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도덕적인데 국민들은 왜 불행한가

[서평] 로랑 베그의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등록 2013.12.31 17:58수정 2013.12.3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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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사회를 만드는가> 책표지. ⓒ 부키

훈련(?)을 마치고 나오는 예비군들을 본 적이 있는가. 삐딱하게 쓴 그들의 전투모는 불량하기 그지 없다. 웃옷 앞섶을 풀어헤친 '전투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알지 못할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런 예비군들이 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 벌이는 '추태'를 떠올려 보라. 그들에게서 평범한 회사원이나 고리타분한 교사, 원칙적인 공무원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예비군복'이라는 '집단 가면'의 힘은 이토록 막강하다.

시국·공안 이슈가 사회를 달굴 때마다 언론을 장식하는 '아스팔트 할배'들(보수우익단체 소속으로 과격한 거리 시위를 하는 노인회원들을 가리키는 말)은 또 어떤가. 군복을 벗은 그들은 분명 손주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쥐어주는 평범한 할아버지들일 것이다.


동네 친구를 만나 국밥집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그들에게서 '빨갱이 화형식'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화형식'이라는 상징적 퍼포먼스에만 만족하는 힘 없는 노인들이 아니다. '백색 테러'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투사'다. 그들이 갖춰 입은 군복은 그토록 위력적이다.

'군복'이라는 '집단 가면'의 힘에 좌지우지되는 듯

평범한 직장인들인 예비군과 온화한 할아버지인 보수단체 노인회원의 심리적 배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은 '군복'이라는 '집단 가면'의 힘에 좌지우지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율적인 도덕 의지나 정의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인가.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결국 신기루나 허상과 다름 없는 것일까.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는 사회심리학의 관점에서 선악이 우리 머리에서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 그러한 관념들이 개인의 삶이나 타인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사회심리학은 저자 자신의 설명을 빌리면, '타인들이-그들이 함께 있고 없고를 떠나서-우리의 관념, 정서, 행동방식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심을 두는 학문 분과다. 저자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도덕지성'이 어떻게 사회적 교류를 통해 계발되고 재현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부터 보자. 저자는 집단 속에서는 자의식이 약화되고 평소의 개인적 신념과 모순되는 행동을 저지르기가 한결 수월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탈개체성(개인적 정체성의 약화)과 집단이 가져오는 익명성에 근거한다.


탈개체성의 정도는 집단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집단의 구성원 밀도가 높을수록 폭력 성향은 더 커지는 편이다. 그래서 탈개체성이 심할수록 과격한 폭력이 나타난다. (44쪽)

저자가 인용하는, 하버드 대학 로버트 왓슨의 연구 사례는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24개 문화권의 고고학적 자료를 조사하여 전사(戰士)가 자기정체성을 가리고(변장을 한다든가 몸에 색칠을 한다든가) 전투에 나서는 사회일수록 학살이나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고문, 신체 절단 등)가 심하다고 한다. 변장하고 폭력을 저지른 사람일수록 사람들에게 더 심각한 부상을 입히고, 더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며, 사건 이후에도 피해자를 괴롭히는 성향이 두드러졌다는 폭력 사건 분석 결과도 왓슨의 사례와 비슷하다.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으로 유명한 심리학자다. 저자에 따르면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은 인간의 폭력적인 성향이 그들이 처한 상황의 틀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그런데 짐바르도는 이 외에 탈개체성이 위반행위를 야기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실험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이름표를 달게 했고 다른 쪽은 실험실 가운과 마스크를 착용하게 했다. 그 후 두 집단에게 학습과 관련된 연구를 한다는 명목 하에 실험대상자에게 고통스러운 전기충격을 가하게 했다. ··· 그 결과, 실험대상자가 호감형이냐 비호감형이냐에 상관없이 가운과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은 이름표를 단 사람보다 평균 2배나 되는 전기충격을 가했다. (47쪽)

저자에 의하면 탈개체성의 효과는 '책임감의 약화'를 가져온다.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면 타인에게 공격적인 짓을 해도 위험 부담이 적다는 말이다. 거꾸로 말하면 사람은 자신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의 '눈'이 많으면 자신의 행동에 강한 통제를 한다.

