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잔치' 도전했다가... 기절할 뻔했습니다

[공모-잔치, 어디까지 해봤나요] 친정 엄마 큰 손 닮은 나의 도전기

등록 2014.10.13 21:53수정 2014.10.13 21:53
2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수감사 파티를 위해 준비해 놓은 그릇들이다. ⓒ 박선경


잔치가 일상인 미국


스물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혈혈단신 시집온 내겐 사실 '잔치'라는 단어보다는 '파티'라는 말이 훨씬 익숙하다. 그럼에도 이따금 TV에 비친, 고향 닮은 시골 마을의 널따란 마당에서 열리는 떠들썩하고 흥겨운 분위기의 잔치를 볼 때면 불현듯 떠나온 고국 생각에 가슴 울렁증이 도질 때가 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나오면서 이민 가방과 함께 멍에처럼 지고 온 향수병은 세월이 흘러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나 보다. 생일 파티, 디너 파티, 칵테일 파티, 댄스 파티, 기금 모금 파티, 티 파티, 코스튬(복장) 파티, 크리스마스 파티, 추수 감사절 파티, 슈퍼볼 파티, 집들이 파티, 졸업 파티, 결혼 파티, 신랑 잡기 파티, 신부 친구 파티 등등... 아무 데나 파티만 붙이면 모여서 먹고,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미국에선 정말 며칠 걸러 파티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사 전 손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 초간단 요리들 ⓒ 박선경


식사 전 손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 초간단 요리들 ⓒ 박선경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 출산 등 몇몇 행사를 제외하면 미국의 파티는 그저 참석 인원 정도에 따라 주인이 음식을 시켜서 대접하기도 하고, 손님이 한 접시씩 가져와 나누기도 하면서 수다 떨고 시간을 보내는 게 태반이다. 20대 젊은이들이 피자 몇 판 시키고, 맥주를 사서 먹고 마시면서 춤을 추는 것도 파티다.

물론 돈 많은 사람들이 수백만 원 호가하는 비싼 옷을 걸치고 고급 와인을 마시는 파티도 있다. 하지만, 서민이든 부유층이든 간에 누구나 파티라는 이름 아래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묻고 흥에 겨워 함께 즐기는 것은 매한가지다.

어릴 적 손 큰 친정 엄마 덕에 늘 붐볐던 집을 생각하면 그것 또한 날마다 파티의 연속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친정 엄마를 많이 닮았다. 이민 와서 아이들을 낳고 젖먹이 때부터 쉬지 않고 직장을 다녀야 했던 형편이었기에 제대로 요리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음식을 만드는 데엔 재주가 없었다. 그래도 "음식은 자고로 정성이다"고 말씀하시던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탓에 맛은 없어도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상을 차리기 위해 노력한다.


엄마 닮아 손 큰 나... 일 벌이다

십여 년째 내가 아끼며 쓰는 소품인형들. ⓒ 박선경


몇 년간 추수감사절엔 칠면조를 굽고, 이런저런 사이드 요리를 마련해 식구를 비롯해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 몇 년간의 연습에 힘을 얻은 나는 지난 해 11월 지인 식구를 자그마치 10팀이나 초청했다. 그야말로 대 추수감사절 파티를 연 것이다. 회사 직원, 동생 네 식구, 식구 없는 몇몇 싱글족을 포함해 어른 수만 20명에 달했고, 아이들은 젖먹이부터 스무 살까지 다양했다.

이틀 전부터 팔 걷어붙이고 준비를 시작했다. 추수감사절 음식은 사실 제대로 준비하려면 며칠 전부터 칠면조 등 음식 재료를 사는 것부터 시작해 시간이 보통 걸리는 게 아니다. 몇 가지 주문해서 칠면조만 집에서 구워 내놔도 하나 손색 없었을 상차림이었건만,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불끈했는지 모든 요리를 장보기부터 내 손으로 하겠다는 욕심을 부렸다.

이틀 내내 음식 준비에 몰두해 온몸이 초토화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할 때 즈음엔 오븐에서 맛있는 칠면조 구이 냄새를 온 집안에 풍길 수 있었다.

이민 온 지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현관 안에 벗어놓은 신발이 눈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손님들은 와인을 가져오기도 했고, 예쁘고 앙증맞은 선물을 가져오기도 했다.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작년 추수감사절에 준비한 칠면조 요리. ⓒ 박선경


"세상에, 어쩜 이 음식을 죄다 혼자 한 거예요?"
"와, 이건 뭐 전통 미국식 추수감사절 차림상이네!" 

칭찬에 으쓱해진 나는 손님들이 건네주는 와인 잔을 받아 몇 모금씩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실 종종걸음을 한 탓에 발바닥이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였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음식을 날랐다. 시간은 점점 흘러 자정이 다 되어 갔지만, 술자리가 즐거워지고 웃음이 끊이질 않다 보니 누구 하나 집으로 가겠다 일어서는 손님들이 없었다. 웬만한 시중이 끝날 즈음 나도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며 홀짝홀짝 와인을 들이켰다.

사실 나는 웬만해선 술에 취하지 않는다. 술 유전자가 우수한 탓일 수도 있고, 젊은 나이부터 오랫동안 내공을 충분히 쌓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술자리에서도 나는 대부분 살아남아 취해 비틀거리는 동료를 택시에 태우는 등 뒷수습을 맡을 정도로 술이 센 편이다.

분위기에 취하고 와인에 취하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흩어지며 한없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평화로움을 깨고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 승규 엄마... 좀 일어나봐.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아이 참... 졸리면 방에 가서 눕지 그래?"
"... 뭐야?? 나 왜 여기 있어요?"
"아까 화장실 간다더니 안 보여서 와 봤는데. 여기서 잠이 들었구만... 쯧쯧. 웬일이니 도대체... 그 잘난 실력은 어디 간 거야?"

와인맛을 음미하기엔 잔에 입술이 닿는 부분이 얇을수록 좋다나... ⓒ 박선경


그날 그 해프닝 후에도, 손님을 불러 모아 음식을 차려내고, 함께 기분 좋게 한 잔씩 한다. 내 나름대로 기획한 멋진 파티를 여전히 즐긴다. 희망과는 반대로 내 손 맛은 제자리 걸음 수준이지만, 그들과 만나면 아직도 그날 나의 번개 취침과 즐거웠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배꼽 잡으며 또 한 번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이곳은 후덥하기가 비할 데 없이 끔찍했던 여름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낮엔 여전히 푹푹 찌는 날씨의 연속이다.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옷깃을 스쳐 가는 바람이 심상치 않은 걸 보면, 가는 계절 잡지 못하고 오는 계절은 막지 못하는 게 자연의 이치인 듯싶다.

그리고 이렇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올해 추수감사절에 또 한 번 있는 대로 지인을 불러 이벤트 파티를 제대로 벌여 볼까 하는 용맹심이 솟구친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취하지 않는 비방을 찾아야 한다. 아니, 혹시 부지불식 중에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데도 그것은 오히려 파티를 충실히 마무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기절했던 아줌마의 '전사'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잔치 어디까지 해봤나요' 공모글입니다.
#추수감사절 #잔치 #파티 #와인 #에피타이저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늦깎이 세상구경과 집밥사이에서 아슬아슬 작두탑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