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통'하는 가르침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16] 교육 공간을 채우는 세 가지 가르침, '개방성·경계·환대'

등록 2014.12.05 15:48수정 2014.12.0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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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우리는 세월호 사고를 통해 한 사회의 문화가 생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무고한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새들마을학교'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이 이 사회의 문화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과 배움으로 바른 문화를 만들기 원하는 이들이 모여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열린도시연구소 새 들'과 산하 '새들마을학교'는 '생명의 교육, 길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고뇌와 축제로 펼치는 교육문화연구학교'를 10월 9일부터 12월 25일까지 12회 진행합니다. 이를 계속 연재합니다. - 기자말

언제부터인지 질문하기가 두려워졌습니다. 친구들 눈치도 보이고 선생님도 약간 피곤해 보여서입니다. '너 그거 여태 모르고 있었어?' 친구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다른 친구들 속도를 나만 못 맞추고 있었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되도록 실패는 그림자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몰라도 아는 척, 나중에 혼자 뒤쫓아 가면 됩니다. 그럼 될 것 같습니다.

교실에서는 티를 내면 안 됩니다. 친구들이 동무였으면 좋겠는데, 질문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걸 보니 동무는 사라지고 죄다 남들뿐입니다. 허물을 보이면 안 되는 남남, 그렇게 친구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네 교실은 그런 공기로 가득했습니다.

질문하기가 두려워서야 되겠습니까. 무턱대고 질문만 해 대는 버릇은 고쳐야겠지만, 질문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는 안 됩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누구나 번쩍 손을 들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 참된 교육의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친구들도 눈치를 주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피곤해 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모두에게는 새로운 것을 알아 가는 기쁨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질문이 새로운 영역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습니다. 그런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찬 공간, 우리네 교실이 그런 곳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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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은 하나의 질문으로도 새 장이 열리는 공간이어야 한다. ⓒ 새들마을학교


교육문화연구학교 9번째 시간은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파커 팔머, IVP)을 5부부터 7부까지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관련 기사 :달에 추락해도 서로에게 귀 기울이면 산다? ) 모둠별로 흩어져 각자 읽고 생각한 것들을 나눴습니다. 저자 파커 팔머가 '가르침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한 주장이 토론을 이끌어가는 주된 화두가 됐습니다.

우리의 교실은 어떤 공간이었나. 그 공간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었나. 과연 진정한 배움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었나.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경험담을 나누다 보니, 질문하기가 두려워 조용히 숨죽이고만 있었던 교실 속 풍경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쁨으로 충만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자연스레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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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9번째 시간. 모둠별로 흩어져 각자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을 읽고 생각한 것을 나누는 모습. ⓒ 새들마을학교


'배움의 공간' 세가지 주된 특징

파커 팔머는 배움의 공간에는 세 가지 주된 특징, 세 가지 본질적인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개방성'입니다. 교육의 공간은 낯설음을 창조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낯설다고 어색해 할 필요가 없는 곳 말입니다. 오히려 낯설어서 더 반갑습니다. 나만 중요하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래서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고 보면, 낯선 것은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내 손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에 내가 몰랐던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 이렇게 여지를 인정하는 태도가 나를 진정 배움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그렇다면 개방성이 모든 걸 보장해 줄까요. 파커 팔머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경계'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대중 교육의 보편성이 저질러 놓은 폐해를 극복하고자 개방성의 나팔을 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대의 선각자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걸 다 해결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한 줄 세우기에 신물이 났다고, 무작정 줄만 없애 버리면 어린 학생들은 스스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의 자유 때문에 오히려 숨이 찰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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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의 자유는 오히려 아이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사진은 새들마을학교 체육시간. ⓒ 새들마을학교


때로는 선을 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혼돈으로 치달을 수 있는 무한한 개방성이 아니라, 공간의 개방성을 지켜주는 선, 그 공간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막아 주는 선이 필요합니다. 그 경계 안에서 일단 숨을 좀 고르면서 자기 길을 제 속도에 맞게 걸어가도록 하는 배려의 선 말입니다. 파커 팔머는 "공간의 개방성은 경계들의 견고함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파커 팔머는 배움의 공간에서의 환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배움은 언제나 변화를 요구합니다. 앎은 배우는 자를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내도록 요청합니다. 그 과정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합니다. 파커 팔머는 '환대'가 그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말합니다.

학교 다닐 때 지적받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학교를 떠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진땀이 흘러내립니다. '뭘 그리 잘못했다고 나한테 그러나.', '나는 한다고 했는데 어쩌란 말인가.' 푸념 섞인 불평과 원망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그런데 혼내는 사람은 그 정도까지 생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잘 알아듣고 고치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적 자체가 너무 싫고 부담스러워서 나 혼자서 감정을 과도하게 키운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 환대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널리 환대받고 두루두루 신뢰를 쌓아 가는 만남, 그 관계가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반응도 달라집니다. 파커 팔머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환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환대는 언약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분위기, 변화시키는 진리가 가져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분위기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지적을 받으면 그길로 몸과 마음을 고쳐먹으면 됩니다. 고개 숙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공포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두루두루 신뢰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보장된 공간. 그 공간에서는 낯설음이 환영을 받고 무지가 축복이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허용되고 모든 노력이 다 칭찬받는 것은 아닙니다. 경계 안에서의 자유가 진정 나를 살리는 자유임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런 공간입니다. 개방성, 경계, 환대가 어우러진 교육 공간은 이렇게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 고민, 소망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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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가 익숙해지려면 손에 물집이 잡히는 고통이 필요하지만 연주의 즐거움은 고통을 이기게 한다. ⓒ 새들마을학교


마지막으로 파커 팔머는 가르침이 창조하는 공간은 실천을 담보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승은 제자들을 실천의 영역까지 데리고 갈 작정을 해야 합니다. 새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어야 가르침이 생명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게 없다면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가르침이 되고, 허울밖에 남지 않은 껍데기 가르침이 되고 맙니다.

학교에서뿐만이 아닙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자기 사무실 이야기로 화제가 번졌습니다. 상급자는 지시를 내립니다. 그런데 지시 사항의 이행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지시 내리기에만 바쁩니다. 지시를 받은 사람이 지시를 이행하면 결과가 나올 것이고, 기대했던 바가 어떻게 끝맺음을 하는지 함께 지켜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생략된 채로 오로지 지시를 내리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는 상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시를 이행하는 이의 성장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가 빠져 버린 경우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통해 또 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역시나 실천이 중요해집니다. 실천을 통해 가르침과 배움의 행위가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는 이 생명력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서로) 언약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며 인격적으로 응답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실천을 끝까지 붙들게 하는 관계, 그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참다운 교육을 꿈꾸는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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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연구학교에서 함께 책을 읽고 나누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신뢰관계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 새들마을학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새들마을학교 홈페이지(club.cyworld.com/saedeulmaeul)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새들마을학교 #교육문화연구학교 #교육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파커 팔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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