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략가의 혜안, 놀랍네

[김성호의 독서만세⑦]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등록 2014.05.22 17:22수정 2020.12.2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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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체스판 삼인에서 나온 <거대한 체스판> 표지 ⓒ 삼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은 21세기에도 세계1등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따라야 할 세계전략을 미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후진들에게 설명하는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접하는 독자로서는 이런 무거운 주제에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제목이 달린데 대해 다소 의아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게 되면 그런 의아함은 말끔히 풀리고 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냉전기간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해온 미국의 세계 정부적 역할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으로 유럽의 탈미(脫美)적 통합과 중국의 성장, 세계각지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미적 움직임 등을 들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치 체스의 고수가 체스판을 내려 보듯이 통찰하고 써내려갔다.

옮긴이 김명섭은 이 책에 대해 "때로는 정서적으로 호감이 가지 않고,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저자의 책을 탐독해야 하는 것이 순수한 인문학 연구자와는 달리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거쳐야하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라는 평을 달기도 했다. 물론 필자 역시도 저자의 미국 중심적 세계관이 눈에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쉽게 부정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전략적이고 통찰있는 시각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1장, 새로운 형태의 헤게모니'에서 저자는 군사적,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영역의 결합이 미국을 종합적인 의미에서 최강대국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이러한 지위가 아무 노력 없이 안전하게 유지되지는 않으며 끊임없는 전략적 움직임을 통하여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는 2장에서 '지정 전략적 게임 참가자'와 '지정학적 추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미국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한 국가들과 주변국들에게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들을 추리고 이들과 관련한 미국의 미래전략을 펼쳐나간다.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그는 '제3장, 민주적 교두보'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향후 유럽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방향을 제시한다. 이 장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로 묶을 만한 거대제국이 등장할 경우 미국이 더 이상 초강대국으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우려가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유라시아는 미국의 힘보다 훨씬 강력하며 이러한 유라시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미국을 넘어서는 일등국가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는 소련과 중국이 과거 유라시아를 장악한 적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주름잡는 거대 세력으로 오랜 기간 군림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브레진스키는 21세기 미국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전략에 따르면 유라시아의 통합을 막기 위해 미국은 계속 유라시아의 체스판에 참여하여야 하는데 이 때문에 유라시아에 미국의 힘이 내려앉을 수 있는 민주적 교두보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브레진스키는 유라시아의 서부에 위치한 유럽지역과 동부의 남한이나 일본지역이 현재까지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정치적 무정부상태이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남부지역이 미국의 전략이 구사될 주요한 지역으로 부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유럽연합이 동쪽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데 주목하였는데, 이런 현상이 러시아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발트해연안의 여러 국가들과 지정학적 추축국인 우크라이나를 향후 유럽연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미국과 같은 민주적 이념을 공유하는 유럽의 힘이 더욱 강성해질 수 있다. 이는 유라시아에 미국의 힘이 닿는 영역이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잠재적으로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러시아와 중국 등이 강성해지더라도 유라시아 내에 미국과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민주적 교두보를 마련하여 향후 미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인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괴벽이 있고 짜증을 부리는' 프랑스와 역사적 과오를 가지고 있는 독일이 서로를 보완하며 유럽을 지도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미국이 공식적으로 유럽의 일에 관여할 수 있는 통로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이전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국가들이 의존하고 있던 형태에서 벗어나 미국과 유럽의 동등한 상호협력을 통한 범 대서양 권 안보기구로 새로운 전환을 하여야 한다는 다소 획기적인 주장을 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볼 때 그가 단순한 보수주의자가 아닌 미국의 장래를 위한 혜안을 갖춘 인물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중국이 관련되는 동아시아의 판도에 대해 그는 미국, 일본, 중국이 참여하는 삼각 정치 안보 협력체의 출범을 구상한다. 이 협력체의 출범은 더욱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참여를 독려할 것이고 이러한 참여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의 대화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일련의 협력과 대화는 범 대륙적 안보를 위한 공동체를 탄생시킬 수 있으며 이렇게 된다면 더 이상 미국은 유라시아에서 자신과 맞설 만한 존재의 탄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미국의 패권과 인류의 공영을 동시에 이루려 했지만

그는 이렇게 잠재적 적국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하여 잠재적 협력자로서 발상의 전환을 꾀하였고 더 큰 유럽공동체와 보다 협력적인 아시아공동체를 통해 유라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대화와 협력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원대한 제안을 꺼내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유라시아대륙이 아닌 국가로서 미국이 참여하는 형태로 말이다.

그는 단일국가의 손에 패권이 주어지는 시기는 지났다고 단언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전 지구적 협력 구조가 탄생할 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구조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유일한 세계 초강국으로서의 지위를 미국이 담당하여야 한다는 이원적 정책목표 역시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전략적으로 세계적수준의 '민주적 확장(Democratic Enlargement)' 을 추구해야 하지만 비록 민주주의를 추구하지는 않더라도 방법적인 면에서 중국 등의 나라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클린턴 행정부가 시도했던 '확고한 다자주의(Assertive Multi-lateralism)' 와 부시행정부가 시도했던 '패권적 정책'은 세계적으로 미국 중심성을 유지하는 한편 인류 공존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비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노 전략가의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 글을 통해 나는 기존에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미국 보수주의자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부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계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을 미국이 제시하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 책을 써 내려갔다.

비록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를 거치며 브레진스키의 구성은 현실화되지 못하고 그의 세계구상의 유효성도 상당부분 유실되고 말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가 바라본 세계관과 그 아래에서의 전략구상은 여전히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크림반도의 사태를 통해 보여지는 것처럼 푸틴의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는 지금 이 상황에서 브레진스키의 구상은 더욱 가치있게 느껴진다.

특히 유럽의 확대와 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공동체의 창설을 통해 범 대륙적 협력체를 구성하여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거대한 비전을 훔쳐본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미국의 관료출신으로 미국 중심적 전략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어 수많은 독자에게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보이지만 그러한 반감을 덮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전략과 시야를 보여주고 있어 이 책이 본래 가지고 있던 목적은 유감없이 달성했다고 본다.
덧붙이는 글 <거대한 체스판>(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지음, 삼인 펴냄, 2000년 4월, 292쪽, 9500원)

거대한 체스판 - 제2판

Z.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 옮김,
삼인, 2017


#거대한 체스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삼인 #지미 카터 #조지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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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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