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cm 쇠못 박혀 죽은 아들
국방부장관 멱살 잡은 엄마

[병영에 햇빛을: 대만 현지취재 ⑨-2] 20년간 군 인권 운동 이끈 '황마마' 첸피에씨

등록 2014.12.18 13:35수정 2014.12.1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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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사단 윤 일병은 군 입대 후 112일 만에 부모 한 번 못 만나보고 선임병들의 구타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을 계기로 육군이 단 18일간 조사한 결과 3919건의 군내 가혹행위가 적발됐습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가혹행위가 자행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군이 병영문화를 개선하겠다고 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이제 군에만 맡기지 말고 외부에서 본격적으로 감시하고 개입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병영에 햇빛을' 기획 연재기사를 싣습니다. 기획을 마무리하면서 타이완 현지취재를 통해 타이완 시민사회와 군이 장병 인권 문제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타이완의 병영 인권 상황 개선 노력을 통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우리 군이 나가야 할 방향을 짚어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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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피에 군중인권촉진회 대표 타이완 군중인권촉진회 첸피에(58) 대표. 첸씨의 아들 황궈장 이병은 지난 1995년 6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 김도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대륙을 상실하고 타이완으로 철수한 것은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한 지 2개월 뒤인 1949년 12월 8일이었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타이완은 본토수복을 목표로 한 국방정책을 수립하고 60만 대군을 유지해왔다.

한국의 절반 남짓한 인구로 한국군과 비슷한 규모의 군대를 보유했던 타이완은 사실상의 병영국가였다. 경직되고 방만한 군 조직 탓에 군의 자살률이 사회의 3~5배에 이르고 군 의문사도 자주 발생해 결과적으로 군대의 질적 하락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이후 타이완 군의 인권 상황은 급격하게 개선됐다. 여기에는 군대에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는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군인 인권개선 운동을 펼쳐온 타이완 군중인권촉진회 대표 첸피에(58)씨다.

"어서 오세요, 한국 분들은 언제나 대환영입니다."

지난 9일 오후 타이베이시 베이토구에 있는 첸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만면에 가득한 미소로 기자를 맞아주었다. 지난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까닭에 특별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첸씨의 아들 황궈장은 지난 1995년 1월 해군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는 쾌활하고 명랑하던 아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두 달의 훈련을 마치고 구축함 '남양함'을 타게 되면서부터였다.

"선임병들이 돈을 요구했어요. 또 품종 있는 개를 구해다 달라고도 했고요. 아이는 단 며칠 사이에 흰 머리가 날 정도로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은 다리에 화상을 입은 걸 보기도 했습니다. 전 '조금만 참고 버텨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첸씨가 아들이 당하고 있던 고통에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함장에게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아들을 괴롭히는 고참병들이) 취사병들인데, 이들을 징계하면 배안의 장병들이 밥을 굶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6월 어느 날, 첸씨는 출동을 앞둔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발 배를 타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하던 아들은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첸씨는 아들의 상관들과 통화하기 위해 애타게 노력했지만, 아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런 사이 아들을 태운 구축함은 출동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길까 싶었다.

해군 "아들이 사복입고 탈영"... 명찰 단 군복차림 시신으로 발견된 아들

며칠 뒤 9일, 첸씨는 해군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황궈장 이병이 사복 차림으로 탈영했다는 전화였다. 하지만 엿새 후인 15일, 중국 푸젠성 근해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들이 바다에 떠 있는 타이완 해군 수병의 시신을 발견했다. 물고기들에게 뜯어 먹힌 얼굴은 백골이 되어 있었지만, 군복에는 황궈장이라는 명찰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처음부터 군은 거짓말을 했어요. 사복 차림으로 탈영을 했다고 했지만, 아들은 배를 타고 출동을 했던 거지요."

