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잘 모를 수도 있는 '오빠'의 역사

[송준호 교수의 길거리 사회학] '오빠'는 이렇게 변해왔다

등록 2014.06.07 09:11수정 2014.06.0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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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8월 14일과 15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슈퍼소닉 2013에서 조용필이 공연하고 있는 모습. ⓒ 슈퍼소닉2013


1982년에 가수 조용필이 발표한 4집 앨범 타이틀은 <못 찾겠다 꾀꼬리>였다. 그 앨범 안에는 <꽃바람> <난 아니야> <자존심> <보고 싶은 여인아> 등의 노래가 실려 있었다. "기도하는…"이라는 노랫말이 나오면 수많은 소녀들의 비명(?)이 뒤따르던 노래 <비련>도 그때 발표됐다. <비련>에 얽힌 사연이 얼마 전에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돼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줬다고 한다. 그 사연의 대략은 이렇다.

어느날 조용필의 매니저가 시골 요양병원 원장의 전화를 받았는데 내용은 이랬다. 14살짜리 지체장애 소녀가 <비련>이라는 노래를 듣더니 입원 8년 만에 처음으로 감정을 보이며 눈물을 흘렸다. 조용필이 직접 요양병원으로 찾아와서 소녀에게 노래를 불러줄 수는 없겠는가. 소녀의 보호자가 그걸 간절히 원하고 있다. 소녀에게 얼굴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사연을 전해 들은 조용필은 적잖은 위약금을 물기로 하고 그날 예정된 네 개의 행사를 모조리 취소한 다음 요양병원으로 한걸음에 달려간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소녀의 손을 꼭 잡고 즉석에서 노래 <비련>을 부른다. 노래가 계속되자 소녀는 감정의 변화를 보이더니 급기야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녀의 부모와 병원 관계자들도 눈시울을 적신다.

노래를 마친 조용필은 눈물로 범벅이 돼 흐느끼는 소녀를 꼭 안아준다. 미리 준비해 간 음반에 사인을 해서 소녀에게 선물하고 차에 타려고 하는데 소녀의 엄마가 다가오더니 사례비는 얼마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 말에 조용필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오늘 따님이 흘린 눈물이 제가 평생 벌었고 앞으로 벌게 될 돈보다 더 비쌉니다."

'비단 구두를 사다 주마' 약속한 오빠

조용필에게 붙는 수식어가 하나 있다. '가왕(歌王)'이다. 대중가수로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가히 '가왕'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데 그보다 연륜이 깊은 수식어는 따로 있다. 바로 '오빠'다. 1980년대 초중반 이 땅의 수많은 소녀 팬들은 그를 주저 없이 '오빠'라고 불렀다. 공연장에서만이 아니었다. 사석에서 3인칭으로 가리켜 부를 때조차 '조용필 오빠'였다. 


그 옛날 이 땅의 수많은 소녀에게 오빠는 '어린 아빠'였다. 오빠를 아빠처럼 듬직한 존재로 인식했던 것일까(일부 학자들은 오빠의 어원을 '오라바'로 소급하기도 한다, 이는 '아버지에 비교해 봤을 때 미숙하고 어린 남자'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오빠는 누군가에게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이성이기도 했다. '오빠'라는 말에 간절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담겨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1925년 11월 <어린이>라는 잡지에 처음 발표돼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동요 <오빠 생각>이 그걸 잘 보여준다. "뜸북뜸북 뜸북새"로 시작되는 그 노래의 작사자는 최순애라는 이름을 가진 당시 11세 소녀였다고 한다.

어린 여동생에게 비단 구두를 사다 주마 약속하고 서울로 떠난 오빠는 뜸북새와 뻐꾸기가 울어도, 기러기 날아오고 귀뚜라미가 슬피 우는데도 소식이 없다. 어쩌랴. 일제의 학정과 수탈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으니 말을 타고 서울 간 오빠는 독립운동을 하는지, 돈을 버는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 노래는 또 '조용필 오빠'가 요즘 말로 리메이크해서 부르기도 했다.

'오빠'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더 있다. 1936년 동양극장에서 초연되었다는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다. 이 신파극은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의 기구한 운명을 다루고 있다. 그 주제곡인 <홍도야 우지 마라>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데, 그 노래는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로 끝난다. 노랫말로만 보면 홍도의 오빠 또한 '아내의 나갈 길'까지 가르쳐주는 '어린 아빠'로 손색이 없다.

