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자찬을 경계했다"?... MB 마크맨의 회고록 검증

이명박캠프 출입기자가 쓴 <대통령의 시간> 독후감

등록 2015.01.29 19:34수정 2015.01.29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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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책을 쓰면서 이런 원칙을 갖고 있었다. '사실에 근거할 것, 솔직할 것, 그럼으로써 후대에 실질적인 참고가 될 것.'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월 발간될 <대통령의 시간> 후기에 쓴 회고록 집필의 원칙이다. 기자는 8년 전 이명박캠프를 취재했고, 그가 당선된 뒤에는 청와대를 출입했다. 회고록이 정말 원칙에 충실했는지 더 관심을 둔 이유다.

이 전 대통령은 이런 말도 했다.

"무엇보다 자화자찬을 경계했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다 보면 굳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고 내 입으로 말하기 거북한 일도 있다. 특히 의도하지 않더라도 내가 한 일들이 미화되거나 과장되어 기억될 위험이 있다. 국정 철학을 공유하면서 함께 일했고 따라서 이해관계가 겹치는 참모들과 과거사를 돌아보다 보면 스스로 집단적 자아도취에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기우였다. 얘기가 한곳으로 흐른다 싶으면 참석자 가운데 누군가는 제동을 걸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784~785 페이지)

그럼에도 이 전 대통령의 저서 곳곳에는 냉정하게 기술해야 할 자신의 과거사를 자신의 시각에서 아주 새롭게 재구성한 부분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를 사기극의 피해자로 전락시킨 BBK나 재임 중의 민간인 사찰, 내곡동 사저 특혜, 자원외교 논란 등은 아예 언급도 안 했다.

그럼에도 사실 왜곡이 심했다. 특히 대통령이 되기 전의 행적을 다룬 1장('나는 대통령을 꿈꾸지 않았다')이 그랬다.


대법원이 확정한 죄 저질러 놓고도 합리화 급급 

96년 4월11일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서게 된 과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짧게 요약했다.

"종로에서의 화려한 승리는 기성 정치권의 나에 대한 견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야권은 물론 14대 대선 TV 찬조 연설과 서울시장 경선 과정에서 비롯된 당내 반감의 잔재도 남아 있었다." (79 페이지)

'기성 정치권의 견제'는 당선 5개월 만에 "법정 선거비용(9500만원)의 7배가 넘는 6억8000만 원을 선거판에 뿌렸다"는 선거캠프 참모 김유찬의 폭로를 말한다(1996년 9월 10일).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진짜 문제는 선거비용 초과 지출이 아니라 폭로 기자회견을 한 김씨를 그의 비서관들이 비행기표와 1500만 원을 주고 해외로 빼돌린 사건이었다. 김씨는 출국 전 자신의 폭로를 번복하는 편지를 썼고, 이 전 대통령은 9월17일 여당 당사에서 이 편지를 공개해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 데 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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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선거법 위반'을 둘러싼 정치권 공방을 보도한 <조선일보> 1996년 9월 18일자 기사 ⓒ 조선일보 PDF


그러나 공소시효 만료를 약 보름 앞두고 김씨를 도피시킨 비서관들이 검찰에 체포되고 김씨가 귀국하며 사건은 다시 반전된다.

"야권은 물론 여당 내 반감의 잔재도 남아 있었다"는 이 전 대통령의 말은 사실일까? 이 전 대통령의 거짓말로 오히려 곤경에 처한 쪽은 그를 감싸고 돈 여당이었다.

강삼재 사무총장이 "당이 오판해 국민들에게 혼선을 가져오고 불신을 가중시켰다는 점에서 사과한다"고 말했고, 김철 대변인도 "그동안의 발언과 대응에 대해 국민회의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낯을 붉혀야 했다.

9월 24일 이 전 대통령은 비판 여론에 아랑곳없이 "가까운 직원 두 사람이 구속된 것은 충정의 심정에서 뜻밖의 일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며 "나를 믿어도 된다. 종교인으로서 약속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사실과 다른 것이 나오면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러나 그의 자진탈당을 바랐던 신한국당 지도부의 의중은 다음날 이홍구 대표가 기자들에게 한 말로 압축된다. "너무 오래 추(醜)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

그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결국 나는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당해 1심과 2심 재판에서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하는 벌금형을 받았다. 나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의원직에 집착하고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중략) 당시 관행처럼 재판을 지연시켜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국회의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치 1번지인 종로에서 화려하게 당선된 것에 미련을 둘 일은 아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일찌감치 그만두고 새 출발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80 페이지)


이 전 대통령은 혐의가 드러난 지 1년이 되는 1997년 9월 11일 선거법 위반 및 범인도피죄가 적용돼 당선무효형(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2월 3일에는 갑자기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고 의원직을 사퇴했다.

