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와 겸상하라"는 할머니의 숨은 뜻

'사람이 희망이다' 대전 인문학 포럼... 손택수 시인 강연회 열려

등록 2014.09.24 14:26수정 2014.09.2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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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후 2시 충남대 문원강당에서는 제107회 대전 인문학 포럼이 개최되었다. 인문학 포럼 운영위원장인 김세정 교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희망이라는 꽃을 피우는 것도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망입니다"라며 기획 취지를 밝혔다. 행사의 진행은 이형권 교수가 맡았다.

단상으로 올라온 손택수 시인은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를 낭독했다. 유일하게 암송할 수 있는 시라는 것을 밝힌 뒤 시인은 "말이 울리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고 음악이 울리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 침묵과 공간은 가을 하늘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을하늘과 함께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라며 강연을 시작했다. 다음은 손택수 시인의 강연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농경문화 속에는 휴며니즘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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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제107회 대전 인문학 포럼에서 '은유와 사랑'을 주제로 손택수 시인이 강연을 하고 있다. ⓒ 신미정


옛날에는 공동체나 향약 등이 국가와 개인 사이의 완충 장치들이었습니다. 현재는 그런 것들이 깨져서 그 스트레스가 개인에게 가면서 자살행진이 이루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

어렸을 때 제 할머니는 거지가 찾아오면 밥을 먹였습니다. 외가댁은 쌀 한 톨이 귀한 집안이었어요. 그런데 어린 마음에 외할머니가 무슨 여유가 있다고 거지에게 밥을 주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거지도 이해가 좀 안 되었어요. 밥을 허겁지겁 먹지 않고 천천히 먹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거지가 집으로 들어와 있던 겁니다. 할머니께서 제 버릇을 고치려 하셨는지 오늘은 거지와 겸상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숟가락을 내던져 버렸죠. 그 날 하루 종일 할머니가 제 밥을 굶겼습니다. 그리고 벌을 세웠습니다.

저는 화도 나고 속도 상했습니다. 또 이모들은 왔다 갔다 하면서 저를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그 눈빛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이 부끄러움을 평생 동안 잊지 말고 살라고 밥을 굶겼던 것은 아닌지, 사람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그래서 벌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농경문화에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대하는 것처럼 자연을 대할 때도 그런 태도를 가졌습니다.

<장자> '천지편'에 보면 자공이 산책을 하다가 한 농부를 봅니다. 그런데 농부가 우물에서 물을 퍼서 텃밭에 가서 물을 주는데 연못과 텃밭 사이의 거리가 먼 겁니다. 자공의 눈에는 사서 고생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공은 농부에게 용두레라는 기계가 있다. 연못하고 텃밭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데에 그걸 이용하면 힘들지 않고 좋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하죠.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용두레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 기계를 활용하면 배추와 채소들의 마음, 타들어가는 고통, 몸을 활용해서 가는 나의 간절한 마음을 잃을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알면서도 쓰지 않습니다."

농경문화 속에는 그런 지혜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휴머니즘이 바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을 버리는 것도 비슷합니다. 겨울에 무쇠 솥에 물을 끓인 뒤 세면을 한 다음 그 물을 그대로 버리는 적이 없다는 것이죠. 식혀서 버립니다. 겨울잠 자는 벌레들이 그 물에 죽으면 안 되니까. 미물들과 같은 생명체로서 사람도 연대하고 있는 거죠. 그것이 가르침이나 생태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오랜 전통 속에서 핏줄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젠가 제가 마당에 낫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할머니께서 나오시더니 정말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시며 "아이구! 저 놈이 할머니 등에다 낫을 꼽네"라고 하시는 거예요.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니까 내 몸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 사이에는 실핏줄이 이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공간을 함부로 하면 내 몸도 아픈 것이죠. 공원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앉으면 방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죠. 그 공간은 내가 흙이 되어서 돌아갈 공간입니다. 그 공간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내 몸을 해치는 것이죠.

언어도 그랬던 것 같아요. 말에 주술성이 있었죠. 제게는 지게 작대기가 연필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농토가 노트였어요. 그 농토를 노트 삼아 기역 니은 디귿을 씁니다. 눈으로만 익힌 게 아니라 온몸으로 우주가 떠나가라고 소리를 치는 거죠. 그러면 모국어가 제 몸을 관통합니다. 모국어가 제 심장 박동을 실어서 우주로 울려퍼집니다. 그래서 언어와 사람인 저와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모국어였던 거죠. 그런 연결고리들 순간적인 흐름들 속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린 근대화 프로젝트를 작동시키면서 그런 것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오디세우스를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

오디세우스아시죠?

그가 전쟁이 나서 왕국으로 귀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 과정에서 세이렌의 섬을 통과해야 하는데 세이렌은 반은 여자고 반은 물고기인 존재입니다. 신화 속의 대상이죠. 무의식, 판타지 속에 있는 인물입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면 모두가 거기에 홀려서 다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가 궁금했던 겁니다. 그래서 꾀를 씁니다. 돛대에 몸을 꽁꽁 묶고 노래를 즐기면서 세이렌 섬을 통과하게 되죠. 그래서 이성의 힘으로 꾀를 써서 오디세우스는 세이렌 섬을 통과하고 세이렌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해버립니다.

