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남편 찾아 나서는 여자, 접니다

[공모-출퇴근길의 추억] 남편과 함께 하는 퇴근길

등록 2014.06.22 21:12수정 2014.06.2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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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요?"
"응, 지금 역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있어."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담겨 있었다.

"쭉 걸어오고 있어요."
"응."

통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나는 마음이 급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잰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횡단보도를 건너 단지 옆으로 이어진 길로 접어드니 밑으로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남편을 마중하러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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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버스정류장 모습 ⓒ 오마이뉴스


곧게 뻗은 길 밑으로는 길게 이어진 하천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군데군데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눈이 띄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아 눈길을 돌려 앞만 보고 걸었다. 길 위에는 나 이외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을 지나칠 때마다 하루살이들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뿐.


지금 나는 남편을 마중하러 가고 있다. 올해 초, 갑자기 회사를 퇴직한 남편은 한동안 전전긍긍하더니 봄이 시작될 무렵부터 지인의 회사에 나가고 있다.

물론 정년퇴직이라는 게 직장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은 겪는, 당연한 일로 어느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빨리, 뜻하지 않는 이유로 그만두게 되다 보니 무척 당황했다. 그렇다고 모아둔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아이 둘이 대학생이고 보니 당장의 생활마저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퇴직하기 전에 다른 곳을 알아보고 수입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는데, 현실이라는 게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나마 알아본 일자리는 내년 여름이나 되어야 한다니 거의 일 년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마도 남편은 막막했을 것이다.

손에 쥔 것은 없어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살아온 남편,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하다못해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나에게도 꼿꼿하게 자존심을 세우곤 한다. 그뿐인가? 아이들에게는 자상하다 못해 속이 빈 것처럼 무엇이든 해주는,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을 위해 쓸 여유가 없어 언젠가부터는 남편 모습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진다.

사계절 내내 한 켤레의 구두로, 그것도 낡아서 비라도 오는 날이면 양말이 젖어 수선 집에서 창을 갈아 신고, 남방도 목 부분이 달아 해져서 세탁소에서 바꿔 달아 입고, 소매 부분은 수선조차 할 수 없어 접어서 입고, 청바지는 해진 부분을 짜깁기 해서 입고….

"내 성격도 참, 한 번 마음에 드는 옷만 죽어라고 입으니…."

아이들 앞에서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여유가 없는 게 아니라 당신의 성격 탓으로 돌리고. 그러니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 속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그러다가 찾아낸 방법이 내년 여름까지 살아가기 위해 지인을 도와주기로 했을 것이다.

"월급은 예전과 좀 달라. 그러니까 내년 여름까지는 긴장하고 살아야 할 것 같아. 될 수 있으면 맞출 수 있도록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다행이라며 나를 안심시키는 남편을 보며 자꾸 미안해졌다. 이럴 때 내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택시비 5000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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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조기퇴직에 허리띠를 졸라매게 된 남편. 택시비 5천원이 아까서워 40분을 걸어 퇴근할 때도 있다. ⓒ 연합뉴스


그렇게 불안하지만 다시 시작된 남편의 직장 생활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지인의 회사가 서울 강남에 있는데 퇴근 후, 술 한 잔 하다보면 집으로 오기 위해서는 전철이나 광역버스 막차를 타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한 시간 반 정도를 버스나 전철을 타고 안산에 도착하면 시내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택시비가 할증요금이 붙어 집까지 거의 오천 원 정도 나오는데 예전 같았으면 좀 비싸다 싶어도 그냥 타고 왔겠지만 지금은 걸어오는 것이다. 역에서 집까지 거의 40여 분 동안을 걸어서.

"택시비가 할증이 붙다 보니 너무 많이 나와. 그리고 운동도 할 겸 걷기로 했어. 좋던데?"

어느 날,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들어온 남편의 머쓱한 표정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남편의 늘어진 어깨도. 그리고 그날 밤, 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이 하던 일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해야 하고, 그런 현실이 답답해 술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비워내고, 다시 또 혼자 터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의 지친 발걸음 때문에.

다음 날부터 나는 남편이 역에 내릴 시간쯤이면 통화를 하고 마중을 간다. 혼자 걸어오는 길을 함께 걸으며 지친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런데 정작 남편은 내가 너무 많이 걷지 않도록 혼자서 한참을 걸은 후에야 나오라는 말을 한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설렘이나 기다림을 품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서로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게 되고 다독여주게 된다. 그러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도 갖게 된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 저쪽 앞에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손을 흔들었지만 저쪽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다. 그래도 나는 서운해 하지 않는다.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남편은 손을 흔드는 나를 보고 웃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환한 웃음을.
덧붙이는 글 <출퇴근길의 추억> 공모글입니다.
#출, 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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