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뒤바뀐 사회에 대한 발랄한 상상

[김성호의 독서만세 19] <이갈리아의 딸들>

등록 2014.07.24 17:36수정 2020.12.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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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책표지. ⓒ 황금가지

노르웨이의 교사이자 페미니스트인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뒤바뀐 세상을 상상하여 그려낸 이 이야기는 문학뿐만 아니라 현대 여성학의 쟁점과 역사를 담고 있는 여성학적으로도 가치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나라, 이갈리아. 화려한 월경 축제가 펼쳐지며 남성들은 자신의 성기를 흉측하다 생각하고 이를 가리기 위해 '페호'라는 가리개를 착용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과 상황을 전복시키고 그로부터 선연한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유쾌한 소설이 바로 <이갈리아의 딸들>이다.


이 사회에서 남자는 '맨움'이라 불린다. 그리고 여자는 '움'이다. 남자는 집에서 애를 보고 여자는 사회적인 일을 한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느님 어머니'를 찾는다. 남성중심적인 이 세계의 모습을 그야말로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29년을 살아오는 동안 난 스스로를 여권운동가라고 까진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성 우월적 가치관에 물들어있다고 여기지도 않고 세상을 살아왔다. 남녀의 차이를 무시하는 듯한 완강한 페미니스트들에겐 반감을 느꼈고 생물학적 차이로부터 남성의 우위를 공고히 하려는 일부 남성들의 수작에도 반감을 느꼈다.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모두가 나와 같다면 남녀불평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남녀차별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그건 내가 책을 펴든지 불과 30분 만에 무척이나 불쾌한 느낌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불쾌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 근원을 추적해보았지만, 도무지 그 근본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엔 책이 남자와 여자의 삶을 다소 비약하고 과장하여 불평등한 현실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냉정히 생각해 볼 때 사실 책의 내용은 현실, 그 자체의 투영이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그 사실이 나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 불쾌함을 인식하자 불쾌함은 사라졌고 나는 내게 내제된 불평등한 가치관을 인식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상대는 제압하기 쉬운 법이다. 어쩌면 나는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온전히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내게 내재된 불평등적인 가치관을 자극함으로서 비롯된 불쾌감 뿐 아니라 지은이의 의도 또는 지나친 피해의식에서 비롯되었을 불편한 설정들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대한 친숙하면서도 낯선 설정을 통해 일상적인 불평등을 의식할 수 있도록 하려는 작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했던 설정들은 더욱 공정한 시각 아래 더욱 온전한 이야기로 쓰여질 수 있었던 비범한 상상력을 그저 여성학적으로만 가치 있는 이야기가 되게 하는데 만족하게끔 했다.

단 한 명의 깨어있는 가해자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갈리아의 불평등한 사회는 앞으로도 오랫동안을 계속 불평등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갈리아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불평등한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 남자만의 책임이 아니듯 불평등을 해소하는 의무도 여자에게만 지워져선 안 될 것이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저울이 평평한 상태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씀 | 노옥재 옮김 | 황금가지 | 1996.7. | 1만원)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1996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노옥재 #황금가지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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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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