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암물질을 면봉에 묻혀... '알아야 산다'

[4·16 인권선언⑤] 인권선언에 우리의 권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등록 2014.12.19 20:53수정 2014.12.19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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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업의 탐욕이 안전장치들을 마구 풀고 있는 지금, 언제 누가 재난과 참사의 희생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생명의 존엄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와 방향을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과 안전위원회에서는 '생명의 존엄과 안전을 위한 인권선언' 운동을 시작합니다. 많은 시민들이 함께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인권선언 운동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기획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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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9일 경기도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사업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환경부 공무원, 경기소방재난본부 등으로 구성된 합동 감식반이 현장감식을 벌이고 있다. 이 사업장에서는 불산 가스가 누출돼 1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하는 등 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모든 국민은 모든 위험에서 안전할 권리가 있다."

지난 5월, 국회의장 직속 헌법개정자문위원회가 발표한 헌법개정안의 한 내용이다. '안전권'을 헌법상의 기본권으로서 명문화하겠다는 취지이지만, 사실 그 전부터 생명·신체의 안전권은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렇듯 안전은 서비스가 아닌 권리다. 국가에게 안전의 보호를 요구할 수 있고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우리의 안전권이 처한 현실을 아프게 드러냈다. 재난 상황이 닥치면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는 국가 시스템이 기민하게 작동하리라는 막연한 신뢰가 있었지만, 허상이었다. 국가의 안전관리체계는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 그러한 체계가 과연 존재하느냐는 의문부터 갖게 되었다.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국가의 관리체계가 대대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안전을 각자, 능력껏 도모해야 하는 딱한 처지에 계속 놓여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는가. 오지 않은 위험을 예방하거나 대비하고, 이미 닥친 위험에 대하여는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가. 개개인의 의식과 능력은 차치하고라도 각자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권리는 온전히 보장되어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마땅히 '우리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위험에 대해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알 수 없는 위험에 대하여는 예방하고 대응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 존재하는 위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먼저 거주지의 위험을 보자. 2013년에만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총 87건이나 있었고 8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올해도 2월에 남양주에서 일어난 빙그레 공장 암모니아 가스 누출사고(1명 사망, 2명 부상)에 이어 최근 수원에서 일어난 삼성 공장 폐수 누출 사고(1천여 마리의 물고기 폐사)까지, 화학물질 노출로 인한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거주지 인근에 위치한 공장에서 어떠한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유통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기업들이 영업 비밀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먹거리의 위험은 어떠한가. 먹거리의 안전과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가 GMO(유전자 조작 생물)이다. GMO의 위험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우려와 경고가 전해지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어느새 세계 2위의 GMO 수입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국내 식품 기업들이 GMO를 사용하고 있는지, GMO 식품의 수입여부를 심사하는 식약처 산하 '유전자변형식품 안정성 심사위원회'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식품 기업들은 관련 법상 공개할 의무가 없다는 이유로, 식약처는 심사의 공정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터의 안전은 또 어떠한가. 반도체 공장에서는 공정의 특성상 20여 종의 발암물질과 30여 종의 생식독성 물질 등 수많은 유해물질에 노출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제보된 백혈병, 뇌종양 등의 중증질환에 걸린 반도체 노동자 수만 해도 200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자신이 취급하는 화학물질의 성분·유해성 등 산업안전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정보들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들이 안전보건에 관한 교육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정보를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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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 직업병 첫 피해제보자 고 황유미 씨의 7주기를 하루 앞둔 3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앞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소속 회원들이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의 죽음을 표현하는 플래시몹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예컨대 삼성반도체에서 하루 수십 차례씩 면봉에 TCE를 묻혀 반도체 칩을 닦았다는 어느 노동자는 TCE가 1급 발암물질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EMC라는 화학물질을 직접 설비에 투여하고 그 설비를 세척하며 EMC 가루가 흩날리는 작업장에서 수 년간 근무한 어느 노동자는 EMC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의 1급 발암물질이 검출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삼성전자가 만든 블로그('삼성반도체 이야기')에는 "임직원 대상 안전보건교육을 철저히 시행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정부기관으로부터 형식적인 교육시행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이 2013년 작성한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대한 종합진단 보고서에는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만 강조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서류에 우선순위를 두지만 정작 각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 있다.

"우리 공장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는 "현재 위치에서 절대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방송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그로 인해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험을 제때 알지 못하였고 스스로의 힘으로 배를 빠져나올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말들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듣고 있다. "공개할 의무가 없으므로 공개할 수 없다"거나 "영업비밀이라서 알려줄 수 없다"는 등의 말들. 우리가 스스로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정보들을 요구할 때, 국가나 기업은 그 정보들을 은폐하며 사실상 "(모른 채)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있다.

삼성반도체와 같은 회사가 "우리 공장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삼성이 자사 공장의 안전을 증명하는 자료로써 가장 자주 인용하는 것이 '인바이런 보고서'다. 삼성은 백혈병 논란이 사회적으로 확산된 2010년, '인바이런'이라는 친기업 성향이 강한 컨설팅 회사에 자체적으로 진단을 의뢰하여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근무환경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삼성반도체 공장의 안전관리 실태를 진단한 또 다른 보고서들이 있다. 2009년 서울대산학협력단 보고서와 2013년 산업안전보건공단 보고서. 두 보고서 모두 삼성의 안전관리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두 보고서의 내용은 아직까지도 전면 공개되지 않았다. 역시나 삼성이 영업 비밀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삼성이 인바이런 보고서를 들먹이며 "공장은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상 공장의 위험을 은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안전권이 있다면 위험에 대한 알 권리도 당연히 있는 것 

헌법재판소는 "사상·의견의 자유로운 표명은 자유로운 의사 형성을 전제로 하는데, 자유로운 의사의 형성은 정보에 대한 접근이 충분히 보장됨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표현'뿐 아니라 나의 안전을 위한 모든 '선택과 행동'의 필수 전제도 관련 정보에 대한 충분한 접근이고, 곧 알 권리다.

그러니, 알아야 산다. 이제부터라도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알 수 없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정보에 대하여는 알려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안전권이 있다면 안전을 위협하는 각종 위험에 대해 알 권리도 당연히 있는 것이다. 4·16 생명의 존엄과 안전을 위한 인권선언에 그동안 알지 못했던 우리의 권리가 포함되어야 하고, 인권선언이 구체적인 힘이 되기를 원하는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반올림 상임활동가, 변호사입니다.
#세월호 #세월호참사 #세월호인권선언 #416인권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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