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주며 부려먹을 거면, 아예 쓰지도 않았죠"

출국 뒤 퇴직금 받으라는 '개정' 외고법... 이주노동자들 반대 서명운동

등록 2014.05.09 15:54수정 2014.05.0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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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까지 줘 가면서 부려 먹을 거면 처음부터 외국인은 쓰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요즘일손 없어서 바빠 죽겠는데 회사 그만두고 자기 나라 가겠다는데 한 푼이라도 줄 생각이 들겠어요? 난 못 줘요!"


귀국을 앞두고 퇴직금 지급을 요구한 이주노동자 앞에 선 사장의 입장은 너무나 단호했고 당당했다. 일손이 없어 바빠 죽겠다는 회사에서 4년째 일하던 빠나니가 출국을 결심한 것은 근무처변경 횟수 제한으로 더 이상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무처 변경 횟수도 빠나니가 회사를 옮겨서 늘어났으면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거나 사장이 바뀌면서 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빠나니가 일하던 회사는 처음부터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회사보다 기본급이 높았다. 다만 근무시간이 좀 더 길 뿐이었다.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가 기본 근무시간이었는데, 기본급이 160만원이었다. 12시간이 넘는 근무시간은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었기에 빠나니는 기꺼이 긴 근무시간을 감내하기로 하고 열심히 일했다. 다만 휴무일은 한 달에 한 번이었고, 약정된 12시간 외에 거의 매일 잔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만성피로에 시달려야 했다.

체격이 왜소하고 말이 없었던 빠나니는 다른 친구들이 회사를 옮길 때마다 '회사를 그만 둘까' 갈등했지만, 근무처 변경 횟수를 넘겼던 까닭에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10월말께 귀국 일정을 잡고 귀국 계획을 세울 때쯤 사장이 이주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연하게 알게 되었다.

퇴직금 647만 원 중 324만 원만 주겠단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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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 지급 각서 퇴직금을 출국 예정일보다 하루 먼저 지급하겠다고 한 각서를 썼지만, 사장은 빠나니가 출국한 후 지금까지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각서는 고용노동부 진정취하를 받아내기 위한 속임수였다. ⓒ 고기복


빠나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한 동료 이주노동자들이 국민연금을 반환받은 적도, 퇴직금을 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가까운 용인이주노동자쉼터(아래 쉼터)에 상담했다. 처음 쉼터에서 회사로 전화를 했을 때 사장은 당연한 듯 '퇴직금을 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귀국하려 한 12월 말일까지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는 퇴직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빠나니는 10월 퇴직금 지급 약속 요구를 했다가 사장에게 주먹질을 당하고 결국 회사를 그만 두었다.


'잔업과 특근 수당 등을 지급했던 근거자료가 없다'며 우긴 사장은 기본급에 준해서 퇴직금을 계산했다. 그 결과 빠나니가 받아야 할 퇴직금은 총 647만 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퇴직금 지급 의사가 전혀 없었던 사장은 너무 억울하다는 듯이 "공장 사정이 힘든데, 매달 50만 원씩 인도네시아로 보내줄게, 그러면 되지?"라며 빠나니를 회유하려 들었다. 빠나니는 퇴직금을 분할로 받는다는 것도 억울했지만, 퇴직금을 인도네시아로 보내준다는 사장의 말을 믿을 수도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보름 후, 빠나니는 고용노동부에 퇴직금 관련 진정을 넣었다.

그러나 사장은 고용노동부의 출석 요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사장은 11월말께 빠나니를 불러서 각서를 써 주었다. 처음에는 1년에 50만 원씩 150만 원을 보내주겠다고 하다가 거절하자, 마치 자신이 한참 양보하는 것처럼 12월 2일까지 150만 원을, 출국 예정일 바로 전날인 12월 30일까지 174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각서를 써 주었다. 자신이 받아야할 퇴직금 647만 원의 반만 주겠다는 것이었지만, 빠나니는 고용노동부에 보내기 위해 각서를 쓰는 것이라는 사장의 말을 믿고 '그것만이라도 지급한다면 진정을 취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고용노동부 진정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사장은 이틀 뒤에 준다고 약속했던 150만 원도 주지 않았다. 말로는 귀국 전에 한꺼번에 준다고 했지만, 역시 지급하지 않았다. 출국하던 날, 빠나니에게 사장은 "통장 계좌번호 알고 있으니까, 곧 보낼게, 걱정 말고 가!"라고 했지만, 5월 현재까지 한 푼도 지급한 적이 없고, 이젠 국제전화는 받지 않는다.

법 개정으로 퇴직금 구경하기 어렵게 된 이주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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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빠나니는 출국 전까지 사장으로부터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 sxc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제13조 (출국만기보험·신탁)① 외국인근로자를 고용한 사업 또는 사업장의 사용자(이하 "사용자"라 한다)는 외국인근로자의 출국 등에 따른 퇴직금 지급을 위하여 외국인근로자를 피보험자 또는 수익자(이하 "피보험자등"이라 한다)로 하는 보험 또는 신탁(이하 "출국만기보험등"이라 한다)에 가입하여야 한다. 이 경우 보험료 또는 신탁금은 매월 납부하거나 위탁하여야 한다. [개정 2014.1.28] [[시행일 2014.7.29]]

