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치와 인권 운동가... 강철 김영환의 진짜 얼굴은?

[주장]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증언 방청기... 전향과 인간에 대한 예의

등록 2014.10.28 15:21수정 2014.10.28 20:35
36
원고료로 응원
a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위원은 지난 21일 통진당 해산 심판의 증인으로 나섰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친북' 주사파 대부에서 '반북'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강철' 김영환. 지난 21일 오전 10시, 김영환을 보기 위해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를 찾았다. 그는 진보당 해산 청구 사건의 정부 측 증인으로 출석했다.

강철.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86년경, 대학 시절 때였다. 어느 때부턴가 새벽마다 동아리 방에 품성과 대중성을 강조한 팸플릿이 뿌려졌다. 당시 학생 운동권을 사로잡았던 그의 <강철서신>이었다. 20여 년 전, 그를 직접 만난 적도 있다. 시사 월간지 기자로 일하던 1991년 초였다.

'자민통과 한민전'이라는 예민한 주제의 기획 기사를 쓰던 나는 김영환을 인터뷰하기 위해 노량진역에 붙어 있던 역전 다방에서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영환은 운동권의 전설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얼굴에서는 <강철서신>에서 강조하던 정직, 신의가 느껴졌다. 공안 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활동했던 비합(법) 활동가에게서 느껴지는 경계심과 신중함도 풍겼다.

역전다방에서의 만남 이후 수개월 뒤, 강철은 반잠수정을 타고 북으로 밀입북했다. 이때 김일성 주석을 접견하고, 노동당에 가입했다. 김영환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점부터 반북으로 돌아서게 된다.

23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만난 '강철'

가을비가 내려서 그런가, 시월 중순치고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법정 안에는 희대의 증인이 출석했기 때문인지 방청석이 꽉 찼고,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목이 말랐지만 참아야 했다. 물병과 우산도 검시대에 맡기고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불그스레한 빛깔의 법복을 입은 재판관 9명이 입정했다.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법정 경위가 제지했다. 허가받은 기자만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앉은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은 최근 국정감사가 끝난 뒤 열린 오찬 모임에서 "(진보당 해산 심판 건을) 올해 안에 선고할 것"이라고 말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먼저 청구인 정부 측 대리인을 맡은 공안검사와 피청구인 통합진보당의 대리인을 맡은 변호사가 제출한 서면 요지를 20여 분간 진술했다. 그리고 오전 10시 28분경 "증인신문, 김영환 앞으로 나오시죠"라는 헌재 소장의 지시에 따라 김영환이 증인 신문석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뭐냐?"는 판사의 질문에 "북한 인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김영환은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 없이 사실대로 말하며, 만약 거짓말이 있다면 위증의 벌을 받을 것을 맹세"하고 자리에 앉았다.

청구인 측 검사의 증인 신문에서 김영환은 자신의 과거 운동권 경력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자신은 1985년 NL 계열, 주사파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강철서신>의 작성이 NL의 확산에 압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김영환의 이력은 극좌에서 극우로 널뛰기한다.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1986~1988년 3년 6개월 징역형을 받아 1988년 출소, 1991년 밀입북하여 김일성 면담, 1992년 민족민주혁명당(아래 민혁당)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1997년엔 민혁당 해산 주도, 1999년 공개적인 '사상전향서'를 국정원에 제출 후 공소 보류 처분으로 석방, 그리고 현재는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김영환의 의심 "민혁당 잔류 세력 전향 않고, 폭력 혁명 추구"

a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재판정의 진보당 간부들 지난 21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16차 변론에 참석해 재판을 기다리는 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당 간부들. ⓒ 진보정치 백운종


그는 과거 민혁당 관련자 재판에서 자신이 한 진술 중에 '형식적 위증'(김영환은 1999년 하영옥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진술한 것이 편의상 위증한 것이지만 지금 헌재에서 진술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형식적 위증'이라는 말을 사용했다)이 있었음을 여러 차례 인정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이날 재판에서 통합진보당 지도부, 국회의원의 실명을 거론하며, 이들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반면, 통합진보당 측 대리인 변호사들은 김영환이 국정원과 연계된 '프락치'라는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주사파를 일망타진하고 함정 수사를 하기 위해 국정원과 연계해 위장된 민혁당 활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영환은 법정 증언 중에 "대학 시절에 데카르트의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태도를 지녔다"는 말을 했다. 필자도 이런 김영환의 입장에 서서 세 시간이 넘는 증언을 청취하며, 기록했다. 나의 관심사는 '주사파 대부'라 불리던 인간 김영환의 진면목이었다. 그의 말대로 북한 인권운동가인가, 아니면 통합진보당 변호인의 추정대로 프락치인가?

