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미스터리'... 언로 막으면 이렇게 된다

[게릴라 칼럼] '언로' 막았다가 4년을 잃어버린 훈구파

등록 2014.05.17 17:23수정 2014.05.1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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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신하들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다산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조선시대 지배층은 처음엔 훈구파였다가 나중엔 사림파였다. 훈구파는 주로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세력으로서,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사림파는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통해 정권 핵심부에 진입한 선비 출신들로서, 중소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따라서 훈구파에서 사림파로의 권력 교체는 정치적 혁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인 혁신이 일어난 때는 제14대 주상인 선조가 등극한 1567년이다. 이때는 조선 건국으로부터 175년 뒤였다. 선조는 진보세력인 사림파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조선 멸망 때까지 조선을 지배한 세력은 사림파나 그 후예들이었다. 

1567년의 권력 교체가 가능했던 것은 그로부터 50여 년 전에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란 것은 1516~1519년에 있었던 사림파의 일시적인 정권 장악을 가리킨다. 사림파 정권은 1515년 연말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1516년 연초에 정권을 장악한 조광조가 이끄는 정권이었다. 이 정권은 1516년 연초부터 1519년 연말까지 근 4년간 존속했다.

조광조 정권의 출현은 훈구파의 장기 독재에 상처를 입혔다. 조광조의 몰락과 함께 훈구파 정권이 복귀하긴 했지만, 그 4년간의 정치를 경험한 조선 사회는 훈구파 집권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사림파 정권이 4년간 보여준 개혁정치를 보면서 '훈구파는 뭐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의문이 확산된 것이다. 이것은 그 뒤 훈구파가 서서히 약해지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사림파의 집권을 앞당겨준 조광조의 디딤돌

이처럼, 조광조가 4년간 정치판을 흔들어놓은 일은 1567년에 사림파가 항구적으로 정권을 잡는 데에 디딤돌 역할을 했다. 만약 조광조가 그런 일을 못했다면, 사림파의 집권은 훨씬 더 지연되었을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조광조의 집권을 도운 것은 다름 아닌 훈구파였다. 조광조의 정권 장악은 기본적으로 조광조의 역량과 중종 임금의 후원 덕분이었지만, 훈구파의 '자책골'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훈구파가 범한 실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 실수가 2014년 5월의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 이 글의 취지다. 

조광조가 등장한 1515년, 조선에서는 미묘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가 25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윤씨는 중종의 첫 번째 왕비였지만 조강지처는 아니었다. 중종에게는 신씨라는 조강지처가 따로 있었다. 신씨는 남편이 왕이 되자마자 이혼을 당했다.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따라서 조강지처 신씨는 연산군의 인척이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쿠데타 주역들이자 훈구파 인사들인 당시의 집권세력은, 신씨가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신씨와 중종을 강제로 이혼시켰다. 그런 뒤에 왕후가 된 인물이 당시 16세인 장경왕후 윤씨였다. 이때 중종은 19세였고 신씨는 2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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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다. ⓒ 김종성


부당한 이혼을 당한 신씨는 경복궁 서쪽에 있는 인왕산의 바위에 치마를 걸어놓고 '1인 시위'를 벌였다. 남편인 중종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중종은 꿈쩍도 안 했지만, 이때부터 신씨에 대한 동정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책임이 없는 신씨가 왕비가 될 기회는 물론이고 결혼생활을 할 권리마저 박탈당했으니, 신씨가 여론의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백성들이 보기에는 신씨와 중종이 재결합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훈구파 대신 2명의 돌발행동이 일을 키웠다

그러던 차에 장경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사림파 관료나 선비들이 신씨와 중종의 재결합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더 나아가 신씨를 왕후 자리에 앉힐 것을 요구했다. 이런 분위기를 대변해서 총대를 멘 사람들이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었다. 이들은 중종에게 상소를 올려 신씨와의 재결합을 촉구했다.

중종반정 때보다 약해지긴 했지만 훈구파가 여전히 권세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중종이 훈구파를 무시하고 신씨와 재결합하기는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상태에서 중종이 다른 여인과 재혼한다면, 박상·김정의 상소는 얼마 안 가서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훈구파 대신들도 "공연히 문제를 확산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두 사람의 상소를 무시해버렸다.

