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첫 외출, '예쁘다'는 말이 기분좋다

[나의 암 극복기8] 항암치료 시작 전... 내가 내게 주는 선물

등록 2015.01.02 18:41수정 2015.01.02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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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을 곱게 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 너무 화려해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패물을 꺼내서 치장을 했다. ⓒ freeimages


화장을 곱게 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 너무 화려해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패물을 꺼내서 치장을 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다 빠져 버릴 머리카락을 정성들여 매만졌다. 머리카락이 뻣세고 숱이 많아서 골치 아팠는데, 지금 생각하니 복에 겨운 투정이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어디 소홀한 곳이 없는지 신발장 거울에 다시 한 번 내 모습을 점검했다. 이만하면 됐다. 누가 보면 파티에라도 가는 줄 알겠다. 수술 후 첫 외출을 이렇게 뻑적지근하고 화려하게 했다.

보험회사에서 일을 보는데, 수술한 지 보름 밖에 안 된 환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일을 보러 오는 사례는 드물다며 창구의 담당 직원이 깜짝 놀란다. 직원의 친절이 보통 사람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일처리를 빨리해 주며 격려도 잊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곱게 차린 내 모습이 아픈 사람 같지 않고 예쁘다고 칭찬도 한다. 비록 인사말일지라도 기분 좋다.

뻑적지근하고 화려했던 첫 외출

점심시간이다. 혼자서 외식하는 일이 거의 없기에 조금 머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오늘 만큼은 먹는 멋도 부려보고 싶다. 귀한 손님이나 접대하러 가던 레스토랑에 갔다. A코스를 시켜서 우아를 떨면서 점심을 포식했다.

이것은 수술을 잘 이겨낸 나에게 주는 상이기도 하고, 앞으로 받아야 되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도 잘 이겨내자는 격려이기도 하다.


집에 오는 길에 성당에 들렀다.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십자가를 바라보며 넓은 성전에 혼자 우두커니 무념무상으로 앉아 있는 것도 꽤 괜찮다. 집에 오니 무척 피곤하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했다.

'잘 했어, 오늘 아주 잘 했어.'

사흘 뒤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한다. 주위에서 항암이 엄청 힘들다며 위로인지 엄포인지 모를 얘기를 많이 해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담한 척 했지만 혼자 있으면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차라리 아무 소리도 안 듣고 부딪히는 게 좋을 것을. 나는 혼자 또 나에게 주문을 건다.

'까짓 거 아무것도 아닐 거야. 괜찮아, 괜찮아.'

이럴 때 옆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강아지라도!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머리카락이 빠질 때를 대비해서 모자를 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섰다. 모자 두 개를 사고 찬거리를 좀 샀다. 항암을 시작하면 아이들이 엄마 손에 밥 얻어먹기는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 반찬을 이것저것 만들었다.

가슴에 통증이 대단하다. 목은 누가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하다. 입술을 깨물어도 신음이 절로 나온다. 수술한 쪽 팔은 쓰지 말라고 했는데, 피곤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음식을 하느라고 무리를 했나보다. 이런 미련 곰탱이 같으니라고! 약상자에서 진통제를 찾아들고 망설이다가 그냥 참기로 했다. 이겨야 겠다는 오기가 생긴 것이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더니, 첫 번째 항암치료 받는 날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나와 병원에 동행하기 위해서 시골에서 남편이 상경했다. 며느리가 아픈 줄 모르시는 97세의 시아버님께서는 아들의 잦은 서울 행에 "또 서울 가? 언제 와?"하셨단다. 항암이 그냥 항암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출근하면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녀오겠습니다" 대신 "엄마 항암 잘 받고 오세요"한다. 나 역시 밝은 표정으로 응대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주황색 주사를 맞으려고 주황색 선을 따라왔구나

여태껏 다니던 일반 진료실과는 달리 암 병동이 따로 있다. 암 병동으로 들어서는 기분이 묘하다. 들러야 하는 부서가 적힌 종이를 들고 일부러 바닥만 내려다보며 초록색 선을 따라 갔다. 나는 또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초록색은 희망이야, 초록색은 희망이야!'

접수대 앞에 도착하니 담당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다. 바짝 긴장한 나를 풀어 주려고 말을 건다. 오는데 춥지 않았느냐? 음식은 잘 먹었느냐? 기분은 어떠냐? 는 등등.

그래도 쉽사리 긴장을 풀지 못하는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며 애를 쓴다. 어느 순간 나는 간호사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때 하는 스킨십이야말로 보약 중에 보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분이 약간 느슨해지는 것을 보고서야, 치료 잘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제일 먼저 약국에 들러서 약을 받아서 먹었다. 약 먹고 30분 후에 주사를 맞으란다. 그 사이에 혈압 체크하고 몇 가지의 문진이 있었다. 이번에는 주황색 선을 따라 주사 맞을 방을 찾아서 걸었다.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까지 가는데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안 타고 계단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될 수 있으면 더 먼 곳에 주사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시간을 더 끌 수 있을 테니까.

원래 말수가 적은 남편은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 오늘따라 입을 아예 봉한 것 같다. 하기야 지금 이 시점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주사실 앞 의자에 앉았다. 간호사가 부른다. 태연을 가장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고 웃으며 주사실로 들어갔다. 주사 놓는 데스크에 각기 다른 색깔의 액체가 든 네 개의 주사기가 나란히 누워 있다. 그 중에 유독 눈에 띄는 크고 진한 색깔 하나, 주황색!

하필이면 왜 그 때 그 웃기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 상황에 왜 피식 웃음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아, 주황색 주사를 맞으려고 주황색 선을 따라 왔구나.' 하는.
#화려한 외출 #스킨십 #주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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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e-mail : ok_0926@da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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