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호스텔 전세낸 한국인들, 대단해

[모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덟 번째 이야기

등록 2014.04.13 14:40수정 2014.04.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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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가로수, 그 열매의 맛은?

세비야로 향하는 야간버스는 만원이었다. 의자 간격은 앞뒤 좌우로 좁아서 움직이기 불편했다. 우등버스처럼 의자를 여유롭게 뒤로 젖힐 수도 없었다. 이 상태로 8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 게다가 차 안은 냉기가 돌아서 패딩 점퍼를 덮고 자는 듯 마는 듯하게 밤을 지내고서야 세비야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대합실로 들어갔다. 대합실 문을 열자 공기가 따뜻하다. 밤새 버스에 앉아있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는데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니 기분도 따라서 업된다. 몸을 녹이고 검색해 두었던 호스텔로 향했다. 길을 따라 죽 늘어선 나무마다 어른 주먹만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았다. 오렌지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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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가로수 오렌지나무를 가로수로 심어 보기만 해도 상큼해 보이고 기분이 업된다. ⓒ 송진숙


반짝거리는 초록 잎과 주황빛 오렌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탐스러운 빛깔의 오렌지를 보자 침이 고인다. 차마 딸 수는 없고 바닥을 보니 오렌지 두 개가 떨어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남들이 볼까 싶어 얼른 한 개를 주워서 겉옷 주머니에 넣었다. 좀 더 걸어가니 나무 아래에 수북이 쌓인 오렌지가 보였다. 여긴 오렌지를 주워가는 사람이 없나. 두 개를 더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가득 차서 불룩하다.

내가 가로수 오렌지 나무를 보며 감탄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은 휴대폰만 쳐다보며 앞서 간다. 꼬불꼬불한 길을 휴대폰에 다운받은 지도로만 보고 찾는 것이 신통하다. 건물들은 크고 시원스러운 데 비해 골목은 왜 이리 좁고 구불구불한지. 혼자서는 절대 못 찾아갈 것 같아서 딸 옆에 꼭 붙어 갔다. 한참을 가서 도착한 호스텔 앞에는 뜻밖에도 톨레도에서 만난 J와 H가 있었다. 새벽에 우연히 만난 것이 반갑고 신기하여 인사를 하며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두 사람은 호스텔에 예약해 놓은 상태였지만, 아직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아 로비에서 쉬고 있었다. 우리도 직원에게 남은 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해서 예약하고 싶다고 했더니 짐을 놓고 다녀와서 체크인 해도 된단다. 우리의 영어도 짧았지만, 직원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듯하여 우리 말을 알아들은 걸까 걱정이 됐다. 이름이라도 적어 놓으면 좋으련만 직원은 괜찮다며 다녀오라고 한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은 코르도바를 가기로 했기에 기차 시간이 될 때까지 로비에서 쉬기로 했다.

J와 H가 짐 정리하는 것을 보다가 눈에 띈 두꺼운 노트. 봐도 되냐고 물었더니 선뜻 내어준다. 여행일정을 짜 놓은 노트였다. 가야 할 도시와 예약해 놓은 숙소, 교통편, 여행 코스, 관람 포인트와 주의사항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마치 가이드북 같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구나 싶어 놀랍기도 하고 그의 계획성에 감탄하였다.


슬슬 배가 고파져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오렌지 세 개를 꺼냈다. 생긴 것은 우리가 먹어 본 여느 오렌지와 다르지 않았는데 빛깔은 더 고와 보였다. 오렌지를 깨끗이 닦아 껍질을 깠다. 껍질은 두꺼웠지만, 오렌지에서 흐르는 과즙과 진한 향이 맛에 대해 기대하게 했다. 모두에게 한쪽씩 나눠주었다. 나도 한입 물었다. 이게 무슨 맛이야? 네 사람은 모두 오렌지를 동시에 뱉었다. 마치 겨자를 진하게 탄 빙초산 맛이 이런 맛일까? 시고 쓴 것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었다. 뱉은 후에도 신맛은 오랫동안 입안에 남았다. 사람들이 주워가지 않는 이유가 있었구나. 아줌마의 실험 정신이 너무 강했나.

J와 H는 이제 세비야 시내를 구경할 예정이라고 했다. 저녁에 플라멩코 공연을 본다기에 우리도 같이 보자고 했다. 오후 7시 공연이니 6시에 숙소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우린 코르도바행 기차를 타러 갔다. 코르도바에 있는 건축 양식이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메스키타 사원을 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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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키타 사원의 내부. 붉은색 돌과 흰색 돌을 교차로 붙여 만든 말발굽 모양의 이중 아치가 특징이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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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뜰 메스키타 사원의 오렌지 정원 ⓒ 송진숙