김영환은 1991년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났고, 그 다음 해인 1992년에 지하 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창당했다. 민혁당의 3대 노선은 '주체사상, 자주 민주 통일, 북한식 사회주의'라고 했다. 또 수령론을 신봉해야 조직 가입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조직의 총책이었던 김영환이 지금은 주체사상을 유일 이념으로 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를 타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가 이처럼 남쪽 독재정권 타도에서 북한 독재 정권 타도로 전향한 이유는 뜻밖에 단순하다.

"1989년 동유럽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1991년 방북을 통해 사회주의와 북한 체제에 대해 실망했다. 더욱 결정적으로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고루한 정도가 아닌 용납할 수 없는 인권 탄압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1991년 방북해서 김일성 주석과 당 간부들이 주체 사상에 대해 무지한 것을 확인한 뒤, 전향을 결심하기 오래 전부터 그는 이미 전향을 숙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1989년부터 사회주의체제에 관해 크게 회의를 느꼈고(아마 작은 회의는 더 오래 전부터 시작했겠지만), 주체사상의 '수령'을 직접 만나고 나서 실망했음에도, 1992년에 주사파 운동조직 민혁당을 만들고, 그 산하에 다양한 알오(RO, 혁명 조직)를 만들며 조직을 확대한 이유는 무얼까? 김영환은 이에 대해 법정에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통합진보당 측 대리인 변호사의 의심, 국정원 프락치 가능성

통합진보당 측 대리인들은 특히 이 대목에서 강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한마디로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대리인 단장인 김선수 변호사는 증인 반대신문에서 사실상의 전향 후에도 민혁당을 창당하고 활동한 것에 의혹을 제기했다.

- 문: 증인은 1999년 10월 4일 국정원에서, "1991년 5월 북한을 방북하여 북이 인민의 자주성이 억압되는 사회이고, 김일성 주석은 주체사상을 잘 모르며, 북한이 관료주의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었다"는 취지로 반성문을 작성한 사실이 있나?
- 답: 있다.

- 문: 증인은 그러한 사실을 1991년에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 3월 16일 민혁당을 창당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등의 글을 14회 게재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 답: 1989년 동구권 멸망 때부터 기존 노선에 회의를 가졌고, 1991년 북한 방문 후 기존 노선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겠다고 확신을 했는데, 혼자 빠져나오는 것보다 함께 변화를 도모하고자 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1991년 밀입북 이후 북한 체제와 주체 사상을 회의한 김영환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북을 고무하고 찬양한 것에 대해 변호사들은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고 봤다. 그래서 이재화 변호사도 증인 반대 신문을 통해 '민혁당 위장 활동'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 문: 생각이 바뀌었음에도 민혁당을 창당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계속 쓰고 활동한 것은 국정원과 연계하여 민혁당으로 위장 활동하려 한 것 아니냐?
- 답:  아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얘기다. 그럴 동기와 이유도 없다. 내가 쓴 글을 보면, 미세하게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행간을 통해 변화된 사상을 얘기하려고 했다.

a

정당해산 청구 원천무효 지난 21일 '강철 김영환'이 증인으로 출석한 헌법재판소 앞에서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기각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 국민운동본부 회원들. ⓒ 진보정치 백운종


변호사뿐 아니라 김이수 재판관도 증인 김영환이 전향 후에도 '북한 지령'을 충실하게 따른 이유에 대해 신문했다.

- 문: 전향을 결심한 시기는?
- 답: 최종적으로 북한 정권 타도와 북한 민주화를 결심한 것은 1995년이었다.

- 문: (1995년에) 전향을 결심하였음에도 민혁당을 1997년에 해체하고, 그 후에도 왜 북한지령에 따른 활동을 했나.
- 답: 연계를 끊게 되면 북한이 하영옥을 비롯한 민혁당 간부들과 접촉해서 다른 연결선을 갖게 되고, 민혁당원 사상 전환의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공작 막기 위해  해체 하지 않고, 북한에도 해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나는 180도 전향했지만, 너는 절대로 변할 리가 없다?

통합진보당 측 대리인 변호사들은 자신의 전향은 정당하게 여기면서, 과거 동지들의 생각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변했을 리가 없고, 변할 수도 없다고 단정하는 이율배반적 논리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이재화 변호사의 반대 신문이다 .

