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변호사의 뜻밖의 제안, 놀라웠다

[서거 5주기] 내게 악수를 청한 노무현 대통령님, 고맙습니다

등록 2014.05.23 15:31수정 2014.05.2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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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은 토요일이었다. 그 전날, 나는 직장 동료들과 거나하게 술을 한잔 했다. 그리고 늦게 귀가한 나는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늦잠을 잤다. 그렇게 한가하고 행복한 토요일 아침을 맞아 거실로 나온 나는 주방에서 해장국을 끓이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해석하기 어려운' 굵은 자막과 영상을 봤다.


기억하기에 처음 본 영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 등반중 추락'이라는 자막이었다.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두 눈을 크게 뜬 채 "어어..."라며 불길한 느낌을 지우려 했다. 그런데 몇 분 후 다시 뜬 자막은 '노무현 전 대통령 투신한 듯'이라는 내용이었다. 경악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상황 판단을 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서 허우적 거렸다. 그러면서도 보도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추락하고 또는 투신해서 많이 다치기는 했겠지만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라고 믿으려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뜬 자막을 본 나는 경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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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보고 있다. ⓒ 유성호


나는 짧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만 부릅 떴다. 그리고 이어진 슬픔과 분노와 애도의 시간은 그날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를 먹먹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짧았지만 강렬했던 어떤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나에게 있어 '내 마음 속 영원한 대통령'으로 남게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결코 노무현 대통령을 잊지 못하게 될 이유였다.

노무현 대통령, 그 짧고 강렬한 추억


1996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재야 단체에서 인권운동을 하고 있었다. 전농, 민주노총, 한총련, 전교조, 전국빈민연합 등 우리나라 재야 단체를 총 망라한 연합 본부인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에서 인권위원회 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 인권위 부서에는 참여정부 법무부장관을 지낸 천정배 변호사를 비롯하여 전 현직 국회의원인 전해철, 임종인, 이종걸, 유선호, 부좌현 등 인권 변호사 23분이 인권위원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내 업무는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민자당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싸우다가 체포되면 이들을 위해 인권 변호사를 지원하거나 법률적 집단 대응을 위한 연대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도 이런 문제를 상의하고자 지금도 열정적인 인권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이덕우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동의 해마루 합동법률 사무소를 찾았다.

그런데 도착해 사무실 유리문 너머로 해마루 안을 얼핏 보니 매우 어수선했다. 누군가가 새로 입주를 하는 듯 소파와 책상, 그리고 책 뭉치를 든 이들로 분주했다. "날을 잘못 잡고 왔구나" 싶어 후회했지만, 그래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그렇게 짐을 들고 부산하게 움직이던 일행 중 낯익은 한 사람이 보였다. 바로 정치인 노무현이었다.

내가 처음 정치인 노무현을 각인하게 된 때는 1989년 12월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그해 말, 광주 민주화운동 마지막 청문회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자리에서 당시 노무현 의원은 '자위를 위한 정당한 발포' 운운하는 전두환을 향해 명패를 집어 던졌다. 그 정의로운 분노에 나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이후 노무현 의원의 정치적 행보는 순탄하지 못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통일민주당의 총재 김영삼이 3당 합당을 결정한 후 "통합에 대해 이의 없냐"는 형식적 물음과 동시에 방망이를 내리치자 "이의 있다"며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으로 혹독했다. 이어진 선거 낙선 행진. 92년 부산에서의 총선 실패,  95년 부산시장 낙선, 연이어 96년 서울 종로에서 그는 또 낙선했다. 그래서 붙게된 그의 별명은 '바보 노무현'이었다.

사람들은 노무현이 스스로 선택한 고난이니 충분히 잘 견디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연이은 3번의 낙선 앞에 당시 노무현 의원도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 내가 해마루에서 우연히 그분을 뵌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연에 의하면 1996년 총선 당시 종로에서 맞붙은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에게 또 다시 패배하자 노무현 의원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결국 고민 끝에 노무현 의원은 더 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접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해마루 대표 변호사였던 이에게 전화한 노무현 의원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며 "해마루로 합류할 수 있겠냐"고 의사를 타진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내가 그 분을 뵌 날은 그렇게 사무실로 새로 입주하기 위해 이삿짐을 부리던 중이었던 것이다.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 반가웠지만...

한편 생각지도 못했던 자리에서 노무현 의원을 만난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존경해 오던 분이었지만 전에 인사를 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아는 체 하기도 뭐했고 그렇다고 모른 척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하여 그야말로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그때였다. 낯선 누군가가 사무실로 들어섰다는 것을 느낀  노무현 의원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 누구를 만나러 오셨어요?"

