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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개고생', 사람들은 그것을 원했다

[리뷰] 자신만 살려고 했던 선장 vs.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선장

14.08.08 15:27최종업데이트14.08.0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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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이 이순신 역을 맡아 열연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이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으며 극장가에서 흥행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김한민 감독은 전작 <최종병기 활>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끊임없이 몰아치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액션을 잘 구사하는 감독이다. 그런 그가 한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명량해전'을 어떻게 다룰지, 그리고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이순신이라는 자칫 양날의 검일 수 있는 배역을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사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순신 이외의 캐릭터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영화의 서사전개는 단순하고, 선악의 구분은 이분법적이다.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거나 애국심을 강요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모든 걸 희생하고서라도 분명히 드러내려 하는 것은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이라는 캐릭터이며, 그의 가장 절체절명의 위기였으며 드라마틱한 전투였던 '명량해전'의 화려한 재현. 두 가지다. 영화는 이순신이 어떻게 왜군과 전투했고 결국 승리했는지를 긴박감 있게 그려낸다.

최근 성공했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광해>나 <관상>은 실제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광대(이병헌 역)나 관상쟁이(송강호 역)를 등장시켜 새로운 관점에서 캐릭터들을 그려냈다. 두 영화는 이미 관객들이 다 알고 있는 서사(역사)를 비틀어 관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명량>은 그러한 장치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물론 여러 가지 고증 문제는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의 역사에 집중하는 정공법을 택한다. 이미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이 12쳑의 배로 수백 척의 왜군 배를 침몰 시키고 승리한 바로 그 역사를 그대로 따라간다.

자신만 살려고 했던 선장 vs.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선장

▲ 소환조사 마친 세월호 선장 4월 17일 오후 전남 목포시 목포해양경찰서에서 2차 소환 조사를 마친 이준석 선장이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실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와 결말에 관객들이 감동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객들은 이순신이라는 인물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 부재한, 그리고 동시에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진정한 지도자 혹은 리더의 모습을 본다.

지난 4월 세월호 침몰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과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세월호가 침몰한 곳과 같은 바다에서 '명량해전'은 벌어졌다. 한 선장은 수백 명의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선실에 가두어둔 채 혼자 살기 위해 배를 버렸다. 다른 한 선장은 아군들마저 공포에 질려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와중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가장 최전방에서 수많은 적들과 싸웠다. 자신의 안위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탈출한 선장과,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가장 선방에서 싸운 두 선장의 모습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영화에서 압도적인 수로 우위를 점한 채 다가오는 왜군은 단순히 실재하는 일본이라기보다는 시시각각 닥쳐오는, 피할 수 없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위기의 순간으로 볼 수 있다. 그 위기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수많은 것들을 좌우한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순신은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즉 "죽으려고 하면 반드시 살 것이오,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외친다. 세월호 선장은 자신만 살려고 했고 그 결과 수많은 생명들이 죽는 끔찍한 참사를 낳았다. 이순신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결국 수많은 생명들을 구해낸다.

이순신은 "충(忠)은 임금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향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의 인본주의적 정신은 정치적 모략과 선조 임금에 의해 수많은 고초를 겪고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어도 그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싸우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전력적 열세의 상황에서 병사들은 달아나고, 장수들마저도 싸움을 포기하자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그는 선조의 어명을 어겨가면서까지도 결코 상황을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묵묵히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을 다하고, 앞장서서 싸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부하 장군들도 전투에 참가해 싸우게 되고 결국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어낸다.

다시, '리더' 이순신을 생각한다

▲ 윤일병 집단폭행 사망사건 내무반 둘러보는 국방위원들 국회 국방위원회 황진하 위원장을 비롯한 여야 의원들이 윤모 일병 집단구타 사망사건 현장조사를 위해 5일 경기도 연천 28사단 977포병대대 의무 내무반을 방문, 부대 지휘관으로부터 현장설명을 듣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최근 계속해서 터지고 있는 군 내부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 진정한 리더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또다시 목도한다. 5명이 사망한 임아무개 병장의 총기난사 사건부터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구타와 가혹행위 끝에 사망한 윤아무개 일병 사건까지, 그동안 켜켜이 쌓인 한국 사회와 한국군의 병폐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책임지고 다시 정리하여 끌고 나갈 리더는 요원한 것인가?

책임을 진다며 물러나기에만 급급한 리더들을 보며 우리는 다시금 이순신이라는 리더를 생각하게 된다. 이순신은 열두 척의 배만 남게 된(심지어 자신의 책임도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과연 진정한 리더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육군총장이 책임졌으면 책임은 다 진 것"라는 한 정치가의 말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진정으로 책임지는 리더란 무엇인가? 단순히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것이 책임을 진 것인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책임지는 것이라는 생각, 그 이면에는 자리를 하나의 보상이나 권력으로 여기는 심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작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가, 물러나면서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와 닿지가 않는다. 심지어 병사들을 관리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는 하사마저도 윤 일병의 가혹행위에 가담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상황에서, 과연 책임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건만 터지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대단한 책임인 양 여기는 사회에서,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만을 보전하기 위해 사건을 덮으며 쉬쉬하고 넘어가려고만 한다. 그런 식으로 덮이고 무마되어온 수많은 병폐들은 곪을 대로 곪아 필연적으로 여기저기서 터지게 된다. 전문가들은 세월호 사건 역시 우연한 사건이 아닌 예견된 참사였으며, 언젠가는 일어날 필연적 사건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각종 부조리와 병폐로 곪아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들이 여기저기 존재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병사는 전투가 끝난 후 "나중에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한 걸 알까 모르겄네"라고 말한다. 다소 진부하고 감정적으로 들리는 이 대사가 울림을 갖는 것은 그 '개고생'이 결국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절실한 책임감과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사는 오늘날 진정한 책임감과 용기가 부재한 한국 사회에 사는 후손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명량 이순신 리더 세월호 윤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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