그래서 서양 철학자들은 오디세우스를 근대 시민사회의 전형으로 봅니다. 이성의 힘을 빌린 시민들이 자연을 정복하고 미분화된 자연을 정복하면서 문명세계를 만들었다. 우리는 오디세우스의 후손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문학하는 사람들의 해석을 달랐습니다. 카프카의 세이렌의 침묵이라는 단편이 있어요. 거기서 카프카는 대결이 원래 없었다. 자기 기만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다 해(海) 자에는 어미 모자가 들어 있어요.

즉 세이렌은 자신을 배신하려는 아들 앞에서 노래를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결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기만을 통해서 섬을 통과한 오디세우스의 문명은 결코 사랑이 아닌 자기 기만의 문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불행해졌습니다. 그래서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세이렌을 불러와야 한다는 것이죠.

요컨대 여성성 억압 받던 소수자들을 귀환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은 여성성, 무의식, 판타지 등 독자를 그 안에 가두기보다 풀어헤치는 그런 작품들이 각광을 받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문법이 우리에게 강요한 경쟁. 이 경쟁이 가장 상징적으로 들어나는 것이 올림픽입니다. 올림픽 표어 기억나시죠. 더 높게 더 빠르게 더 멀리. 고개 빳빳이 들고 가면 저 멀리 보이는 풀꽃들이 보일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논에 피는 매화마름이라는 풀꽃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려면 무릎을 꺾어야 합니다. 논의 수위하고 내 가슴의 수위를 일치시켜야 내 시야에 매화마름이 들어옵니다.

'더, 더, 더'의 세계는 낙오병을 양산합니다. 어렸을 때 저는 기차가 지나가면 마치 갈대인 것처럼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도 손을 흔들어주었죠.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이심전심이 저 여행자와 나를 이어주었던 거죠.

그런데 십수 년 사이에 아름다운 풍경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풍경 하나가 사라지면 영혼 하나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빨리, 아무리 멀리 간들 자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행이겠습니까. 관광이죠.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지는 자기 자신입니다. 저는 덜한 존재로서 낙오의 측면들을 옹호하고 싶습니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 관찰과 해찰

어느 날 저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 하는가"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게 뭐냐"라고요. 그런데 좋아하는 게 하나가 있더군요. 제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고독이었습니다. 혼자 있는 게 좋았어요. 지금도 성처럼 혼자 있는 걸 좋아합니다. 세상의 모든 별은 혼자서 반짝인다고 봅니다. 별은 끌어안으면 폭발합니다.

[관찰]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 습관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바라보는 걸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는 풀잎을 한 시간정도 바라봤습니다. 그러다 지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풀잎은 어제 봤던 풀잎, 내일 보는 풀잎, 아까 봤던 풀잎하고 달랐습니다. 한 대상이 어마어마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놀라운 우주를 저에게 탄생시켜줬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석류나무를 3년 동안 지켜봤습니다. 언젠가 동창회에 나가서 그 석류나무 가 기억나냐고 물어보니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석류나무가 어떻게 꽃이 지고 꽃받침이 어떻게 열매로 둥글어가고 이파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연둣빛이 진초록으로 바뀌고 어떻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 석류나무의 비밀을 알게 된 겁니다. 석류나무와 나 사이에 비밀이 탄생합니다. 그건 우주적 탄생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 아닙니까. 대형 포털 속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죠. 그런데 석류나무와 나 사이에 있었던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죠. 저는 그걸 받아쓰는 겁니다.
  
[해찰] 두 번째 습관은 떠도는 것이었습니다. 남도말로 해찰입니다. 이게 내 삶을 결정지은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습관은 저에게 독서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떠도는 것은 여행으로 연결됩니다. 저는 여행하면서 책 읽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싶은 겁니다. 그것이 저를 항상 그리움 속에 있게 합니다. 그리움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이런 관찰 속에서 사물들은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나타납니다. 일종의 성깔있는 캐릭터로서 나타납니다. 또 고유명사의 세계는 신화적입니다. 강의 신, 바다의 신 등 이 수많은 신들은 그 사물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사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어줍니다. 시는 H2O(물)라는 추상 개념 속에서 그 사물의 개성들을 만들어줍니다. 그들의 개성을 살려 주는 거죠. 그래서 시는 다양성, 다채로움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은유는 사랑의 수사학이면서 혁명의 수사학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할 때, 은유는 호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도 같이 있습니다. 고통도 같이 있습니다. 균열, 갈등, 슬픔이 같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를 꿈꾸는 거죠.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은유입니다.

그 은유 안에는 새로운 동일성속으로 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통의 현실을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할 줄도 알고, 반성하고, 그 반성을 토대로 해서 새로운 세상을 꿈 꿀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유는 사랑의 수사학이면서 혁명의 수사학이기도 합니다.

