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시설 가득했던 인천, 핵 폐기장 건설 거절 선언

[기획연재] 되돌아보는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 철회 운동③

등록 2015.01.08 18:33수정 2015.01.0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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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과 인접해 있고, 많은 일자리가 있어,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 쉽게 정착했다가 떠날 수 있는 도시로 인식돼왔다. 기회의 땅이지만,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은 도시는 아니었던 셈이다. 돈 벌고 출세해 더 좋은 환경의 서울로 가거나, 고향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도시로 인천은 인식됐다.

그래서 '주인 없는 도시'란 오명을 받기도 했다. 중앙정치는 인천을 찬 밥 대우했다. 이는 지금도 이어진다. 부산 아시안게임과 비교되는 인천 아시안게임 국비 지원, 수도권매립지로 인한 주민 피해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인색한 정책, 화학발전소와 엘엔지(LNG: 액화천연가스) 인수기지 등 각종 유해하고 위험한 시설 입지와 확장 정책은 대표적인 예이다.

현 정부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추진을 이야기하고, 부산과 광양만 중심의 투-포트(two-port) 항만정책을 지속해, 인천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디다. 그렇다고 인천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힘은 87년 민주항쟁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 철회 운동이다. 20년 전 12월 22일은 정부가 굴업도 핵 폐기장을 지정한 날이다.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과 이를 철회하기 위한 인천시민들의 운동을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당시 분출된 인천시민들의 저력을 다시 상기해보면서 인천이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산적한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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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 25일에 열린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철회를 위한 1차 인천시민 궐기대회’ 참가자들이 집회 후 인천시민회관 일대를 행진하고 있다. ⓒ 한만송



인천시민이 핵 폐기장에 민감하게 대응한 이유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는 집단민원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으로 여겼던 굴업도를 핵 폐기장으로 지정했다(관련기사 : 문민정부가 굴업도를 핵 폐기장으로 지정한 이유).

인천은 외지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 지역 정체성이 없는 도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교육·환경·주거 조건 등도 수도권의 다른 도시보다 열악했다. 특히 굴업도는 1995년 이전까지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여건을 놓고 볼 때 인천시민의 반발이 상대적으로 약할 것이라고 정부는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상일뿐이었다. 인천시민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는 인천의 시민운동이 막 태동하는 시기라, 시민운동의 영향력도 크지 않았다. 어떤 동력이 굴업도 핵 폐기장 저지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아래 핵대협)'의 활발한 활동과 여러 위험시설이 인천에 집중돼 있던 것이 주요 동력이자 요인으로 분석된다.

당시는 대구지하철 도시가스 폭발 대참사로 인해 인천에서도 대규모 위험 시설에 대한 걱정이 쏟아져 나온 때였다. 지방자치제도를 본격 실시하면서 개별화돼 있던 시민들의 우려는 응집력과 폭발력을 얻었다.

1995년 7월 26일 서구 가좌동 농약 원료 제조업체인 진흥정밀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6명이 목숨을 잃고 6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폭발사고로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날아가고, 파편이 어지럽게 뒹구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또한 사고현장에서 500m 떨어진 대우전자 건물 지붕이 내려앉고, 1km 떨어진 주택가의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인천은 공업도시로 부평·주안 수출 공단과 그 주변의 지방 산업단지가 무분별하게 혼재돼있어, 주민들의 불안감이 많았다. 특히 화약고라 할 수 있는 한국화약 공장이 남동구 고잔동에 있었다. 이 공장의 면적은 726만여㎡에 달했고, 조명신호탄·연화류·농약 등을 생산하는 각종 설비가 들어서 있었다. 이 공장은 사고 위험도가 높고 실제로 사고가 빈발했는데, 반경 1km 안에 주거지역이 있었다.

동양화학 유공의 인천 저유소 등, 남구 학익·용현동 일대 대규모 위험시설도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학익·용현동 일대엔 위험물질 제조·취급 시설이 99만여㎡에 걸쳐 밀집돼 있었다. 그럼에도 인근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 대학 등이 위치해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했다.

연안부두 일대 유류가스 저장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중구 항동·북성동 일대엔 당시 유공·호남·쌍용 등 국내 굴지의 정유회사 유류가스 저장시설이 밀집돼 있었다. 호남정유 인천 저유소는 휘발유·벙커유·항공유·크실렌 등을 16만 9000여킬로리터 저장할 수 있는 탱크 62기가 있었다. 연안부두 일대의 위험시설물은 초대형인데다 폭발력이 강한 LNG 저장탱크와도 인접해있어, 사고 위험성이 높았다.

