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세월 보낸 부모님의 팔순잔치, 감개무량하다

[공모-잔치, 어디까지 해봤나요] 통일하면, 다시 한번 큰 잔치를

등록 2014.10.27 14:36수정 2014.10.2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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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칠순 때 모습 ⓒ 윤영전


과거나 현재에도 잔치는 늘 있었다. 출생해서 49일째 되는 날에는 시루떡을 이웃과 마을에 돌린다. 금줄을 쳐서 출생을 알리고 복을 꾀하기도 했다. 그리고 매년마다 생일상을 차려 기리며 건강하게 살아주기를 빈다. 이어지는 잔치는 출생에 이어 제2의 출발이라는 결혼 잔치다. 한세대 전까지는 회갑 잔치가 주 잔치였지만, 요즘은 고희와 팔순, 그리고 드물게 구순 잔치에 최장수 백수 잔치도 있다.


내 칠순을 넘게 살아오면서 눈으로 바라본 잔치는 돌 잔치와 새 집을 지어 성주를 알리는 떡 나누기 잔치였다. 어쩌다가 좀 나은 집에서는 회갑 상을 차려, 소리꾼들이 장구와 피리에 맞추어 판소리로 주인공의 장수를 축하하고 만수무강을 비는 잔치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시국을 잘못 만나 할머니와 부모님의 잔치가 이뤄지지 못했었다. 그러나 내가 우리 부모님을 모시면서 미루었던 잔치를 실현하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었다.

효골에서 부러움 받던 집안, 좌익으로 몰리다

세상에 나의 부모님처럼 참적의 세상을 살아 오신 분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버지는 1909년 10월29일 빛고을 효골에서 생가 할아버지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숙모는 17살에 출가해 단 3개월 만에 숙부가 급환으로 돌아가시자 청상과부가 되어 손이 없었다. 젊은 과부로 양반 가문에 27살이 되어도 재가하지 않고 살았다. 이에 집안 대소가에서는 10살의 아버지를 숙모에게 양자로 입적하도록 정하였다.

아버지는 양모의 극진한 배려로 서당에서 한학을 근학했다. 15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군내 백일장에서 '국화'라는 제목의 한시로 장원하여 양모를 즐겁게 했다. 어느덧 18살이 된 아버지가 17살의 풍산 홍씨가의 부잣집 맏딸에게 중매로 장가를 들었다. 1년 후 맏아들이 태어나고 4년 후 둘째 아들, 그리고 딸 둘에 이어 나는 다섯 번째,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 할머니는 청상과부에서 이제는 여덟 식구의 당당한 어른이 되었다.

할머니는 손주들이 태어날 때 조산원처럼 손수 척척 받아내었다. 장손자는 중학을 졸업하고 군청에 취직을 하여 봉급을 받으니 집안생활이 윤택해지고, 고부간이 길쌈과 바느질을 해서 모은 돈으로 생가 큰댁처럼 넓은 땅에 성주도 하고 재산을 늘려갔다. 그후 셋이나 남매들이 늘어나 여덟 남매의 대가족이 되어 번창했다. 할머니는 비록 당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셨지만 친자식처럼 보람되게 길렀다.


우리집은 효골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때에는 자식 농사에서도 특히 아들 농사를 얼마나 질 지었는가를 기준으로 그 집안의 장래를 말했었다. 특히 맏형의 나이가 아버지 나이에 이르렀을 때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남북은 해방정국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 때 맏형은 이미 동학농민혁명에 부응한 평등사상으로 머슴들도 교화하면서, 건준에 가입해 분단이 아닌 통일조국을 꿈꾸었다.

그간 일들이 잘 풀려가나 했는데 맏형은 건준 해체와 함께 좌익으로 몰려 면사무소에도 출근하지 못하고 피해 다녔다. 당시 형은 광주군내 4개 면의 조직책으로, 요 시찰 인물이었다. 정부 수립 후에는 여순사건의 지하조직책으로 몰리고 보도연맹으로 몰렸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아들에게 자수를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형은 자수하면 바로 조직책으로 죽음에 다가갈지도 모른다면서 22살까지 피해다니며 지냈다.

내 나이 9살 때 맏형은 그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2개월이나 당하면서 끝내 조직을 불지 않았다. 분단조국의 통일을 위한 운동이었다고 했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똑똑하고 잘생긴 형이 장가도 들어 증손자와 손자를 품에 안겨주기를 간절하게 바랐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형은 쫓기는 몸으로 좌익세력으로 몰려 불투명한 운명을 예감했다. 그러기에 처자식은 부담이라면서 좋은 세상이 올 때에 장가 들어 손자를 안겨주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여순사건 다음 해 2월에 경찰에 붙잡혀 갖은 일제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조직을 불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직원으로 그들이 파악한 사람과의 대질신문을 위해 포승줄에 묶여 마을마다 현장 대질신문을 할 판이었다. 헌데 성과가 없자 서창 앞산에서 3발의 총탄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은 세상만을 한탄하면서 다음에 올 폭풍을 두려워했다.