② 사용자가 출국만기보험등에 가입한 경우「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8조제1항에 따른 퇴직금제도를 설정한 것으로 본다.
③ 출국만기보험등의 가입대상 사용자, 가입방법·내용·관리 및 지급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되, 지급 시기는 피보험자 등이 출국한 때부터 14일(체류자격의 변경, 사망 등에 따라 신청하거나 출국일 이후에 신청하는 경우에는 신청일부터 14일) 이내로 한다. [개정 2014.1.28] [[시행일 2014.7.29]]

출국만기보험은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이주노동자를 고용한 사업 또는 사업장의 사용자가 퇴직금 지급을 위하여 매월 일정액을 납부하도록 하는 이주노동자 전용보험이다. 외국인 고용허가제 도입 초기부터 시행되었던 출국만기보험은 동법 13조 2항에서 "사용자가 출국만기보험등에 가입한 경우「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8조제1항에 따른 퇴직금제도를 설정한 것으로 본다"고 하고 있다. 다만, 사용자가 납부한 보험금이 퇴직금과 차액이 발생할 경우 이주노동자는 그 차액에 대해 사용주에게 직접 청구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출국만기보험이 영세한 기업들이 고용했던 이주노동자의 퇴직금 지급 보장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해 온 측면이 적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 이주노동자들은 출국만기보험이든 뭐든 퇴직금을 구경하기 어렵게 됐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지난 1월 28일 개정되어 오는 7월 29일부터 시행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출국만기보험금의 지급 등에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정하여, 근로기준법이 정한 퇴직금 지급 시한인 '퇴직 후 14일 이내'에 지급하도록 하고 있었으나, 개정된 동법 13조 3항에 따르면, 퇴직 후가 아니라, '출국 후 14일 이내'로 명시하여, 국내에서는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외국인 근로자가 고용허가 기간 이후에도 출국하지 않아 미등록 체류자로 남는 것을 막기 위해 개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주노동자 당사자들이나 관련 단체들은 퇴직금 지급과 미등록 문제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관련단체들은 퇴직금 본국 지급 정책이 미등록자를 더 양산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법 개정 운동을 시도하고 있다.

빠나니의 경우처럼 이주노동자들은 고용노동부에 진정해도 퇴직금을 제대로 받기가 쉽지 않다. 근로감독관들마저 지급약속을 하고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는 사장들의 말장난에 놀아나기 십상인 것이 현실이다. 그런 마당에 출국까지 해 버리면 퇴직금은 받지 말라는 말이나 똑같다. 설령 출국만기보험을 본국에서 어렵게라도 신청하여 받는다 하더라도, 퇴직금과의 차액이 발생할 경우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출국한 친구들 중에 퇴직금 받은 사람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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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만기보험 지급 시기 개정안 반대를 위한 서명 개정안이 아니라 개악이라며 출국만기보험 개정안 재개정을 위한 서명용지에 이주노동자들이 서명하고 있다. ⓒ 고기복


노동절(5월1일)을 전후해 이주노동자들에게 관련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주노동자들은 외고법 개정을 주장하면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이 퇴직금을 요구하는 일이 쉽지 않고, 받는다고 해도 실제 월급의 절반 정도에 그친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용인이주노동자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방글라데시 출신의 유수프는 지난 4일 삐뚤빼뚤한 글씨로 서명을 하면서 "출국한 친구들 중에 퇴직금 받은 사람 많지 않다"며 "출국만기보험도 퇴직금보다 적고 방글라데시에서 받으라고 하면 퇴직금 많이 적다"라고 말했다.

같이 서명에 동참한 필리핀 국적의 또 다른 이주노동자도 "한국에서 퇴직금을 못 받으면,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만큼 한국에서 더 일할지 모른다"면서 "필리핀에 돈 모아 둔 게 없어서 돌아갈 때 갖고 갈 돈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서명용지를 돌리던 한국어 선생님들은 오랫동안 이주노동자 한국어교실을 운영하며 보아왔던 경험에 비추어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한국이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걸 보면 어이가 없어요. 군사독재 정권 때랑 다를 게 없는 거잖아요.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왜 생겨요. 외국인 고용허가제의 독소조항인 사업장 변경 횟수 제한이나 임금체불, 인권침해 등의 문제와 체류 기한 만료 때문에 생기는 거지, 퇴직금을 한국에서 준다고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 A씨

"출국만기보험이라고 해 봐야 기본급 수준에서 매달 납부하는 건데, 매일 같이 잔업하고, 오늘 같은 일요일에도 일이 많으면 일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실제 급여가 기본급보다 훨씬 많잖아요. 그럼 사장들이 부족한 퇴직금 보내 준대요? 노동부에 가도 받지 못하는데,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 B씨

"출국 후에 받으라고 하는 건 개정이 아니라, 개악이죠. 악덕 기업주들의 입장만 고려한 거 아닌가요? 옛날에 퇴직금 지급하지 않고 산업연수생 고용했던 고용주들의 향수에 부응하는 거죠. 이주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았던 20년 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고, 부끄러운 일이라 개정안 반대를 위해 서명하자고 설명하면서도 정말 민망했어요." - C씨

한편 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7월말 시행을 앞둔 외고법이 이주노동자의 퇴직금 지급시기를 '출국한 때로부터 14일 이내'로 규정한 것은 국내 노동자와 비교했을 때 형평성에 맞지 않고 이주노동자의 퇴직금 청구권과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어 퇴직금 지급 시기를 '퇴직 후 14일 이내'로 한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류 #이주노동자 #출국만기보험 #퇴직금 #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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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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