군에서 받은 작은 사진을 확대해 보니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들의 머리에 13cm 길이의 쇠못이 박혀 있었던 것. 몸 이곳저곳에는 멍도 들어 있었다. 아들의 머리를 뚫고 지나간 쇠못은 엄마의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그 순간 첸씨는 더 이상 그의 인생이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왜 거짓말을 했는지, 아들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만이라도 밝혀달라고 했지만, 군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첸씨는 기자들을 만나고 입법원(국회)을 문턱이 닳도록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첸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모두 자식을 군에서 잃은 엄마들이었다. '왜 이 사람들은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을까' 궁금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관심이 있는 척했을 뿐, 당사자들이 아니면 아무도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군대에 간 아이들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렇게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숨을 잃어선 안 되는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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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하는 황마마 2006년 5월 10일 군부대 폭발사고로 장병 2명이 사망한 사고 현장을 방문한 타이완 입법원(국회) 국방위원들에게 첸피에(우측)씨가 항의하고 있다. ⓒ 군중인권촉진회


아들의 죽음은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아왔던 첸씨를 '황마마'(黃媽媽, 황씨 성을 가진 아이의 엄마라는 뜻)로 불리는 투사로 만들었다.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하다 수갑을 차고 끌려가고, 입법원에서 마주친 국방부장(국방장관)의 멱살을 잡았다.

"요구 내용을 적은 깃발이나 현수막을 내걸면 군인들이 바로 찢어버렸기 때문에, 옷 위에다 글을 써서 시위를 했습니다." 

첸씨는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을 모아 '군중인권촉진회'(軍中人權促進會)를 만들고, 입대하는 장병들에게 가혹행위나 인권침해를 당했을 때 신고할 수 있도록 '인권카드'를 나눠줬다. 입법원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때론 압력을 가해, 인권보장 제도와 시스템을 만드는 데 진력했다.  

이런 결과, 첸씨의 노력은 잇따라 의미있는 결실을 맺었다. 장병들의 심리상담 필요성을 줄기차게 역설한 결과, 군부대에 '정신건강센터'가 설립되고 심리교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또 국가배상과 별도로 군인보험제도 도입을 요구, 1998년 7월 이후 타이완군의 모든 장교와 사병을 위한 사고보험이 실시되고 있다.

처음에는 첸씨를 상습적 민원 제기자 정도로 치부하던 군 당국의 태도도 달라졌다. 그를 장병 인권 개선을 위해 함께해야 할 파트너로 인식한 것이다. 1999년 3월, 타이완 국방부는 장병들의 인권과 관련하여 국방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감독하는 권한을 가진 '국군관병권익보장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설치하고 첸씨를 위원으로 위촉했다. 이 위원회 위원의 1/2은 군 외부 인사로, 1/3은 여성위원으로 구성됐다.

대만 군내 사망자 30% 줄어... "한국 군 인권 상황은 왜 개선 안됐나"

첸씨 등의 노력으로 대만의 군내 인권상황은 상당히 개선됐다. 우선 군내 사망자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만 국방부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에 "감군(減軍, 현재 타이완군의 병력 규모는 21만 5천명 수준이다 - 기자 주)에 따른 영향을 배제하더라도, (관병권익보장위원회 설치) 이전에 비해 약 30% 정도 사망자가 줄어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첸씨는 아직도 타이완 군의 인권보장 제도에 아쉬움이 많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홍중추 상병 사망사건을 계기로 과거 군내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활동기간 1년의 한시적 기구로 만들었던 '군사원안조사위원회'도 첸씨의 아들을 포함한 수많은 죽음의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군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인권보장 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처음부터 관병권익보장위원회를 국방부 밖에 독립된 외부기관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위원회의 가장 큰 문제는 행정권이 사법권을 주도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또 위원회가 당초 취지와는 달리 변질되었습니다."

지난 2004년 이후 첸씨는 관병권익보장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군에서 명령에 의해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 한 운전병의 사례를 위원회 안에서 제기했다가, 위원회가 첸씨 같은 군 외부 인사는 내부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한 후부터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위원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첸씨는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첸씨는 군 당국과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한 걸음 물러나서 협력하는 관계'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군 안에서도 장교들의 의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서 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비록 위원회에 참석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분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고 협력하고 있습니다."

22사단 총기난사 사건, 28사단 집단구타 사망사건 등 올해 한국에서 잇따라 터진 병영 내 인권유린 사건들에 대해 첸씨는 궁금해 했다. 기자의 설명을 듣던 그가 질문을 던졌다.

"지난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군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의지와 힘이 아주 강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한국에서는 군인들의 인권 상황이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군요. 도대체 당신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기자는 첸씨의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 통역 : 박종순
#첸시에 #황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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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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