드디어 팔순 잔치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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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팔순 때 모습 ⓒ 윤영전


나에게도 우상이었던 맏형을 잃고 6·25 전쟁에서 아버지는 인민위원장, 둘째 형은 의용군으로 3개월 지냈다. 인민군 철수로 아버지와 형은 부역자로 자수했다. 형은 다시 국군에 입대하여 중상을 입고 아버지는 무고죄로 감옥살이를 했다.

둘째 형은 상이제대를 한 후 정치에 뛰어들어 세 번의 출마를 하면서 집안은 어렵게 되었다. 비록 3남이지만 나는 1965년 월남에 파견되어 귀국해 청년 가장으로 부모님을 서울로 모셨다. 그 후 결혼하여 손자가 잉태되었는데 출산일이 아버님 생신 날로 예고되었다.

그동안 8남매 자식들 때문에 고생하신 부모님에 대한 보답은 잘 모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환갑 잔치를 해드리는 것이었다. 결국 집안 식구들과 간단한 생일상으로 그날을 보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후 칠순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회갑을 못하신 몫까지 꼭 해드리려고 했지만, 당시 내가 사정기관에 근무했던 관계로 집안의 식구들끼리만 간단한 칠순 생신을 차려드렸다.

그 후 아버지는 이곳저곳 회갑 칠순 잔치에 초청을 받고 참석하신 후 소감을 피력하셨다. "오늘 초청에 간 잔치는 참으로 부러웠다"고 몇 번을 말씀하시어, 나는 넌지시 말씀드렸다. "아버지! 죄송해요. 돌아오는 팔순 때는 꼭 성대하게 잔치를 하겠습니다. 건강하게 사시고 그동안 신세지신 분들 다 초청해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기뻐하신 것 같았다. 드디어 팔순이 돌아왔다.

1개월 전에 신흥사 주변의 회갑 등 잔치 전문집을 찾아 예약하고 준비 사항도 챙겼다. 친지 분들과 내 친한 분들만 선별한 200여 분에게 정식으로 초청장을 발송했다. 이제야 말로 부모님께 대외적으로 효도를 할 수 있었다. 흡족한 팔순 잔치를 차질 없이 하려고 만전을 다했었다. 회갑도 고희도 건너뛴 잔치이기에 어쩌면 부모님께 마지막 잔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1989년 10월 29일,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식장 앞에서 부모님께 꽃을 달아드리고 손님들을 일일이 영접하여 식장에 안내하였다. 잘 차린 팔순 상에 부모님을 건강하신 모습으로 모시니 감개무량했다.

부친은 30년 전 무고죄로 고문을 받으시고 2달 후 무고죄로 석방되시었다. 그 뒤 건강은 회복하셨지만 이가 다 빠져 완전 틀니를 해드렸다. 40년을 피시던 담배로 해소가 있으셨는데, 담배도 끊으시고 건강을 찾으셔 시조창에 몰입한 아버지셨다.

일찍이 한국 시조회의 임원을 지내시고 전국 시조대회에 참가해 우수상 등 수십 개의 상장을 받으시고 살아오셨다. 분단으로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이날만은 모든 시름을 잊으시고 친지분과 친척들을 만나셨다. 소위 기생들의 창과 춤, 그리고 당신께서도 시조를 노래하시었다. 내 생애에 그날처럼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더욱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 건강하시게 살아와 주셨기에 그날이 있었다. 아버지는 82세로 어머니는 84세로 모시다가 영면하시어 고향 선산에 계신다.

지금도 그 때 부모님이 만면에 미소를 진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서재에 팔순 잔치 때 형제와 손자들과 함께한 사진을 걸어놓았다. 요즘 잔치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들이 있지만 소박하고 모두 만족하는 자리는 자주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님은 생가 친가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문중에서 효자효부상을 타시고, 3남인 필자 내외도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지극히 한세대를 모셨다고 효자효부상을 받았다. 작금 사라져간 효를 되살리는 일은 중요하다.

내 부모님과 자식들이 분단으로 고행이었던 지난날이 그립다. 우리의 소원인 한반도 평화통일이 이뤄지면 삼천리 금수강산에 꽃이 만발할 것이다. 그 때에 저 세상에 계신 부모님과 형의 영혼이 함께한 큰 잔치를 벌이려고 한다. 한세대를 모시다 고향 선산에 잠들고 계신 부모님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 드리고 싶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 부디 영면하소서.
덧붙이는 글 '잔치, 어디까지 해 봤나요' 공모 글.
#분단조국 #부모님 참적삶 #평화통일 #잔치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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