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편지를 품고" 잠들다

시와삶이 만날 때④

등록 2014.11.30 17:15수정 2014.11.3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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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 공히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된 그 남자는(개인 사생활 보호상 실명을 기재하지 않음) 내 젊은 날의 만남 중 가장 나의 추억을 화려하게 해 주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를 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인생은 의미가 있는 듯 여겨지니 말이다. 그렇다.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무명시절이 있는 것이다. 그가 무명시절일 때 나는 그에게는 어떤 시인으로 비쳤을까.


그는 종종 나에게 인생은 '시간의 여관'이라고 토로 한 바 있다. 그리고 난 당시 그의 말에 전적으로 긍정하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거대한 유리관(박물관) 속에 집어넣어서 형상화하였다. 이런 철학적인 생각의 바탕으로 작업한 작가의 작품들이 현재 뉴욕 등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내가 <유클리드의 산보>연작시를 쓰기 시작하던 그 무렵 나는 그의 작업실(갤러리)에 자주 방문했다. 그의 작업실이 내가 사는 동네(해운대)라는 탓도 있었다. 그는 문학인도 아닌데 참 많은 서적(주로 철학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나의 생각은 사진작가는 사진만 잘 찍으면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우문을 하고 그는 현답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시집을 읽지 말고 철학 서적을 읽기를 권하였던 것 같다.

우리는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그는 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시보다는 철학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그는 당시 시집을 한 권 가지고 있는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이 잘 된 것도 같다.

정말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고, 그의 말처럼 인생은 누구나 한번 머물다가 떠나는 '시간의 여관'이라고 하겠다. 그 시간에서 흘러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와 함께 한 '시간의 여관'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리하여 종종 나는 흘러간 그 시간을, 추억하며 나의 지난 삶과 시를 돌아보곤 한다. 시간이란 그냥 흐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과거로 역행하기도 한다. 그것은 추억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미 지난 시간 속으로 돌아가는 과학 작업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되돌려 놓기도 하는 것 같다.  


마치 비유클리드의 공리처럼 말이다. 아무튼 내가<유클리드의 산보>연작을 쓸 때, 그의 프로젝트 작업, '박물관 시리즈'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던 것은 분명하겠다. 그것은 흐르는 시간을 완벽하게 정지시켜 박제화한 시간의 유물 같은 작품들이었으니 말이다.

<유클리드의 산보>연작시 역시,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되돌려 놓는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사실 나는 <유클리드의 산보> 연작시를 쓰고자 마음을 먹은 것은 그와 만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어느 전람회에서 초현실주의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유클리드의 산보>그림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시화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어떻게 작품으로 풀어내야 할지 막막했다. 그와의 만남으로써 <유클리드의 산보>연작시를 창작 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시인이 한 송이 국화꽃이 피기 위해 번개가 울고 천둥이 친다고 했듯이, 나의<유클리드의 산보>란 시가 태어나기 위해 내 인생의 방점을 찍는 작가를 만나게 운명적으로 정해진 듯하니 말이다. 어쩜 시도 인생도 그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말을 나는 애써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클리드의 산보30>,<유클리드의 산보 15>,<유클리드의 산보 16>는 1999년 (시와 사상) 봄호에 발표했는데, 같은 해 제주도에서 발행하는 문학잡지 계간 (다층)에서 주최한 다층문학상(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당시 해당 잡지에서는 전국잡지에 발표작을 대상으로 심사를 하여 상을 주었는데, 상금이 없는 상이니, 창작 격려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유클리드의 산보>의 연작시는 나의 시세계를 말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고 하겠다. 

영화, 수학시험 ⓒ 영화, 수학시험


길상사 겨울나무 속으로 들어갔다는 그 남자의 편지//나는 그 편지를 품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겨울나무는 출렁 출렁 우물로 걸어왔다. 걸을 때마다 집들이 넘치고 도시가 넘치는 그 남자의 겨울나무. 나는 그의 우물 속으로 깊이 깊이 걸어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의 우물이 내 가슴에도 고여 왔다. 그 깊은 우물 속으로 내 전생의 계단을 내려갔다. 구절초 같은 그 남자의 미소에는 내 전생의 집이 보였다./ 깊이 깊이 밟으면 내려앉을 다리 위의 집. 우린 삼천번 옷깃을 스치고 집이 되어 만났다./ 몸은 숨겨도 마음은 숨길 수 없었던 세상의 싸리문들. 우리는 잎을 다 떨군 겨울나무속에서 삼투하듯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 그 남자의 눈빛은 점점 투명한 우물이 되었다./ 그 남자의 우물 속, 그가 보았다는 겨울나무의 우물이 내 마음의 우물을 팠다. 이심전심(以心傳心). 그림자처럼 그 남자의 우물은 내 거울이 되었다. 길상사 앞마당에서 그가 보았다는 겨울나무의 우물이 내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길상사의 겨울나무가 내 가슴에 옮겨졌다./ 흘러넘치는 우물 속에 흘러가는 물거울 같은 이정표들. 나는 그 남자의 길을 집어 들었다. /세상의 마지막 쉼터인 그 남자 심장 부근에서 넘쳐 흐르는 울음이 손가락에 번졌다. 내가 더 울어야 할 길이 그 남자의 우물 속에서 넘쳐 흘렀다.
  송유미, <유클리드의 산보 30> 전문

