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을 '대놓고 까는' 재판부... 칸트가 떠오른다

"법률가는 법의 저울을 자기 쪽으로 기울게 하려고 정의의 칼을 얹는다"

등록 2014.11.28 16:52수정 2014.11.2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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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 사진공동취재단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권리는 그 나라 법문명의 질적 수준을 가늠한다. 부연하자면, 재판중인 범죄사실이 어느 나라에서나 범죄로 처벌할 만한 것인지, 피고인이 소송에서 방어권을 합당하게 행사하는지, 나아가 재판부가 공정한 절차를 통해 합리적인 판단에 이르는지가 그 기준이다. 아마도 이미 14세기에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는 배심제를 확립한 영국을 서구에서는 가장 먼저 문명국이 되었다고 볼 것이다.

여담이지만 배심제가 우월한 제도임을 증명해주는 사례 하나를 언급해보자. 15-16세기 마녀재판으로 유럽이 달아오르던 때에 당시 유럽대륙에서는 전문법조인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마녀로 기소된 피고인들을 거의 빠짐없이 유죄판결을 하였던 반면(형벌은 화형이었다!), 영국에서 보통사람들의 배심법정은 과반수를 조금 넘기는 수준에서 유죄판결을 하였다. 마녀의 존재에 대해 보통사람들보다 전문법조인이 더 확신에 찼던 것 같다.

형사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나는 자기부죄금지권리(自己負罪禁止權利,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점에 관해 자백이나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또는 묵비권)와 무죄추정의 권리(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법적으로 무죄로 추정한다는 것에 대한 형사피의자나 피고인의 권리)를 가장 중요한 권리로 꼽고 싶다.

이러한 권리는 피고인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를 동시에 규정한다. 자기부죄금지의 권리에서 고문이나 굴욕적인 취급을 하지 않을 국가의 의무가 도출되고, 무죄추정의 권리에서 피고인을 형사소송의 온전한 당사자로 대우할 의무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리들은 우리 헌법 제12조와 제27조에 규정되어 있다. 피고인이 흉악 범죄인지 아닌지에 관계가 없다. 그것이 권리이다. 헌법전은 과거 형사절차에서 만연한 고문과 조작을 기억하던 까닭에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명문화했던 것이다. 따라서 헌법전은 일방적인 권력판결이 아니라 합리적인 법정투쟁을 예정하고 장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고인의 이의제기를 이유로 양형에 불리하게 판단'

변호인은 따라서 피고인을 위해 힘써 변론해야 한다. 그의 변론활동은 헌법이 허용한 행위이고 변호사 직업의 존재이유이다. 그런데 요즘 피고인의 이의제기와 변호인의 옹호활동을 '대놓고 까는' 재판부가 등장하였다. '대놓고 깐다'는 말을 쓰는 이유는 특별하다.


재판부가 피고인의 거친 이의제기를 이유로 은연중에 사실상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판결에 반영했다는 사정이 아니라, 재판부가 '피고인의 거친 이의제기를 이유로 양형에 불리하게 판단한다'는 선언을 판결서에 명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재판부의 이러한 언설이 판사의 윤리에 부합하는 것인지, 헌법의 원칙에 맞는 것인지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문제는 사소한 윤리의 주제가 아니라 헌법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논하려는 사건은 왕재산 사건(2013)과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2014)이다. 그 사건들의 적용법조는 간첩죄와 내란죄(선동죄) 등 이 나라 정치형법의 대표적인 규정들이었다. 왕재산 사건에서 피고인과 변호인들은 검찰이 제출한 증거가 조작되었거나 오염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항의행태를 재판부가 불리한 양형자료로 삼는다는 내용을 판결서에 적어 넣었다.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에서도 재판부는 피고인과 변호인 측의 거친 무죄주장을 양형의 가중사유로 삼는다는 언설을 판결서에 적어넣었다. 재판에 지고 재판부에게 이러한 말까지 들은 변호인들과 변호인측 증인들은 자기들 때문에 형이 가중되었다고 가슴 아파 했을 것 같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대법관(Lord Chancellor)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재판에 대해>라는 짤막한 에세이에서 폭력은 노골적일 때 가장 위험하고, 흉계는 은밀할 때 가장 위험하다고 말했다. 앞의 문제의 언설이 이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궁금하다. 판사는 재판에 임하는 피고인이나 당사자의 태도를 감안해서 사실인정을 하고 법적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것은 판사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런데 억지스럽지만 무죄추정의 권리는 이러한 판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판사가 유죄판결을 하였다면 유죄의 합리적 확신에 이른 순간에 무죄추정은 깨지므로 피고인이 지금까지 죄를 부인한 행태를 소급해서 뻔뻔스러운 짓거리라고 단죄하고 가중 처벌할 권리를 재판부가 이제 획득하게 되는 것일까?

물론 판사는 자신의 유죄를 솔직하게 인정한 피고인을 우호적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것은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피고인은 (유죄임을 감추고) 진실에 대하여 침묵할 수도 있고, 책략적으로라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다. 그것도 법적으로 허용된 것이다.

공정한 재판의 모습이 사라진 권력판결의 위세

더구나 변호인이나 피고인이 아예 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죄목 자체가 문명국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제시된 사실들이 어떠한 죄도 입증하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때에는 그들이 무죄를 거칠게 주장할 더욱 합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물론 그 주장의 강도가 법정을 모욕할 정도로 탈선했다면 재판부가 법정모욕죄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 그 태도를 문제 삼아 형을 불리하게 반영했다는 재판부의 발언은 참으로 이상하다. 법원이 자신의 권리를 불퇴전의 용기로 주장하는 피고인을 더욱 엄벌하겠다고 선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재판의 모습이 사라진 권력판결의 위세를 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1심의 판결이 그 재판부의 판단과 달리 고등법원에서 파기된다면 앞서 말한 확신가중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법관을 이제 확신범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법관의 확신은 무엇인가? 법적인 판단은 어느 경우에나 오류가능성이 있는 인간적 판단이지, 100% 진실 보증이 달린 판단이 아니다. 100% 진실 보증이 달린 판단은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법관은 자신의 인간적 추론에다 100% 진실 보증이 달린 신적인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변호인들의 강력한 변론행동이 왜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고려해야 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변호인과 피고인이 범죄단체를 구성하여 재판부에 폭행을 가한 것도 아닌데 이러한 책임귀속이 개인책임에도 맞는지 의문이다.

결국 나의 추측은 이렇다. 아직 합리적인 확신에 이르지 못한 때에만 피고인을 상대로 법관의 확신이나 감정이 전면에 돌출할 것이라는 점이다. 합리적 확신은 누가 보아도 냉정한 이성의 귀결이자 추론의 영역이다. 작금의 판결 앞에서 칸트의 냉소적인 말이 다시 떠오른다.

"법의 저울과 함께 정의의 칼을 상징으로 삼아온 법률가(국가권력의 대표자)는 법의 저울에 대한 외부의 온갖 영향요소들을 차단하기 위해 정의의 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울 눈금을 자기 쪽으로 기울게 하려고 그 칼을 얹어 놓는다."(칸트, 영구평화론)

최근 들어 세상을 압도하는 정치재판들, 야당의원 전용재판들에 대해 칸트의 의혹을 던져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인권연대 운영위원으로,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치판사 #형사소송 #변호인 #묵비권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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