늘 새로움을 꿈 꿀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은유는 절벽을 넘어서기보다는 사실 절벽을 발견하는 기술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절벽 앞에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직계 제자인 사람이 나치 수용소에 끌려갑니다. 그 때 가족들도 다 죽은 이 사람에게는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자기를 지키는 희망이 하나 있었어요. 그 희망이 뭐였냐면 주머니 속에 몰래 숨겨온 논문이었어요. 수많은 임상 체험을 통해 논문을 썼던 거예요. 이거 하나만 남기고 가야 한다, 이 희망이 하나 남은 거예요.

그런데 논문을 빼앗겨 버립니다. 나치들이 논문을 불태워 버립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이 불타는 그 순간 털썩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는 그 때 이미 죽은 거죠. 이 사람은 죽을 날만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죽을 순서가 다가옵니다. 앞 사람이 남긴 수용자의 옷을 입는 순간 그 주머니 속에서 쪽지가 나옵니다.

그건 바로 유태인들의 시였습니다. 앞의 수용자는 가스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그 시를 중얼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발견한 순간 이 사람은 다시 마음을 먹게 된 거죠. 맞다! 내가 논문을 잃어버렸지만 수많은 임상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여기 안에 있는 수용자들을 돌봐야겠구나라고 마음을 바꿉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산송장으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수용자들을 돌보면서 그 기록을 뒷사람들에게 남겨줍니다.

은유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한다

제가 가장 힘든 시절, 연약한 시인이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았겠죠. 외할머니가 그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 힘든 시절에 부석사 무량수전을 갔어요. 일주문을 봤는데 싸리기둥 인 거예요. 그 싸리기둥을 발견한 순간 놀랐습니다. 그때 갑자기 유년시절에 부르던 노래구절이 생각난 겁니다. "쏭알 쏭알 싸리잎에 은구슬~" 이런 동요를 익히던 유년으로 돌아간 거예요.

어린 소년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겁니다. 제 안에서요. 그래서 나를 위로해 주는 겁니다. 괜찮다, 괜찮다하고요.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아이와의 만남을 통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오래된 미래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 편에 있고 싶은 사람입니다.

"내게 있어서 실패는 축제입니다"

1시간 30분 정도 지속된 시인의 솔직담백한 강연이 끝난 뒤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 등단을 하기까지 오래 걸리셨는데 그 기간 동안 꿈을 찾아가는 시간이 힘들지 않으셨나요?
"글을 잘 쓰는 작가는 없는 겄 같아요. 제 주위의 대가들부터 시작해서 시인들까지 그 중에 글 잘 쓰는 사람들 한 명도 없습니다. 천재라는 건 자신의 재주 없음을 한탄하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죠. 4~5년 동안 수십 번 투고하면서는 심사위원을 엄청 원망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제 작품을 더 많이 쓰고 더 새롭게 가다듬게 된 거예요. 그분들 때문에 더 좋은 작품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앤 롤링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자신이 가진 것이 실패 밖에 없다고 했답니다. 실패는 곁가지를 쳐서 자신의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키게 합니다. 실패의 장점은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갱생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쌓은 성을 무너뜨립니다. 예술가들은 안정만이 아니라 불안을 희구해요.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소년들 같아요. 애써 쌓은 모래성을 바다가 와서 무너뜨리려도 엄청 즐거워하잖아요. 이런 소년들의 마음, 유희적인 마음이죠. 업적을 남기고 역사에 남기고 이런 마음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즐기고 순간순간 우주와 만날 줄 아는 사람이죠.

저의 대표작은 미래에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거죠. 그래서 그 과정에 있는 실패는 축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대중이 좋아하는 시와 본인이 애착을 갖는 시는 다를 텐데 그 시를 낭송해 주시고 그 이유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흰둥이생각'이라는 시입니다. 7~8살 때 제가 괴롭히던 강아지가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유년의 최초의 트라우마였습니다. 그런데 한 부끄러움이 더 큰 상처를 만나게 합니다. 제 사춘기 시절의 부모님과의 불화, 나아가 국가를요.

강아지 한 마리를 통해서 제 가족사를 만나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모습을 만나게 된 거죠. 그리고 국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상처는 자기의 스승입니다. 자기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 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상처에 귀를 기울여줍니다. 그럼 지금 그 트라우마가 극복되었느냐. 아닙니다. 기표와 기의는 계속 불일치되고 있습니다. 그 불일치가 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것입니다."

대전인문학포럼 2014년 2학기
- 장소 :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문원강당
- 시간 : 오후 2~4시
- 요일 : 격주 화요일

다음 강연
- 10월 7일(108회)- 김경재(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진리, 종교, 생명의 체상용 관계 - 함석헌의 종교시를 중심으로
- 10월 21일(109회)- 허수열(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지도로 보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오류
- 11월 4일(110회)-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과 교수) 유교, 자기 발견의 기술
- 11월 18일(111회)-이원복(덕성여대 시각디자인학과 석좌교수) 먼 나라 이웃나라

#사람이희망이다 #대전인문학포럼 #손택수 #은유와사랑 #충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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