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기 타고 입장한 신랑·신부... 조작이 아니었다

[가장 나다운 결혼식 ①] 염동수·기낙경 부부

등록 2014.09.30 08:32수정 2015.02.0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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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편일률적 '스드메', 20분 예식, 뿌려 놓은 축의금 걷기, 눈도장 찍기 바쁜 예식 등 거창하고 틀에 박힌 결혼식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특별한 결혼식을 치른 열 쌍의 커플 이야기. 결혼식 주인공뿐만 아니라, 참석한 모든 이들의 기억에 남았던 예식을 소개해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겐 격려를, 돈 때문에 결혼을 포기한 이들에겐 기대를 안겨주려고 한다.... 기자말


충주에선 충주호, 제천에선 청풍호라 부르는 호수의 경계선에 위치한 길쭉한 마을, 공이리엔 1리, 2리 모두 합쳐 85가구가 산다. 집을 지어놓고 주말에만 다녀가는 도시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대체로 수십 년을 함께 지낸 이들이라 마을 전체가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집집마다의 이야기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곳엔 대학원 졸업 후 번듯한 직장까지 다니다 때려치고 고향에서 브로콜리 농사를 짓고 있는 염동수(40)씨와 <에비뉴엘> 패션지 피처 에디터로 바쁜 생활을 하던 완벽 도시여자(였던) 기낙경(38)씨가 살고 있다. 공이리에 15년 만에 나타난 유일무이한 아기이자 공이마을에서 태어나 이제 돌 지난 지 세 달 된 아들 준하와 함께.

3년 전 어린이날에 열렸던 그와 그녀의 결혼식이 매우 특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0일 무작정 집을 찾아갔다. 서울에서 그와 그녀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다행히 옆 동네로 가는 완행버스가 하나 있었고, 그녀가 차를 끌고 옆 마을에 도착한 나를 픽업하러 왔다. 인터뷰 시간보다 그와 그녀를 찾아가는 시간이 더 길었던 날.

결혼을 앞두고, 남자네 집이 불탔다

'집 있는 농부에게 시집가는 것'이 꿈이었던 낙경씨는 교수님의 소개로 동수씨를 만났다. 브로콜리 농사를 짓고,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서 살고 있던 그는 그녀의 조건을 백 퍼센트 만족시킨 완벽한 남자였다.


그녀는 "사실 나 조건보고 결혼했어요"라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에게 깊이 끌렸고, 금세 사랑했고, 1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동수씨의 집에 크게 불이 나 '집 있는 농부'는 '집 없는 농부'가 되었지만, 그런 건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가 결혼을 미루거나 없던 일로 하자 말할까봐 전전긍긍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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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예식 중 면사무소에서 제공해준 의자와 천막, 마을 들판에 피어난 꽃들로 장식된 식장. 소주병에 꽃들이 아름답게 꽂혀 있다. 예식 단상은 트럭 트레일러. 낙경씨의 아이디어. ⓒ 염동수, 기낙경


바쁘게 정신없이 끝나는 예식장에서의 결혼식이 싫었던 둘은, '모두가 기억할 만한 결혼식'을 준비했다. 동수씨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고, 낙경씨는 가족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의견을 우선으로 배려해주어 예물 예단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공이리로 내려갈 때 고속버스 터미널 옆 가게에서 맞춘 반지가 그들 예물의 전부였다.

장소는 신랑이 나고 자랐고,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집이 있는(원래 살려고 했던 집은 불 타 없어졌고, 지금은 근처 빈 집에 전세로 들어와 살고 있다) 공이마을의 초등학교 운동장. 면사무소에서 제공해준 천막과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진행하기로 했다. 나머지 예식에 필요한 일은 마을 사람들이 분담하여 도와주기로 했다.  

"결혼식 사흘 전부터 마을 분들이 소머리국을 끓였어요. 음식은 소머리국밥에 반찬 몇 가지가 다였지만, 그때 밥이 정말 맛있었다고 지금도 얘기하죠. 그리고 축가는 동수씨가 활동하고 있는 충주 시내 직장인 밴드 형님들이 해주셨고요.

바쁘게 준비하면서도 과연 잘 치를 수 있을까 의심이 되었는데, 당일 아침에 정말 깜짝 놀랐죠. 우리 부부의 행진길이 너무 예쁘게 꾸며져 있는 거예요. 운동장에 트레일러 단상 하나라서 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동네 분들과 친구들이 마을에 있는 꽃이란 꽃을 다 모아서 장식을 해놓은 거예요. 소주병에 꽂혀 있는 꽃들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경운기 타고 입장... "내가 진짜 주인공 같았다"

두 부부는 마을 초입에서부터 학교 입구까지 경운기를 타고 들어왔다. 결혼 전에 발품 팔아 산 소박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꽃가게에서 만든 부케를 들고, 생화로 만든 머리띠를 썼다. 청사초롱을 든 조카들을 앞세워, 고심해서 만든 트레일러 단상에 올라가 결혼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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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신부 입장 신랑이 경운기를 몰고 식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 염동수 기낙경


"마을에서부터 경운기를 타고 학교로 들어왔는데, 학교에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앉아 있던 하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경운기를 에워싸고 휴대폰으로, 사진기로 저를 찍기 시작했어요. 그때 뭐라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느껴졌어요. 진짜 제가 주인공이란 느낌이 들었거든요."

두 주인공뿐 아니라 하객들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녀가 몸담았던 곳이 패션 잡지사여서 하객들의 패션은 주로 킬힐에 호피 무늬. 누런 모래가 날리는 초등학교 운동장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었지만, 또 "선배, 여긴 ATM기 없어요? 축의금 안 뽑아왔는데"하며 허허벌판에서 현금 지급기를 찾는 난감한 상황도 연출되었지만, 그런 해프닝마저 즐거웠다. 그들의 머릿속엔 다른 결혼식보다 '염동수 기낙경의 결혼식'이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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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3년 앞으로 더 많은 날을, 싸우고 의지하고 안아주고 응원하며 살아갈 부부 ⓒ 박진희


서로를 하나로 묶어준 교수님이 선물한 '호텔 1박 숙박권'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한 그들은 시간 될 때마다 신혼여행처럼 며칠씩 여행하기로 약속했단다. 결혼한 지 1년이 되었을 땐 제주를 다녀왔다.

어느덧 그들이 한 집에 산 지도 3년이 되었다. 그 사이 둘에게는 아이가 하나 생겼고, 아이는 그들에게도 늦둥이이지만, 공이리에 15년 만에 태어난 아이라 마을 전체의 기쁨이 되고 있다.

농사를 지은 지 5년 차 동수씨에게 두려움과 버거움이 없다고 하면 사실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충분히 '다르게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3년 전 어린이날 결혼식처럼. 그래서 그들은 결혼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연애할 때와는 또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쁘다고 말한다. 내친 김에 그들이 앞으로 만들고 있는 꿈이나 가치관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결혼 전에 불 타 사라진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더라도 천천히) 집을 다시 짓는 거예요. 이건 부부가 함께 이뤄야 할 꿈이구요. 각자가 꿈꾸고 있는 일도 있어요. 낙경씨는 글을 쓰는 것. 저는 음악을 하는 것이죠. 서로 그렇게 평생 함께 이루고 격려하고 응원하며 살아가려구요."

결혼식 때 전문사진 기사 분을 두는 건 깜박해서 식 사진이 몇 장 없다며 보여준 사진 속엔 경운기를 몰고 들어오는 두 부부의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경운기가 그렇게 로맨틱한 차인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http://askdream.com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특별한 결혼식 #니콜키드박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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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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