저자가 드는 흥미로운 사례들은 우리의 경험적인 직관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조깅할 때 자기를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보다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좀 더 열심히 달린다. 헬스클럽에서도 누군가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령을 더 열심히 들어올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성금 내기와 같은 이타적인 행동을 권할 때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탁할 때와 그냥 봉투에 각자 알아서 내라고 할 때 모금액이 현저하게 달라진다고 한다.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평판을 의식하는 것은 나름대로 확고한 이유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온기를 거부당한 사람들은 정말로 체온이 떨어진다고 한다. 사람은 사회적 배척을 경험한 직후에 자기가 있는 방 안의 온도를 실제보다 낮게 느낀다고 한다. 저자는 사회적 거부를 경험한 직후에 아이큐검사를 받은 사람들이 지능지수가 상당히 떨어지는 결과를 보여주었다는 연구 결과도 인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다수'를 따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저자에 의하면 '다수'는 두 가지 유형의 압력을 행사한다. 하나는 개인이 갖지 못한 타당한 정보를 다수가 갖고 있다는 압력이고, 다른 하나는 다수의 입장에 대적함으로써 거부당하거나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압력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 솔로몬 애시의 실험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애시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A, B, C라는 세 개의 선 가운데 어떤 것이 '보기' 선과 길이가 같은지 물어보았다. 이들 세 개의 길이 차이는 착각할 여지가 전혀 없이 뚜렷하다. 하지만 참가자보다 먼저 일부러 오답을 말한 사람이 한 명일 때에는 오답률이 3.6%에 불과했으나 2명, 3명으로 늘어나면서 오답률은 13.6%, 31.8%로 증가했다. 집단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지 않기 위해 참가자들은 오답을 택한 것이다.

솔로몬 애시의 연구는 17개 국가에서 133번이나 재연되었다. 그 결과 개인의 정체성이 타자와 연결되어 발달하는, 소위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집단에 순응하는 비율이 개인주의 사회에서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서유럽과 북미가 25% 수준인 반면에,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남미 등에서는 평균 37%를 나타냈다. 집단주의 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 우울하게 받아들여야 연구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제11, 12장이다. '인간이 부도덕에 굴복할 때'라는 제목이 붙은 11장은 "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라는 프리모 레비의 제사와 레너드 코헨의 한 노랫말로 시작된다.

'악의 평범성' 개념은 '악'에 대한 우리 상식 돌아보게 한다

눈-보통 / 머리칼-보통 / 체중-보통 / 신장-보통 / 특기사항-없음 / 손가락 개수-열 개 / 발가락 개수-열 개 / 지능-보통 /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했는가? 괴물의 발톱? 기다란 앞니? 초록색 타액? / 광기? /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서 알아야 할 모든 것. (249~250쪽)

한나 아렌트를 통해 널리 알려진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악'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저자에 의하면, 아이히만은 결코 가학적이거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양심적인 사람으로 볼 수도 있었다. 1968년, 베트남에서 일어난 그 유명한 밀라이 학살 사건의 주도자 윌리엄 콜리도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로저 카이유아는 프랑스 공화국의 사형 집행인 아나톨 데블레를 소재로 글을 쓴 바 있다. 언론에서 데블레는 "매일 아침 애완견을 산책시키고 오후에는 장을 보러 나가는 근면한 공무원이자 성실한 가장"의 삶을 꾸려나가는 다정다감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이 온정 넘치는 국가공무원은 단두대의 칼날을 400번도 넘게 휘둘렀지만 직업적으로 그 일을 했을 뿐, 괴물 같은 면모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251쪽)

