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한국군이 우릴 폭탄 구덩이에 넣고..."

[베트남 평화기행②] '증오비' 세워진 고자이 마을, 생존자의 증언

등록 2014.03.02 17:16수정 2014.03.0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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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지난 2월 13일부터 5박 6일 동안 구수정씨가 이끄는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과 함께 '베트남 평화기행'을 진행했습니다. 전쟁피해자를 직접 만나며 진행한 평화기행은 베트남이 아닌, 우리 대한민국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꼭 닮은 역사를 가졌으나 비극으로 맺어질 수밖에 없었던 두 나라의 서글픈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전합니다. -기자 말

첫 번째 기사가 나간 후, 지역의 안보단체에서 항의방문을 왔다. 참전했다는 한 어르신은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더 이상 기사를 연재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연재가 계속되면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보이겠다고도 하셨다.

[첫 기사보기] "설명없이 집단학살, 그게 한국군의 특징이었다"

지면을 빌려서 어르신들께 전하고 싶다. 부디 기사가 다 쓰일 때까지만 기다려주시고, 다 읽으신 후 그때 마주 앉아 이야기했으면 한다고…. 또 님들이 우리들의 아버지들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어떤 자식도 제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싶어하진 않는다고….

1시간 만에,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가 몰살당한 마을

위령비, 증오비가 서 있는 고자이 마을을 찾아가는 길.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의 마을을 지나고, 그림처럼 펼쳐진 논과 그 위를 나는 백로를 지나, 끄덕끄덕 가는 길. 가고 싶지 않았다. 학살이 벌어진 마을, 그곳에서 발견하고 느끼게 될 것들이 두려웠다. 하지만 가지 않는다고 없어질 일인가? 버스는 의지와 상관없이 달렸다.

일행들은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위령비가 있는 곳까지 걷기로 했다. 그것이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마을에서 최초로 마주친 50대쯤의 사내에게 고개 숙여 베트남 말로 인사했다. 그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화난 얼굴이었다. 구수정 본부장은 학살이 일어난 마을에는 지금도 한국인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이들이 많다고 했다. 우리 일행을 적대하는 누군가의 얼굴에 마음이 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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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이마을 위령비 위령비는 곧 학살당한 이들의 무덤이다. 33미터 위령비 아래, 380명의 한 마을사람들이 모두 잠들어있다. ⓒ 황윤희


빈딘성은 맹호부대 주둔지이면서, 전쟁 당시 한국군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현재까지 8건의 양민학살 사건이 공식확인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총 1581명의 양민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임서영).

또 그 중 고자이 마을은 단 1시간 만에 마을의 모든 주민 380명이 한꺼번에, 또 야만적인 방식으로 학살당한 곳이다. 1988년 베트남 정부는 이곳을 역사적 유적지로 공식 지정했다. 민간인 학살의 전형적이고도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고자이 마을의 학살이 일어날 당시 여성들은 집단윤간을 당한 뒤 죽임을 당했다. 어린아이는 사지를 찢어 불에 산 채로 태우고, 피신한 방공호에도 짚불을 붙여 던져 사람들이 그 안에서 타 죽었다. 이는 안내판에 활자로 기록된 내용이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가 몰살당한 마을에 다시 사람이 찾은 것은 보름 뒤였다. 온 마을에 시신 썩는 악취가 풍겼다. 썩어 문드러지고 짐승에 의해 훼손당한 시신을 어찌할 수 없어, 사람들은 지금의 위령비가 선 자리에 그대로 매장했다. 그러니 33미터에 달하는 이 위령비는 곧 학살당한 이들의 무덤이기도 하다.

위령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66년 2월 26일, 미제국주의의 지휘 아래, 남조선 꼭두각시 군인이 380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한국군 증오비이며, 동시에 죽은 자를 위한 위령비이지만 베트남 인민들은 여기에 주적 '미국'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위령비 앞에 참배하고 향을 꼽고 인근 마을에서 사온 국화를 한 송이씩 놓았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현지 주민 몇 명이 멀찍이서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향 연기가 그날의 참혹한 풍경을 우리 내면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훌쩍훌쩍 울었다. 30도가 넘는 땡볕 아래 고요히 퍼지는 울음이 죽은 자에 대한 연민인지, 살아남은 자들의 회한인지 구분키 어려웠다.