나는 <유클리드의 산보>연작시로 다층문학상을 수상한 후 여기 저기 전화(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수상을 축하하는 전화가 아니라 '유클리드' 인물에 대해서나 왜 제목을 '유클리드의 산보'로 정했느냐? 산보(散步)는 일본어로 표기된 한문이 아니냐는 등등 이었다. 나는 산보란 한문이 일본어 표기인 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산책으로 발표하겠다고 전화 온 사람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에 시집을 엮을 때 산책으로 수정하였다.

그러나 시에 대해 식견이 많은 시인의 경우도 종종 나에게 '유클리드'란 인물이 이 시에서 상징하는 것이 뭐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또 모 신문사 기자는 '유클리드'는 수학자인데 이 시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어 와서 황당했던 적도 있었다.

나는 사실 기하학에 대해서 무지하다. 유클리드는 기하학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이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원리를 세운 수학자라는 것 밖에는 말이다. 그러나 창작 당시 유클리드란 인물에 대한 공부를 약간은 하였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의 원리'와 '비유클리드의 원리'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시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리고 「유클리드의 산보」의 공간은 기하학과 상관이 없는 내 마음의 공간을 만들겠다고 말이다.

영화, 수학시험 ⓒ 영화, 수학시험


따라서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김정화 교수의 글처럼 "마그리트가 <유클리드의 산보>에서 진짜 보는 것과 본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현실과 상상이라는 결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두 덩어리의 생각 위에 유클리드의 평행선의 공리를 던져놓"았듯이, 나 역시 시적 의도가 위와 결코 다르지 않았었다. 다만 내가 형상화 한 작품에 이런 생각이 잘 형상화되었는지도 나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는 매우 정의하기 힘든 장르 같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자신이 써놓은 시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갖지 못하니 말이다. 또한 시를 잘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어떤 고정 관념을 가지고 시를 읽는다는 사실을 <유클리드의 산보>연작 작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시는 시인이 쓰지만 시의 매력은 시를 읽는 독자가 음악처럼 그것을 느끼는 대로 느껴보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 말해주지 않는 시를 다 읽어내는 몫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라고 하겠다.

무명시인인 나에게 이런 넘치는 관심을 보여준 것은 '유클리드의 산보'란 제목 덕분인 것도 같다. 해서 당시 (다층) 잡지의 편집위원이자 심사평을 쓴 육근웅 문학평론가(시인)의 글을 여기 옮겨 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맺는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시 <유클리드의 산보 30>,<유클리드의 산보 15>, <유클리드의 산보 16>은 환상성과 사실성이 적절히 조직되면서 율문과 산문이 묘하게 상호보완 작용을 이루는 단단한 구조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대체로 상실을 노래한다. 길상사로 떠난 남자의 잃어버린 신발, 사라진 낙타와 전사한 맹호부대 아저씨가 '지상에도 없는 유클리드 사막'(<유클리드의 산보1>)에 등장한다. 화자의 추억은 온통 부재로 물든다. 굳이 화자가 상실된 대상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들추어내는 까닭이 무엇일까?

 송유미의 이미지들은 그렇게 찬란하지도 신기하지도 않다. 그야말로 낯설지 않은 이미지들로 직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독자를 꿈으로 인도한다. '우물'이 우리를 꿈꾸도록 만든다. 우물에 전생이 비치고, 우물에 길상사로 떠난 남자의 눈빛이 비치고 그 눈빛에 화자의 우물이 태어난다. '이심전심'이란 말의 진부함은 이 시에 들어앉음으로써 새롭게 빛나는 말이 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심상 1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시와 삶 #수학 #유클리드의 산보 #마그리트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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