그런 직원에게 인색하게 굴 상사는 최소한 대한민국에는 얼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것에는 은연중에 그 친구 입에서 흘러나온 몇 마디 때문이었다. 위에 언급 했듯이 그동안 충실한 어시스트로서 호평을 받아온 그는 여태 고과를 늘 상위권으로 받아왔고 저평가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는 일종의 '엘리트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 상사에게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 야근으로 대표되는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동료들과의 화합. 이 덕목들이 조직생활에서 수직 상승하기 위한 최고의 무기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에 나는 이 사회 초년생이 조금 징그러웠다.

이것이 과연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과 소양이 되는 것이 맞는 얘기인가? 혹시나 이런 것 때문에 아직도 대한민국은 2류나 3류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일개 부하직원의 고과를 앞두고 너무도 거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외국인 감독과 CEO가 필요했던 이유는...

어려서부터 우리들은 주관적인 판단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인정하고 선발하는 기회를 만나며 살지만 과연 늘 적절했는지 자신이 없다. 나에게 그 권한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다못해 어려서 경험했던 반장선거에서 조차 나와의 친밀도를 떠나 정말 조직을 우선해서 판단할 수 있었는지 그래야 한다는 걸 교육 받고 배운 적이나 있는지…. 현실에 너무도 잘 길들여져 있는 후배 뿐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도 염증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언제쯤이면 우리는 내 개인의 이해관계를 조직, 나아가서는 국가와 사회의 이익 앞에서 겸허하게 분리해서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최소한 조직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을 평가하고 선발하는 과정에 있어서 말이다.

우리에게 외국인 감독이나 CEO가 필요했던 이유가 단지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선진 기술이나 지식 뿐이었을까? 그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 있던 것은 학연과 지연에서 한 발 떨어져 인재를 바라볼 수 있는 그들의 객관적인 시각이 아니었을까?

조직을 형성하고 시스템을 구성하여 일개 개인이 할 수 없는 커다란 일을 해야 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겐 효율적인 평가 제도가 필요하다. 평가를 방해하는 많은 요소로부터 대비할 수 있는 방어책 역시 갖춰야만 한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해도 스스로 쉽게 발탁되는 재주까지 기대한다면… 한 사람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바라는 걸까.
#인사고과 #인재 #리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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