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왈, '약육강식 자본주의'는 '조화 자본주의'

[서평] 국민과 인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어용사전>

등록 2014.05.11 20:45수정 2014.05.1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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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사전> 책 표지 ⓒ 서해문집


한국경제연구소(한경연)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씽크탱크'라 불리는 곳이다. 명문대 출신 연구원들과 교수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자본가들에게 계급투쟁의 방어논리를 제공한다.

2013년 4월 23일, 한경연은 '바른 용어를 통한 사회 통합의 모색'이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전경련 소속의 자본가들을 위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긍정적으로 선전하는 '올바른' 용어들을 다수 내놓았다.


이들은 '자본가, 자본주의, 약육강식 자본주의, 승자독식 자본주의, 시장점유율, 시장지배적 사업자'를 '경제인, 시장경제, 조화 자본주의, 소비자선택 자본주의, 소비자선택률, 소비자선택 사업자'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자본가들의 기업 활동과 관련된 부정적 용어들인 '과당경쟁, 자유방임주의, 낙수효과'는 '시장경쟁, 불간섭주의, 소득창출효과' 등으로 바꿔 쓰자고 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용어 조작이었다.

한경연의 토론회 소식은 사회관계망에서 거센 비판과 패러디를 불러왔다. '도둑'은 '각종 유무형자산 위치변경인'으로, '회장님 횡령'은 '자기적선'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냐며 비아냥거리는 누리꾼도 있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 책의 집필 배경과 목적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온갖 지배도구와 매체를 이용하여 조작된 말로 계급 지배를 미화하거나 은폐하는 시도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말은 '어용(御用)'의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자본주의 투쟁의 전선에 선 우리는 지배계급의 교묘한 이데올로기 '용어'와도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 한다. <어용사전>은 그 싸움의 작은 실천이다. (14쪽)

저자는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책 전체의 제사(題詞)로 제시해 놓았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쓰느냐에 따라 세계 현실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저자가 훑고 있는 215개 말들의 뜻풀이는 정신을 차갑게 한다. 좁고 알량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우둔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국민과 인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철학적 인민 실용사전'이라는 부제가 당당하게 다가온다.


이런 식이다. 저자는 '교복'을 학생에게는 굴레, 부모에게는 헛돈인 반면에 자본가들에겐 돈줄이고 국가에는 통제수단이 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스승'은 학교라는 상부 구조 영역의 고용인으로서 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전파하는 사람들로 규정한다.

교복에서 학생다움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학생다움을 기껏 복장으로나 판단하려는 얄팍한 수작이다. 저자 말마따나 요즘의 훌륭한 스승은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 출세와 성공으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저자는 보편적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베푼 은혜의 총량이 사회가 스승들에게 베푼 혜택의 총량에 턱없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공권력'은 어떤가. 그 비열함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공적 권력을 이용해 권력자와 자본가의 사적 권력을 지키는 그 메커니즘을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경찰과 군대는 민중의 몽둥이이자 학살자일 때가 많았다. 공권력의 사병화는 특정 국가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우리가 좀 심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만의 역사는 아니다.

하와이대 럼멜 교수가 쓴 <정부에 의한 죽음>에 따르면,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2억 300만 명이 군대와 경찰 등 공권력에 살해당했다. 이 중 1억 6,900만 명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었다. 더욱 경악할 것은, 사망자 가운데 1억 3,000만 명이 자기 나라 공권력에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 공권력은 경제적 지배계급의 사유재산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 국가의 폭력 장치다. 공권력은 '공적 권력'이 아니다. 그 실상은 '사적 권력'이다. (228~229쪽)

언어학자들은 말을 생물에 빗대곤 한다. 이들에게 말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자체의 힘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간주된다. 순진한 발상이다. 그들은 말이 인간이 만들어서 쓰는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간과한다. 그것이 얼마나 허술한 토대 위에 서 있는가를 애써 외면한다.

'진보'라는 말을 보자. 흔히 진보는 '보수'와 대립 짝을 이룬다. 과연 그럴까. '진(進)'은 '나아가다'라는 뜻이다. '퇴(退)'가 대립어다. 저자가 '진보'의 상대어를 '보수'가 아니라 '퇴보'로 보는 이유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다음과 같은 좀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직업 정치꾼과 선거 마케터들의 품 안에서 진보는 싸구려 분내 풍기는 선전 용어가 되었다. 또한 낡은 운동 관료들은 계급을 말해야 할 자리에서 진보를 말한다. 입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되 계급 질서를 바꿀 용기가 없는 인사들은 체면치레용으로 진보를 말한다. 모두 사이비 진보들이다. 이처럼 가짜 진보가 설치면서 노동자계급 운동은 퇴보하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다. 진보의 반대는 보수가 아니라 퇴보이므로. (285쪽)

저자의 붓끝은 시종일관 날카롭다. 그 붓끝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이 얼마나 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가령 '내란음모죄'와 같은 말이 그렇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총으로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내란죄'로 제대로 처벌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입으로 내란을 일으킨 자들은 '내란음모죄'에 따라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내란으로 흥한 자들이 터를 닦은 우리나라에서는, 총과 행위와 현실보다 입과 생각과 가정(假定)이 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저자의 말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역사의 심판' 항목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본문 전체에 밑줄을 그었다. 그 의미의 허망함을 꼬집는 저자의 주장이, 평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알지 못할 답답함의 정체를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이 말을 현실 권력에 저항하지 말고 구경만 하라는 엄포로 해석한다. 공소시효를 넘기고 보자는 범죄자의 심리나 도피의 논리로 본다. 그런 점에서 권력자들이 말하는 '역사의 심판'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역사의 심판'은 항거불능에 처한 민중들의 입에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 심판하지 않은 역사는 조작되고, 은폐되고, 왜곡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역사는 미래에도 제대로 심판받기 어렵다.

'역사의 심판'이란 살아 있는 책임의 주체가 아니라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심판대에 세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침을 뱉어야 할 곳은 죽은 자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얼굴이다. (265쪽)

'4·16 세월호 사건'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저자는 역사를 지배 권력의 존재 이유와 지배 질서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규정한다. 역사와 대화를 나누거나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며, 역사의 판단을 얻는다는 믿음 따위를 지배 질서가 만들어낸 미신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세월호'를 서둘러 역사에 묻으려 하는 이들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지 않을까.

'어용(御用)'은 지배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일컫는 말이다. <어용사전>에 실린 215개의 표제어들은 애시당초 어용과는 거리가 먼 것들인 경우가 많다. '엄마'라는 말에서 어떻게 권력의 앞잡이 노릇이라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엄마'라는 말에 숨은 사악한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 애틋한 말도 얼마든지 어용이 될 수 있다. 우리들의 둔한 언어 감각을 날카로운 <어용사전>으로 벼리면 어떨까. .

<어용사전>(박남일 지음 / 서해문집 / 2014. 5. 1. / 416쪽 / 15,000원)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어용사전 - 국민과 인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철학적 인민 실용사전

박남일 지음,
서해문집, 2014


#<어용사전> #박남일 지음 #서해문집 #언어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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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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