스탠리 밀그램의 그 유명한 기념비적인 실험에서는 악의 평범성을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설명한다. 개인이 어떤 사람인가보다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가가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결국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 자신의 '악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나 외부의 권위(직속상관의 지시나 조직의 명령)에 따른 결과가 '악행'으로 나타난 것처럼 볼 수 있겠기에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직접 개인의 성격과 복종의 상관관계를 실험을 통해 입증해 보려고 했다. 저자는 실험에 참가한 남녀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사전에 성격을 파악한 뒤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결과, 참가자가 양심적일수록 피해자에게 가한 전기충격의 강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권위에 복종하기 쉽다는 이 결과는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기술-진중하고 체계적인 공무원-과도 맞아떨어진다. 상냥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소위 친절하고 사근사근하다는 사람들이 (TV 프로그램 진행자와 불쾌한 갈등을 겪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피해자에게 기꺼이 전기충격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관찰은 성격의 특정한 면들이 권위에 쉽게 복종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친절하고 순리대로 움직일 줄 아는 사람들, 사회에 나무랄 데 없이 편입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밀그램 모형과 가까운 상황 안에서 불복종을 꺼려했다. (261쪽)

이를 통해 내놓는 저자의 결론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공격성이나 항정신성 약물 남용, 위험한 성적(性的) 행동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좋은 가장의 자질, 수혈이나 봉사에 적극적인 태도, 높은 학업수준이나 야심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오른다는 옛 속담과 정확히 일치하는 결론이다.

도덕과 권위주의를 연계하는 저자의 주장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저자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제시한 권위적 인격 이론을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아도르노는 권위적인 사람을 인습적이고, 파괴적이며, 소수에게 공격적이고, 감정적으로 억눌려 있으며, 성적 방임에 불안해하는 인간형으로 정의했다.

저자의 용어를 빌려 이들을 '노모패스(normopath)'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처럼 지나친 도덕주의가 반사회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자는 지나치게 규범에 집착하는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들이 부당한 명령을 내리는 권위에 잘 저항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은 위선적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실험을 보자. 참가자들에게 관료적 조직을 재현한 역할극에서 위계서열이 높은 역을 준 뒤 도덕적 위반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는지 살피고, 그들에게 돈을 가로채거나 속임수를 쓸 기회를 준다. 실험 결과, 권력을 만끽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눈을 부라리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했다. 권위적인 시스템 속에서 잘못된 권력 행사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는 이유다.

권위적인 시스템의 전형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구성되는 행정·관료 조직이다. 저자의 관점을 빌린다면, '시스템'이나 '조직', '다수'의 그늘 아래 숨어 있는 관료들은 그 익명성 덕분에 도덕적인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동시에 그런 조직 속에 있는 사람들은 권위적인 성격이나 태도를 가지게 될 가능성도 높다. 우리가 사회적 악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질 때 차분하게 살펴봐야 하는 지점들이다.

도덕성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결속력을 높이는 동시에 반대 생각을 가진 이들과 갈등하고 대립하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가 자신의 도덕성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품기보다 명철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그것을 바라볼 때 도덕성이 더욱 완전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배경이다.

대통령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한 나라의 대통령은 다양한 도덕률로 무장한 개인·집단 사이의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면서 그들을 통합하는 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 자신이 도덕·윤리의 전범이거나, 최고의 도덕·윤리로 무장한 '도덕군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많은 대한민국 국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어마어마한 권위주의와, 20대 초반부터 몸에 익혀 온 자신만의 국가주의 도덕 규범으로 똘똘 뭉친 대통령 덕분에 '말 안 듣고 떼 쓰는 아이' 정도의 취급을 당하고 있다. '도덕적인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라는 저자의 테제가 구구절절 피부에 와 닿는 이유다. 지금, 당대에 가장 '정의'롭지 못한 전두환이 '민주정의당'을 만들어 '정의사회를 구현하자'고 외쳤던 1980년대를 떠올리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덧붙이는 글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로랑 베그 지음 ․ 이세진 옮김 | 부키 | 2013. 12. 20 | 368쪽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 철학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

로랑 베그 지음, 이세진 옮김,
부키, 2013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로랑 베그 #부키 #사회심리학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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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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