한 지붕 두 종교의 메스키타 사원 

메스키타는 스페인어로 모스크라는 뜻이다. 그러나 코르도바에 있는 코르도바 산타마리아 성당, 즉 메스키타 사원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스크는 이슬람 사원을 말하므로 메스키타는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사원 두 가지 모습을 지닌 독특한 사원이다.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후 메스키타의 일부를 허물고 그 후에 다시 이 아름다운 사원에 르네상스 양식의 예배당을 사원 중앙에 지었기 때문에 한 사원 안에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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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곳인 미흐랍의 천장-이슬람의 기하학적인 문양과 아랍어가 금박으로 장식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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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한 성당의 천장.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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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키타 사원의 스테인드 글라스 기독교적인 내용을 소재로 한 스테인드 글라스 ⓒ 송진숙

사원 내부는 이슬람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반적인 성당과는 확연히 다르다. 붉은색 돌과 흰색 돌을 교대로 쌓은 이중의 아치는 시각적으로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로마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만든 아치를 800여 개의 둥글고 붉은 기둥이 받치고 있다. 기둥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미로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말발굽 모양의 이중 아치는 낮고 답답한 천장을 높아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를 준다고 한다.

이슬람의 흔적은 또 있다.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곳인 미흐랍은 금박의 아랍어와 기하학무늬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일반적인 성당 내부에 있는 기독교적 내용을 소재로 한 스테인드글라스와는 달리 기하학적인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도 인상적이다.

한편에는 이슬람식 탑인 미나렛이 남아 있어서 이곳이 가톨릭 성당 이전에 이슬람 사원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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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키타 사원의 스테인드 글라스 기하학적 문양의 스테인드 글라스 ⓒ 송진숙


이슬람 흔적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카를로스 1세 덕분이었다. 레콩키스타 운동으로 이슬람을 물리친 후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다 허물고 가톨릭 성당을 지었던 시기였다. 왕이었던 카를로스 1세는 "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을 짓기 위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을 파괴하는가?"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메카를 향해 기도드리는 방향의 미나렛은 남겨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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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키타 사원의 미나렛 이슬람 문화의 흔적인 미나렛. 지금은 성당의 종루로 사용된다. ⓒ 송진숙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원. 여운이 남는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원 근처의 유대인 거리로 간다. 거리는 온통 하얀색이다.

흰 벽 위에 장식된 파란 화분들은 거리를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이게 한다. 관광객을 위한 각종 기념품도 화분처럼 흰 벽 위에 진열되어 있다. 도화지 같은 흰 벽은 그 위에 무엇이 걸려 있든 예뻐 보인다.

칼라오라 탑과 로마의 다리를 거닐었다. 과달키비르강가를 걸어도 보았다. 강가의 푸른 올리브나무 위에는 윤기나는 초록빛의 열대지방 새가 앉아 있다.

거리 위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나서야 아침에 플라멩코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공연장에 가기 전에 체크인도 해야 하니 일찍 가는 게 좋겠다 싶어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 들어갔더니 직원이 바뀌어 있다. 순간 불길했지만, 직원에게 체크인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직원이 하는 말에 우리는 당황했다.

"미안하지만, 방이 없어요. 모두 오전 12시에 와서 체크인했어요. 근데 숙박한 사람들 99.9%가 한국인이에요. 희한하게 오늘만 풀(full)이네요. 그것도 한국인들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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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거리에는 집집마다 화분이 걸려 있고 흰 벽과 꽃길이 아름다워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송진숙


예약 장부를 보여주는데 그 많은 층에 빈 방이 하나도 없다. 정말 어이가 없다. 어쩐지 그 아저씨 영어가 서툴더라. 아침에 확실히 알아봤어야 하는데...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진다. 딸이 옆에서 항의한다. 아침에 있던 직원이 괜찮다고 말했는데 이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직원은 방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다. 더 이상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두워지면 방을 구하러 다니기 위험할 것 같았다. 그럼 다른 숙소를 찾을 때까지 짐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 후 거리로 나왔다.

이러다 거리에서 노숙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노숙이야 하겠어? 성수기도 아닌데... 정말 노숙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여러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도 어딘가에 남는 방 한 개는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딸은 옆에서 플라멩코 같이 보자고 약속한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느냐며 걱정한다. 메신저라도 했어야 하는데 와이파이가 되는 곳을 찾아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하지만 우리가 당장 길에서 자게 될 수도 있으니 숙소부터 찾는 게 급선무이다.

다행히 딸은 세비야 숙소를 검색하다가 봤던 호스텔이 하나 더 있다며 지도를 찾는다. 아침에 왔던 곳과는 정반대 쪽이었다. 그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던지. 골목골목을 돌아 몇 번을 헤맨 끝에 호스텔에 도착했다. 직원 얼굴을 보자마자 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웃으며 "예스"라고 대답한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숙박료를 주고 나서 다시 처음 숙소로 돌아가 짐을 가져왔다.

시계를 보니 이미 플라멩코 공연이 끝난 뒤인 오후 8시 반이었다. J와 H에게 연락했더니 기다리다가 공연을 보러 갔다고 한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큰일 날 뻔했다며 걱정해 준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니 허기가 느껴졌다. 저녁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1월 한겨울에 이 먼 곳까지 와 길 위에서 잠을 잘 뻔했다. 노숙을 면한 것에 안도했다.
#메스퀴타사원 #코르도바 #세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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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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