- 문: 증인도 민혁당 활동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는데, 이석기 등 그 당시에 활동했던 이들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증인처럼 바뀔 가능성도 있는데, 무슨 근거로 통합진보당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바뀌지 않았다고 단정하는가.
- 답: 조건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는 생각이 바뀔 수 없다. 그들을 직접 만나지 않았지만 그들을 접촉한 주변 사람들 이야기, TV 공개토론, 세미나, 과 동창회 발언 등을 종합해 보건대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문: 꼭 공개적으로 전향을 해야 생각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나? 현장이나 공당에서 계속 활동하면서도 생각이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
- 답: 이석기의 알오(RO) 같은 조직은 생각의 변화를 자유롭게 표현할 분위기가 아니다. 설령 생각이 바뀌어도, 바뀐 생각을 공공연히 얘기하기 어렵다.

한 재판관은 이와 관련 증인 김영환에게 "일부에서는 (여전히) 북을 추종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똑같이 활동하던 다른 사람들은 왜 전향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이에 관해 김영환은 매우 감성적인 해석을 했다.

"수십 년간 자신의 인생, 활동, 모든 것을 규정했던 사상 노선을 부정하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라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북의 진실에 눈 감고 귀 막는 것이다. 조직원끼리는 친형제보다 더 끈끈한 관계인데, 이탈하는 순간 관계가 소원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히 고립되는 걸 두려워한다."

본인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남들은 그럴 리 없다고 주장하는 김영환은 과거의 '동지'들은 주체 사상과 폭력 혁명론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라 증언했다. 그뿐 아니라 김선수 변호사의 반대 신문 과정에서 민혁당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정희 대표도 지하 조직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 문 : (2012년 8월 6일자 <뉴데일리> 기사를 제시하며) 위 인터뷰에서 "이정희는 어쨌든 지하조직원으로 가입했겠죠"라고 대답했는데, 맞나?
- 답: 맞다. 나는 지하당을 활동했고, 운동권 활동 방식을 안다. 민혁당 계열이 핵심요직을 확고히 장악한 통진당에서 이정희가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건... 내가 객관적으로 추론할 때 민혁당 혹은 이름을 바꾼 어떤 조직이 있다면, 그 지하조직에 어떤 식으로든 가입해서 활동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성 얘기를 한 것이다.

- 문: 추측이었나?
- 답: "가입했겠죠"라고 추측한 것이다.

이정희 대표는 <뉴데일리> 인터뷰와 관련, 지난 8월 22일 김영환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바 있다. 김영환은 재판 내내 방청석에서 증언을 청취하던  통합진보당 간부(유선희 최고위원, 민병렬 최고위원, 안동섭 사무총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이들도 여전히 과거의 이념과 노선을 추구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전향한 혁명가가, 자신이 보기에 전향하지 않은 '동지'들에게 전향을 강요하며 옛 동지들의 면전에서 이들을 권력 기관에 고발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전향과 인간에 대한 예의

a

"올해 안에 선고" 박한철 헌법재판소 소장은 지난 17일 헌재 국정감사가 끝난 뒤 열린 오찬 모임에서 "(진보당 해산 심판 건을) 올해 안에 선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 진보정치 백운종


사실 전향 자체가 선악은 아니다. 지동설이라는 객관적 진리로 다가선 코페르니쿠스적 전향은 위대한 전향이다. 특히 진보를 추구하는 이는 수시로 변하고, 전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보도 수구 보수가 되고, 퇴물이 된다.

하지만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전향을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도 중요하다. 이재화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뒤 트위터를 통해 "(전향은 개인적 자유지만) 보수건 진보건 인간은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 김영환, 그에겐 아무런 철학도 논리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다. 단지 수구 세력이 원하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저렴함만 느껴졌다"며 김영환의 증언 방식을 비판했다.

회의, 의심은 금지된 것을 대상으로 할 때 진정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교회가 천동설 주장할 때 목숨 걸고 지동설 주장하고, 독재 정권이 반공을 말할 때 감옥갈 각오하고 '통일이 국시다'라고 말하는 게 진정한 용기다.

전향을 한 뒤 처벌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전향한 대가로 감옥갈 일을 면제 받는다면, 그 전향의 순수성을 누가 믿겠는가? 자신이 정말 인권 운동가이고, 혁명가라면 설령 좌에서 우로 전향을 했다 하더라도 사상의 자유를 법정에서 외쳐야 하지 않을까? 전향에도 품격이 있어야 할 것이다.

3시간 넘게 김영환의 법정 증언을 들은 뒤 처음 던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김영환은 인권운동가인가, 고급 프락치인가? 지금으로서는 역사의 법정에서, 양심의 심판관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일로 보인다.
#진보당 해산 #헌법재판소 #김영환
댓글3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AD

AD

AD

인기기사

  1. 1 '특혜 의심' 해병대 전 사단장, 사령관으로 영전하나
  2. 2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3. 3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4. 4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