그 특유의 억양이었다. 정말 노무현, 그 분이었다. 나는 속으로 반갑고 좋으면서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함을 유지하면서 "네, 이덕우 변호사님 좀 뵈러 왔는데요. 지금 계신가요?"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이런, 어쩌죠. 이 변호사가 좀 전에 재판하러 간다고 나가셨는데요"라며 난감해 하는 표정으로 답변했다.

나는 "아, 그러세요. 그럼 할 수 없죠. 다음에 다시 또 들르겠습니다"라고 한 후 돌아섰다. 내가 다시 들르겠다는 말과 함께 돌아서서 유리문을 밀고 나온 시간은 길어야 2, 3초나 걸렸을까.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솔직히 갈등했다. 아. 내가 좋아하는 저 분을 지금이라는 아는 체 하며 인사라도 할까. 아니면 좀 그러니 그냥 갈까. 할까, 말까. 하지만 그 순간적인 갈등은 너무 짧았고 나는 이미 유리문을 밀고 나와 있었다. 결국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내처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을 때였다.

"저, 잠시만요. 저 좀 보시겠어요?"

돌아보니 노무현 의원이었다. 내가 나온 후 곧바로 나를 따라 복도로 나온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아쉬웠던 순간이었는데 다시 노무현 의원을 뵈니 솔직히 좋았다. 아니, 기뻤다.

"네? 왜 그러세요."

말은 또 다르게 나왔다. 참 바보같은 부끄러움 때문에 나는 내 감정에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때였다. 정말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노무현 의원이었다.

"저기요. 여기까지 이렇게 오셨는데 그냥 헛걸음으로 돌아가시는 걸 보니 제 마음에 좀 그래서요. 그러니 저하고... 그냥 악수나 한 번하고 가실래요?"

뭐랄까.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배려와  고마움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내 앞으로 웃으며 손을 내밀던 그분과 나는 악수를 나눴다. 그때 노무현 의원과 악수를 하며 느꼈던 체온과 미소는 이후 내가 그의 지지자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노무현을 비난하는 이들이 노무현의 진심을 가식이니, 위선이니 하면서 말하는 것이 대해 나는 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다. 나는 노무현의 진심을 봤다고.

저하고 악수나 한 번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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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8월 31일, 중앙언론사 논설해설 책임자 간담 및 오찬 때 모습 ⓒ 노무현재단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타인에 대한 배려를 또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세월이 흐른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였다. 대통령 선거 시기마다 각 방송국들은 후보로 출마한 이들의 선거운동 동정을 스케치하여 방영하곤 했는데 나는 그 프로그램을 우연히 시청하던 중 다시 또 노무현의 따스한 배려를 봤다. 그날 나에게 보여준 행위가 결코 즉흥적인 태도가 아니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때 방송에서의 상황은 이러했다. 선거운동 중 지방에서 숙박을 하던 날 밤이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와 동행 취재를 하던 한 기자가 선대위 대변인을 만나기 위해 호텔의 객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방은 대변인 방이 아니라 노무현 후보가 묵던 방이었다. 당황한 사람은 기자였다.

"아. 죄송합니다. 대변인 방인 줄 알고 잘못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자는 연신 노무현 후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황급히 방문을 닫고 나오며 마침 이 장면을 촬영하던 방송국 카메라를 향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다시 문이 열리며 노무현 후보가 따라 나왔다. 그러면서 노무현 후보는 기자에게 손을 내밀며 웃으며 말했다.

"아. 기자님. 그렇다고 또 그렇게 가시면 안 되잖아요. 그럼 저하고 악수나 한 번 가고 가세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날의 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해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뽑는 투표장에서 내가 주저없이 노무현 후보를 선택한 이유였다.

한편 그후로부터 지금까지도 내가 하는 습관이 있다. 악수였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잘 모르는 사람이든, 또 어떤 악연으로 다투더라도 그 마지막엔 꼭 악수를 청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개 뜬금없이 악수를 청하는 나를 보며 웃었다. 개중에는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어디 출마라도 하냐"며 웃곤 한다.

밝히건대, 진짜 이유는 그때 내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받았던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였다. 나 역시 그 분처럼 누군가를 배려하는 따뜻함을 전파하고 싶어서였다. 그날 내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받았던 '작지만 따뜻한' 그 느낌을 나 역시 나비 효과처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민을 '아껴준' 대통령, 국민과 '함께' 울어준 대통령, 그리고 국민보다 '먼저 울어준' 대통령. 내 마음속 영원한 대통령 노무현님. 다시 그날의 5월을 맞으며 약속합니다. 잊지 하겠습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립습니다.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다는' 말로 당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며, 당신께서 저에게 남긴 그 타인을 위한 따스한 배려를 행동으로 실천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깨어있는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늘 경계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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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을 찾은 사람들을 맞으러 나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 노무현재단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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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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