위령비에는 그날 학살당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반복되는 글귀가 있다. 'VO DANH.' 무명씨라는 뜻이다. 베트남에도 갓난아이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풍습이 있단다. 귀신이 잡아가지 말라는, 우리와 꼭 같은 풍습이다. 번역하자면 '개똥이'쯤 될 그 어린아이의 이름이 위령비에서 무수히 반복되고 있었다. 나열돼 있는 그 무명씨들 앞에서 과연 이것은 용서되고 치유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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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이 위령비에 새겨진 사망자들의 이름. 'VO DANH(무명씨)'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는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아직 어린 아이들이 희생되었음을 말한다. ⓒ 황윤희


험악한 표정으로 수류탄 든 벽화속 맹호부대 군인

고자이 마을이 속해있던 빈안사는 원래 '평안'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학살 이후, 사람들은 빈안사를 따이빈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령비가 있는 곳에는 도자벽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벽화에 한국군이 있다. 맹호부대의 마크를 달고 있는 군인은 수류탄을 들고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이다(벽화가 만들어질 당시, 마크가 실제와 다르다고 국내에서는 시비가 일기도 했다). 위령탑 주위로 마을의 꼬마 둘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뛰어다녔다. 저 꼬마들이 이 벽화를 보고 무엇을 기억하게 될 것인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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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이마을 위령비가 세워진 곳의 벽화. 맹호부대의 마크를 달고 있는 군인은 수류탄을 들고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이다. 이 마을의 아이들이 이 벽화를 보고 무엇을 기억하게 될 것인지 두려웠다. ⓒ 황윤희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나는 벽화 속 내 아버지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한다. 자기가 살기 위해 어떤 만행도 서슴지 않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라지만, 아직 이름도 갖지 않은 어린 아이를 태워죽일 때 그 마음결이 어떠했는지 묻고 싶다. 그것은 물어야 하는 것이며, 다시 회자되어 돌이켜져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때를 다시 말하자는 까닭은 '단죄'에 있지 않다. 그것이 기억되어야 하는 까닭은 오직,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또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치유'를 위해서다. 가해자에게도 폭력의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전쟁 당시, 빈안에서는 학살 희생자들의 원혼을 기리는 '빈안의 한'이라는 대중가요가 불려졌다. 또 베트남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의 자장가가 있어, 오래도록 엄마들이 불러준다고 한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너는 자라서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군들이 우리들을 폭탄 구덩이에 넣고 다 쏘아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나는 간절히,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이길 희망한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시인할 줄 모르고, 그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일 수 없다. 나를 키운 모든 어른들은 잘못은 시인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사람이 도리, 양심을 가진 이들의 도리라 했다. 내 조국도 결국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런 아저씨의 충격적인 증언... 우는 것은 우리였다

"저의 희망은 한국정부가 학살을 시인하고, 한국의 국민들이 이를 진실로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따이빈사에 있었던 학살 피해 생존자 런 아저씨(63)를 만났다. 이 아저씨의 몸에는 지금도 제거하지 못한 수류탄 파편이 온몸을 떠돌아다닌다. 24시간 다리가 저리고 밤이 되면 통증이 심해져, 런 아저씨는 밤마다 들판을 달린다. 달리면 통증이 좀 덜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류탄 하나가 나를 이렇게, 평생 괴롭힐지는 몰랐다"고 했다. 여기 런 아저씨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다.

"음력 정월 23일이었습니다. 새벽 4~5시경, 마을에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자고 있던 주민들의 숨으라는 외침을 듣고 방공호로 숨어들었습니다. 오전 6시가 넘어서자 마을 초입부터 총소리가 들려왔어요. 정오가 될 때까지 총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왔습니다. 비명소리, 울음소리도 들렸지요. 당시 15살이었던 저에게 그래서 학살은 '소리'로 기억됩니다. 어떤 행위보다도 소리가 두려웠습니다.

엄마가 저와 제 여동생을 양쪽에 끼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엄마는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엄마가 있으니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며 우리를 안심시켰습니다. 저는 엄마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오후 4시쯤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오라는 뜻이었습니다. 나와 보니 한국군이 있더군요. 한국군은 우리 가족에게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또 가는 길에 집집마다 들러 모든 사람을 끌어냈습니다.

