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풍경 담긴 이영춘 박사 유품 수백점 발견

1920년대 의학 연구서와 1930년대 진료일지도 보여

등록 2013.12.27 19:02수정 2013.12.27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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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박사의 대학 강의노트(왼쪽)와 웅본농장 부속 자혜진료소 결산서류(오른쪽) ⓒ 조종안


평남 용강군 출신으로 농촌 인술에 생애를 바친 쌍천 이영춘 박사(1903~1980)의 육필 원고와 진료일지 등 유품 수백 점(사과상자 30개 분량)이 처음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군산시 개정동에 있는 모세스 영아원 전경숙(58·이 박사 막내며느리) 원장은 "(이영춘 박사) 아들과 조카들이 보관하고 있던 유품과 옛날 개정중앙병원(개정병원) 자료들"이라며 "형제들이 군산시에 기증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정리 중이다"고 전했다.


26일(목) 기자가 확인한 유품은 사과상자 2~3개 분량으로, 세브란스 의전(연세대 의대) 재학시절(1925~1928) 강의 내용을 필기한 대형사전 두께의 노트 두 권과 각종 논문, 생리학과 병리학 연구서,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 1935년 4월 부임해서 무료진료를 펼쳤던 구마모토(熊本) 농장 부설 자혜진료소 진료일지(1942년 5월~8월) 10여권, 1935년 결산서류, 개정중앙병원 일지(1948년 12월~1949년 10월) 20여권, 옛날신문 스크랩, 이 박사 조수(채규병)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니 일기장(1949년 4월~10월) 등.

65년 전 개정중앙병원 분위기와 주변 농촌풍경도 담겨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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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스 영아원에 쌓아놓은 사과상자 30개 분량의 유품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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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혜진료소 진료일지(왼쪽)와 개정중앙병원 일지(오른쪽) ⓒ 조종안


전경숙 원장은 "유품들은 지난 11월 말쯤 이곳(영아원)으로 가져왔다"며 "처음에는 글을 시인처럼 감성적으로 잘 쓰셔서 아버님(이영춘 박사) 일기장인 줄 알고 가슴이 뛰었는데, '이 박사님이 기침을 안 하셨다.' '아침에 군산에 가서 두레박, 생선, 김치 등을 사가지고 왔다.'는 대목을 보니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해독이 어려워 다 읽지는 못했지만, 65년 전 당시 병원 분위기와 생활상, 주변 농촌풍경 등을 그대로 보는 듯해서 감동적이었다"고 덧붙였다.  

"오랜만에, 근 두어 달이나 될런지, 곰국(쇠고깃국)을 먹었다. 조기 생선을 먹었다. 몇일 주렸던 위장이 든든한 것 같다. 점심때부터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논에 물이 고이고, 그 물에 벌거벗은 앞산과 그 앞에 서 있는 초가집들이 그림같이 떠 보이는 풍치(風致)도 버릴 수 없는 풍정(風情)이다. 물속에 보이는 푸른 하늘에 흰 구름도 보인다. 논은 갈아지고 못자리판이 준비되어 있다. 황새가(왜 그리도 마르고 껑충한지) 십여 마리 논에 앉아 있다.


소작에 부탁하여 군산에서 백미일두(白米一斗:흰쌀 한 말)에 1400원에 구매. 농촌인 만큼 양미구입(糧米購入) 하기는 용이하리라는 단순한 예측은 과장. (농촌) 실정에 어두운 상식의 소치. 오늘도 아버지께서는 오시지 않으신다···."(1949년 4월 30일 미니 일기장) 

"(줄임) 저녁을 먹은 후 앞뜰에 산책하다. 병원 진찰실에서 늦게까지 의논하고 있는 이 박사 외 의사들(차, 김, 윤, 그리고 개정 김 선생, 고씨 등) 회담에 참석했다. 신축할 학교와 기숙사에 관한 의논이었다. 차 선생에게 첫인사. 미남자(美男子)다. 음악가나 화가 타입으로 보인다. 좀 거만한 점도 있는 듯하다." (1949년 5월 4일 미니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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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병 조수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니 일기장 원본 ⓒ 조종안


미니 일기장에는 개정 간호고등기술학교(군산간호대학 전신) 설립 과정, 당시 병원현황, 의사와 직원들의 생활상, 급성 폐렴으로 한쪽 폐를 잃고 건강을 지탱하다 35세 나이에 3남 2녀(전처 포함 10남매)를 남겨두고 영면(1949년 5월 8일)한 이영춘 박사 두 번째 부인 김순덕 여사 장례식, 추모글, 조문객 명단 등을 꼼꼼하게 메모하고 있다.

이영춘 박사가 필기한 강의노트에는 사람의 주요 장기(臟器)와 신체 일부를 펜으로 섬세하게 그려 넣고 기능과 조직 등을 설명하고 있다.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과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도 포함되어 있는데, 문장 대부분 전문용어인데다, 영어와 한자, 일어로 작성되어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서양 의료 변천사 연구는 물론 1930년~1950년대 경제와 병원 운영 등 사료적 가치도 높을 것으로 전망됐다.

몇 개월 전 작고한 이주운씨(전경숙 원장 남편)는 '쌍천 이영춘 기념관'(이영춘 가옥) 개관을 앞둔 2009년 9월 농촌위생연구소 설립 취지문을 비롯해 부친이 사용하던 가구와 병풍 등 집기 213점, 서적 469권, 사진 199장 등 총 884점을 군산시에 기증한 바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영춘 박사 #유품 #개정중앙병원 #자혜진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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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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