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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본 <인터스텔라>...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다

[리뷰] 뚝심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 <인터스텔라>의 색다른 해석

14.11.24 12:18최종업데이트14.11.2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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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천체물리학 영화가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일반 상대성이론, 블랙홀, 웜홀, 시공간의 휘어짐과 5차원세계 같은 물리학용어가 난무하는 영화 <인터스텔라>. 상영시간이 길지만 객석의 몰입정도는 상상 이상이다.

관객을 휘어잡는 힘은 무엇일까. 웃음과 눈물과 교훈을 적절하게 안배하는 작위적 요소 없이, 과학적 이성과 무한상상의 세계로 돌입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뚝심.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함 하나로만 무장한 지독한 영화이다. 

<인터스텔라>를 해석하는 허다한 방식과 관점을 되풀이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 글은 서양인들이 바라보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시각을 돌이켜보고, 그들이 어떻게 인간내부에 대한 깨달음으로 회귀하는지 생각하고자 한다.

황사와 사막화는 어디서 오는가

자상하고 따뜻하며 유능한 아버지이자 농부인 쿠퍼. 언제부턴가 황사가 닥쳐왔고, 농장에는 옥수수만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황사와 사막화의 원인을 모른다. 지난 세기의 오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대지에 비가 오지 않으면 토양은 건조하고 황폐해진다. 바람이 거세지고, 농작물은 자랄 수 없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은 하늘에 문제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비는 하늘의 선물이 아니라, 물의 순환이다.

대지와 하천과 호수의 물이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고, 그것이 공중으로 올라가 서로 엉켜 구름이 되어 비가 내리는 것이다. 대지가 지나치게 건조하면 기화할 수분이 사라져 버린다. 거기서 최초의 근본적인 문제가 시작한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도덕경> 제25장)

노자에 따르면, 사람이 따라야 할 궁극의 대상은 자연이다. 자연의 이법에서 본질은 인위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스스로 그러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중국에서 수입된 화약과 대포가 서양의 중세 천년을 끝장냈다. 그 무렵 서양에는 대학, 기계시계, 원근법, 복식부기, 인쇄술이 하나둘씩 자리 잡는다. 수량화와 인간중심의 르네상스와 근대가 서양의 새벽녘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150년 정도의 기간을 거친 서양인들은 유럽의 협소함을 문득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항해시대'를 열고 밖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장건의 대항해는 논외로 하자. 그들은 대륙과 다름없는 중국에 스스로 갇혔다.

이것이 서양 근대사 500년의 출발이자 뼈대다. 신대륙이라 명명된 남북 아메리카의 무력점령과 식민화, 제국의 탄생과 아시아의 병탄, 아프리카의 노예화가 서양 근대사의 골간 아닌가. 그들은 쉬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인터스텔라>도 예외는 아니다. 20세기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빚어진 사막화와 거대 황사를 해결하는 대신, 그들은 우주로 나아간다. 그런데 흥미롭다.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아 나선 쿠퍼가 홀연한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밖에서 안을 찾은 쿠퍼

21세기 첨단물리학이 영화에 동원된 것은 인류공동체 지식기반이 나날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지식과 정보가 총알처럼 세계를 휩쓸고 다닌다. 우리는 하루가 한 달로, 한 달이 1년으로 줄어든 세계를 살아간다.

압축된 시간과 축소된 공간에서 우리는 원자화된다. 개인의 소외와 무능력과 무기력이 지금처럼 구조화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하여 인간은 최소화된 집단의 성원으로 전락한다. 가족은 1인 내지 2인으로 구성된다.

쿠퍼의 어린 딸 머피는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긴 세월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깨닫는다. 아빠는 그녀를 버린 게 아니라, 광막한 우주 어딘가에서 자신에게 규칙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쿠퍼가 5차원 큐브에서 머피에게 내면을 토로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자신을 떠나보내지 말라고 외치는 쿠퍼는 아득한 시공간에서 깨닫는다.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머피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만 박사와 쿠퍼의 대결은 시사적이기까지 하다.

<인터스텔라>가 설득력 있는 지점은 여기다. 밖으로 질주하던 서양인들이 늦게나마 안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안에 문제가 있다면, 소중한 사람이 내부에 있다면 밖으로 나가기 전에 안을 응시해야 한다.

우주에서 사랑을 깨닫다 

기원 130년 무렵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이후 코페르니쿠스에 이르기까지 천동설은 요지부동이었다. 지동설은 티코 브라헤, 갈릴레이 갈릴레오, 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쳐 뉴턴에 이르러 정립된다.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던 인간은 <프린키피아>(1687)에 이르러 우주의 운항법칙을 확연히 인식하게 된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인간내부를 천착하여 20세기에 정신과 영혼 및 잠재의식에 푯대를 세운다. 먼 길 돌고 돌아 인간본연을 깨달은 그들에게 노자는 말한다.

"문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문을 내다보지 않아도 하늘의 이치를 안다. 멀리 가면 갈수록 그 지혜는 짧아지나니. 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도덕경>, 제47장)

쿠퍼가 에드먼드 항성에 있는 아멜리아를 찾아 나서는 것은 이런 깨달음과 맞닿아 있다. 머피를 떠나 우주에서 머묾과 사랑을 깨달은 쿠퍼. 사랑을 잃고 나서 사랑을 찾은 인간 쿠퍼는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머물기 위해서 떠난다.

어떻게 보면 영화는 모순적이다. 하지만 머피의 병실에 모여든 후손들은 지구가 당면했던 문제해결의 단서를 보여준다. 안으로 지구의 황사와 사막화를 해결하고, 밖으로 우주탐사를 지속한다는 전갈을 담은 따뜻한 영화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천체물리학 대항해시대 서양근대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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