어느 들판에 도착하자 25가정이 모였습니다. 한국군은 모든 사람을 엎드리게 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게, 또 말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5시가 넘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크게 명령하는 소리를 들었죠.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다연발 총이 발사되었습니다. 또 일제히 우리를 향해 수류탄이 날아왔지요. 총알이 빗발치고 포염이 눈앞을 가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저는 사람들의 머리와 창자가 터져나가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또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 아이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우리 가족은 비명이 잦아들 때까지도 살아있었습니다. 저는 엄마와 여동생이 괜찮은지 돌아보았어요. 그때 뭔가가 발꿈치 쪽에 떨어졌습니다. 본능적으로 앞으로 몇 발짝 튀어나갔는데, 순간 온몸에 수류탄 파편이 박혔습니다. 그 뒤로 전 기절했습니다.

다시 의식을 찾았을 때는 한밤이었습니다. 사람들 몇이 나를 옮겨왔더군요. 곁에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반신이 날아간 채로 신음소리만 내고 있고, 여동생은 뇌수가 흘러나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어요. 그러다 자정이 됐을 때 누이가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누이를 거적에 둘둘 말아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충격으로 기절했습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때 참았던 모든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군요. 이후 고아가 된 저를 마을 사람들이 키우고 공부시켜 주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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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이마을 위령탑이 있는 곳의 안내판. 학살의 야만적인 세부가 기록되어 있다. 1988년 베트남 정부는 이곳을 역사적 유적지로 공식 지정했다. ⓒ 황윤희


런 아저씨는 학살 48년이 지난 지금, 마을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학살을 증언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덕분에 그는 수백 번쯤 그날의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어떨 땐 도망가고 싶을 만큼 이런 증언이 힘들고 싫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방문한다고 하면 보름쯤 잠을 못 잔다. 그때의 모든 것들이 다시 고스란히 기억에 살아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런 아저씨는 지금, 한국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생의 마지막 소임이라 여기고 있다.

런 아저씨와의 만남이 끝난 후, 지역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다과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의 면사무소와 같은 곳의 현관에 급히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훌쩍거렸던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띄워졌다. 바닥에 마주 앉은 우리는 이미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 있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어떤 분이 집에서 손수 담근 술을 한 병 내오셨다. 술잔이 한 배 돌자, 우리는 친한 이웃사촌처럼, 정말 비슷하게 닮아 서로를 구분하기 힘든 같은 민족처럼 웃으며 어울렸다. 서로의 언어로 노래도 불렀다.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어디선가 울음이 시작되었다. 우는 것은 피해자인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였다. 학살의 잔인한 세부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풍경이 우리를 울게 했다. 사실 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다. 거기서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며, 어떤 행동으로 이 겹겹의 혼돈을 전할 것인가?

기이하게도 자리는 점점 그들이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되어갔다. 고국에서 저마다 가져온 슬픔을 풀어놓고 통곡하는 것은 우리였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 것은 그들이었다. 품을 수 없는 과거를 품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그것은 20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의 힘이었다. 또 낙관성을 특징으로 지니는 베트남 민족, 그들이 가진 사랑과 자비의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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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생존자, 런 아저씨 런 아저씨는 “학살 직후에 한국인을 만났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 증오의 세월이 오래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군이 미운 게 1이라면 미국에 대한 증오와 미움은 1만입니다”라고 전했다. ⓒ 황윤희


런 아저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울면 마음이 더 아픕니다. 내가 내 아픔을 견디며 이야기를 전하고 있듯이, 여러분도 그랬으면 합니다. 학살 직후에 한국인을 만났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 증오의 세월이 오래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군이 미운 게 1이라면 미국에 대한 증오와 미움은 1만입니다. 한국인들은 이곳을 찾지만 미국은 그 어느 단체도 이 지역에 와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학살에 직접 책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정부가 이 학살을 시인하도록 할 의무가 여러분에게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희망은 한국정부가 학살을 시인하고, 한국의 국민들이 이를 진실로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열심히 해주길 바랍니다."

바람이 불었다. 일행 중 누군가 런 아저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통곡했다. 그들도 아프지만 우리도 아프다는 것을, 그는 그렇게 전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안성신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민간인 학살 #고자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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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사, 전 안성신문 기자, 전 이규민 국회의원 보좌관, 현)안성시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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