여기다 율도의 한화에너지는 다른 위험시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규모였다. 당시 위험물 저장용량은 215만4000여킬로리터로 인천지역의 다른 위험물 저장시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두 배나 많았다. 수도권매립장 역시 시민들을 불편하게 했다. 지금도 문제가 되는 침출수 오염은, 당시엔 더 심각했다.

대규모 위험·혐오시설물 입지에 자신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에 인천시민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95년부터 본격화한 지방자치는 이러한 불만을 폭발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인천의 최대 연대조직체인 '핵대협'

'핵대협'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인천 최대 연대조직체로 기억될 만큼, 대다수 지역 인사가 참여했다. 정치적 진보·보수를 떠나 다양한 정치성향의 인사가 참여했고, 이는 덕적도 주민과 함께 굴업도 핵 폐기장 저지 투쟁의 동력이 됐다.

'핵대협'은 굴업도 사진엽서를 제작해 시민들에게 배부했다. 이 엽서에는 항공 촬영한 굴업도 전경과 '굴업도는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보석 같은 섬입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핵대협'은 엽서 10만장을 제작해 엽서 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굴업도 사진을 보고 느낀 점을 엽서에 써 친지나 이웃, 연인, 스승, 제자는 물론 지방의원,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등에게 보내게 했다. 지역의 교회, 단체 등에서 큰 호응을 얻어, 수백에서 수천 장까지 구입하겠다는 주문이 잇따르기도 했다.

당시 '핵대협' 간사를 맡았던 정희윤씨는 "정부는 굴업도가 (핵 폐기장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각종 보고서와 자료, 과학적인 근거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 등, 230만 인천시민을 무시했다. 이에 시민의 정서에 호소하기 위해 보석처럼 아름다운 굴업도 사진을 담은 엽서 보내기 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핵대협'의 활동은 인천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시민 수백명이 '핵대협' 사무국에 성금을 보냈다. 굴업도 엽서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차로 인쇄한 10만장이 순식간에 동이나 10만장을 더 찍었다.

'핵대협'은 1995년 봄이 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2월 25일 '굴업도 방사성폐기물 부지 선정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원자력연구소와 공동주최했으며, 정부의 핵 폐기장 지정·고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3월 25일에는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철회를 위한 1차 인천시민 궐기대회'를 인천시민회관 광장에서 열었다. 시민과 학생 등 200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집회 후 무려 3시간 동안 시내를 걸으며 대 시민 홍보에 나섰다. 집회가 끝날 때 오히려 참가 인원이 늘어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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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월 20일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린 3차 궐기대회 후 대회 참가자들과 경찰이 충돌했다 ⓒ 한만송


높아진 투쟁수위... 학생 동맹휴업, '핵대협' 인사들 단식

정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인천지역 대학생·노동자·시민 등 3000여명은 4월 29일 동인천역 광장에서 2차 궐기대회를 열고 굴업도 핵 폐기장 건설 계획 철회를 촉구했다. '핵대협' 인사들은 국회에 '지역발전기금 500억 원 조성 과정과 기금 사용처가 적합한지 진상조사를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럼에도 불구, 정부가 굴업도 부지 매입과 지질조사에 들어가는 등, 핵 폐기장 건설에 본격 착수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민단체와 대학생들이 각각 단식농성과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인천부천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아래 인부총련) 소속 인천대·인하대 등 8개 대학 학생들은 긴급총회를 열고 5월 18일부터 3일간 동맹휴업에 돌입했다.

박영복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아래 인천경실련) 집행위원장 등 '핵대협' 인사 6명은 5월 17일 인천경실련 사무실에서 '23일로 예정된 지역발전기금 500억원 사용과 관련한 공청회 취소, 티브이 토론회 개최,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20일까지 시한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16일에는 대학생들이 인천시청에 진입해 농성을 벌였다.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건설 결사 저지를 위한 청년학생 결사대'라고 밝힌 인천대와 인하대 학생 11명은 이날 정오께 시청 2층 시장실에 진입했다. 소화기 분말가루를 뿌리며 쇠파이프로 유리창과 컴퓨터 등 기물을 부순 뒤 4층 옥상으로 올라가 1시간 40분 동안 농성했다. 경찰은 2개 중대를 투입해 이들을 연행했고, 9명이 구속됐다.

민주주의민족통일인천연합 의장 등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 대표 25명은 중구 답동 가톨릭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핵 폐기장 지정 철회와 연행ㆍ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렇게 투쟁수위가 높아져갔지만, 정부는 지역발전기금 500억원 출연을 약속하며 '덕적발전복지재단' 설립을 강행했다. 정부는 '재단이 만들어지면 주민 1가구당 3000만원씩 돌아간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주민을 이간질했다.

'핵대협'은 5월 20일 동인천역 광장에서 3차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날 학생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경찰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이 다치고, 일부 학생은 구속됐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굴업도 #굴업도 핵폐기장 #핵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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