전후맥락을 살펴야 알 수 있는 '오빠'의 정체

그래서였을 것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땅의 수많은 여자 대학생들은 조용필 오빠를 제외하면 아무한테나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자 선배는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서너 살 차이가 지는 선배한테 즐겨 쓴 호칭이 따로 있기도 했다. 바로 '형'이었다. 남자들끼리 쓰는 그 '형'이라는 말을 여자들이 쓰기도 했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남자친구'(남친)나 '여자친구'(여친)는 말 그대로 이성 친구일 뿐 그 이상이나 이하의 뜻으로는 잘 쓰이지 않았다. 그건 '애인'하고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개념이기도 했다. 데이트를 하면서 애인을 부를 때는 주로 '자기'라는 호칭을 썼다.

그런데 '애인'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자취를 감춘 듯하다. 이건 중국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도 과거에는 '애인'의 뜻을 가진 '칭뤈'(情人)을 썼지만, 요즘에는 '난펑여유'(男朋友) 아니면 '뉘펑여우'(女朋友)를 쓴다.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바로 '애인'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요즘에는 남자선배를 '형'이라고 부르는 대학생 또래의 여자들은 거의 없다. '남친'이나 '여친'은 애인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이 또한 아무에게나 쓰지 않는다. 대신 과거에는 거의 금기시했던 '오빠'를 남자선배들에게 주저없이 갖다 붙인다. 이때의 오빠는 <오빠 생각>이나 <홍도야 우지 마라>의 오빠와 뜻이 사뭇 다르다. 더 이상 '어린 아빠'가 아닌 것이다.

집집마다 하나나 둘만 낳고 말기 때문일까.  친오빠가 귀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 선배도, 직장 선배도 '오빠'다. 그렇다고 친오빠만큼 친근감을 느끼거나 '어린 아빠'라는 뜻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그 호칭을 쓸 때의 전후맥락을 살펴야 진짜 오빠인지, 선배인지, 장래를 약속한 애인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소녀 눈에 비친 조용필은 '어린 아빠'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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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가에서 발견한 문구. ⓒ 송준호


신디 로퍼라는 미국가수가 불러서 크게 히트한 노래 중에 <She Bop>이라는 곡이 있다. 그걸 우리나라 가수 왁스(WAX)가 멜로디를 따다가 가사를 붙여서 불렀는데, 그 제목이 <오빠>다. 노래를 한번 들어보자.

"그냥 편한 느낌이 좋았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이게 뭐야 점점 남자로 느껴져 아마 사랑하고 있었나 봐 오빠 나만 바라봐 바빠 그렇게 바빠 아파 마음이 아파 내 맘 왜 몰라줘 오빠 그녀는 왜 봐 나빠 그녀는 나빠 봐봐 이젠 나를 가져봐 이젠 나를 가져봐…."

노래 속의 오빠는 그림에 적혀 있는 것처럼 '친오빠'나 '친척 오빠'가 아니다. '모르는 오빠'거나 그냥 '아는 오빠'인 것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사귀는 오빠'일 것이다. 나만 바라보지 않고 가끔 '그녀'를 바라보곤 해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야속한 오빠다. 나만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존재가 바로 오빠다.

'선배'가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귀는 남자가 연상일 경우(요즘에는 여성이 나이가 한참 아래인 남자와 사귀는 일도 흔하니까) 과거와 달리 요즘 여자들은 그를 대부분 '오빠'라고 부른다. 그 호칭은 또 결혼해서 한이불 덮고 살면서도 계속 사용된다. '어린 아빠'로 듬직하게 여겨서 그러는가 싶은데, 연일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곤히 잠든 '오빠'를 흔들어 깨워서 애기 젖병 심부름까지 시키는 일이 있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3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가수 조용필이 그 먼 곳까지 한걸음에 달려가서 소녀의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부를 때, 그 소녀의 눈에 조용필은 '어린 아빠'가 아니었을까. 그가 이 땅의 수많은 소녀와 여인들에게 '영원한 오빠'로 불리기 시작한 것 또한 시골 요양병원 소녀와 있었던 사연하고 어쩐지 무관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오빠 #남친 #여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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