그런데 두 명의 훈구파 대신이 벌인 돌발 행동이 일을 키우고 말았다. 훈구파에 속한 두 대신이 과도한 대응 조치를 내놓은 것이다. 사간원(국정비판 기구)의 수장인 대사간 이행과 사헌부(검찰청과 유사)의 수장인 대사헌 권민수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행·권민수는 신씨와의 재결합을 요구하는 상소가 못마땅했다. 또 이런 상소가 나오도록 만든 민간의 여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박상·김정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훈구파에 대한 도전적 여론을 이를 통해 막아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이행·권민수는 사간원·사헌부를 움직여 박상·김정을 공격했다. 중종 10년 8월 11일자(양력 1515년 9월 22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이들은 중종에게 "(박상·김정이) 감히 사특한 논의를 제기했습니다. …필시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라며 처벌을 건의했다. 이로 인해 박상은 전라도 남평(지금의 나주)으로, 김정은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언로의 중요성을 역설한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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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광장 서편의 세종로공원에 있는 사헌부 터. 건너편에 미국대사관이 보인다. ⓒ 김종성

임금에게 조강지처를 돌볼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나라에 큰 지장을 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이행·권민수는 박상·김정의 상소를 '사특한 논의'로 몰아붙이고 이들을 귀양 보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에 대해 과잉 대응을 한 것이다.

이행·권민수의 행동은 정당한 언로를 막는 일이었다. 이들의 실책을 기회로 포착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였다. 그는 중종에게 상소를 올려, 정상적인 언로를 막는 것은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이므로 이행·권민수를 포함한 사간원·사헌부 관료 전원을 해임해달라고 요구했다.

조광조가 이 상소를 올린 것은 사간원 신입 관료가 된 지 이틀 뒤였다. 중종 10년 11월 22일자(1515년 12월 26일자) <중종실록>에 수록된 상소문에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언로가 통하거나 막히는 문제는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통하면 나라가 잘 통치되고 평안하지만, 막히면 혼란스럽고 쇠망합니다. 그래서 군주는 언로를 넓히는 데 힘써, 위로는 공경(公卿, 총리·장관급)과 백집사(百執事, 전체 공무원)에서 아래로는 주택가와 시장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언로의 중요성을 역설한 뒤에 조광조는 '이행·권민수의 행동은 나라를 망칠 행위'라고 비판했다. 상소에 좀 지나친 내용이 있으면 상소를 채택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상소를 올린 사람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한다면 나라의 언로가 막힐 것이라는 게 조광조의 주장이었다.

대한민국 곳곳에 존재하는 현대판 이행·권민수

중종은 신씨와 재결합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9년간 훈구파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중종은 이것을 홀로서기의 기회로 파악하고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사실상의 전권을 확보한 조광조는 훈구파를 압박하고 사림파 정권을 세워 4년간 개혁정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훈구파는 크게 약화되어 과거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 후에는 훈구파 정권이 복귀했지만, 이때는 이미 훈구파가 상당히 약화된 뒤였다. 약화된 훈구파를 상대로 사림파는 약 50년간의 투쟁을 벌여 1567년에 항구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박상·김정의 상소에 대해 과도하게 대응하고 언로를 막은 이행·권민수의 행동은 훈구파 정권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사림파에게 정권을 헌납하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이들은 본의 아니게 역사발전에 기여하고 말았다.

이행·권민수가 언로를 막지 않았다면, 조광조 정권이 그처럼 전격적으로 성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훈구파 정권이 좀더 강력한 생명력을 보유했을 것이다. 쓴 소리를 듣기 싫어했던 훈구파의 독선과 자만이 결국 스스로에게 상처를 준 셈이다.

한 국가에서 언로가 막히는 것은, 인체로 치면 몸속 곳곳의 정보가 두뇌에 전달되지 않는 것과 같다. 몸속 곳곳의 목소리가 두뇌에 전달되지 않으면 두뇌 자체는 편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결국 두뇌를 포함해서 몸 전체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로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분출되는 국민의 목소리를 귀찮아하고 위험시하는 현대판 이행·권민수가 적지 않다. 이들은 한국을 좀더 나은 나라로 바꾸자는 목소리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차단하려 하고 있다.

정권의 힘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국민의 목소리를 억지로 막아보려는 행동은 결국 권력교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대판 이행·권민수들은 본의 아니게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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