의원직 사직서를 들고 온 그에게 김수한 국회의장은 "정치 경험이 짧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시간을 끌라. 다른 국회의원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말렸지만 이 전 대통령의 선택이 '옳았다'.

서울시장 경선을 불과 1주일 앞둔 항소심에서도 당선무효형이 유지됐다. 한나라당 후보가 되고 서울시장이 돼도 당선무효형이 나면 시장 자리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그는 "서울고법의 선고는 정치적 판결로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라고 반발하면서도 서울시장 경선을 포기했다. 1999년 4월 9일 대법원이 이 전 대통령의 유죄를 확정했지만 2000년 '밀레니엄 광복절' 특사에 포함돼 정치 재개의 길이 열렸다.

'원칙을 지키는 선거'도 '새로운 정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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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서울시장 당선으로 재기한 이 전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일생일대의 승부를 벌였다.

회고록에서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정책선거의) 원칙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경선 과정에서 나는 수많은 네거티브 공격을 받았다. 그로 인해 선거 판세가 불리해지자 주변 참모들은 '우리도 네거티브 전략으로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네거티브 유혹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며 출마한 사람이 기성 정치의 관행을 똑같이 답습한다면 출마한 의미가 없다고 봤다. 또한 당내 경선이 네거티브 전으로 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경선 과정에서 수많은 네거티브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초심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101 페이지)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뒤 김수환 추기경이 "이 후보께서 그렇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상대를 공격하지 않고 참는 모습을 보며 많이 놀랐다"고 칭찬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칙을 지키는 선거'도 '새로운 정치'도 없었다.

2007년 초부터 그는 "나처럼 애를 낳아봐야 보육을 얘기할 자격이, 고3을 4명 키워봐야 교육을 얘기할 자격이 있다"(1월20일 대전발전정책포럼 창립대회 특강)는 말로 '독신자' 박 후보를 자극했다. 박근혜캠프 사람들은 이 전 대통령의 BBK 역할론과 도곡동 땅 차명재산 의혹 등을 고리로 본격적인 검증에 나섰다.

이명박캠프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캠프 대변인들의 단골 소재는 지금도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최태민 의혹'이었다. 경선 끝날 때까지 매일 3~4건씩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논평이 쏟아졌다. 심지어 일부 성명에는 최근의 청와대 문건 파동을 예견(?)하는 내용까지 들어있다.

"박근혜 후보의 삶과 정치는 최태민씨와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다. (중략) 일각에서는 박 후보가 집권하면 최태민 일족이 집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식이라면 청와대도, 행정부도, 산하기관도, 집권당도 최태민의 일족이 장악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야말로 최태민의 유훈 정치가 우려된다. 국정 최고지도자로서 박 후보의 판단력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7월25일 진수희 대변인)

"도대체 박근혜 후보에게 있어 권력형 비리 전문가 최태민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이기에 박후보의 20대 시절부터 근 30년 가까이 최태민과 그 일족들이 박후보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박후보와 관련된 기관의 요직을 차지하며, 비리의혹을 양산했는가! 도대체 어떤 사이이기에 최태민과 그 일족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천벌을 받을 일"이라며 한사코 감싸기만 하는가! 누구 말대로 박후보는 최씨의 로봇이었나!" (8월3일 박형준 대변인)

이 전 대통령의 '원칙'을 거스른 캠프의 참모들은 장관이나 청와대 기획관으로 중용됐다.

그해 6월 17일 박 대통령과 최태민 목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주장하는 비방 기자회견의 배후에는 캠프의 특보와 실세 의원의 보좌관이 있었다는 사실이 훗날 검찰 수사로 드러나기도 했다.

미 의회 결의안, '이례적인' 게 아니라 '의례적인' 관행

회고록에서 대통령 당선된 뒤 미국 정부의 '환대'를 필요 이상 강조한 부분도 논란거리다.

"2008년 2월 7일, 미 상·하원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축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미 의회가 한국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공식 결의안을 채택한 것 역시 처음이었다. 특히 미 상·하원이 동시에 결의안을 채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190 페이지)

미국 의회에서 외국에서 선거에서 이긴 집권당이나 국가수반에게 당선 축하 결의안을 채택하는 것은 '이례적인' 게 아니라 '의례적인' 관행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우파 사르코지가 집권하든 좌파 올랑드가 집권하든 당선 축하 결의안을 채택했고, 98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할 즈음에도 미국 상원이 외환위기의 성공적인 극복 노력을 인정하고 한국의 정부수립 50주년을 축하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기술은 "전임 정부들의 대미 외교에는 문제가 많았는데 내가 정상화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됐다.

이 전 대통령은 후기에서 "(자화자찬에 빠지지 않도록 참모들의) 질문은 집요했고 지적은 신랄했다. 듣기 좋은 말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더러 들기도 했지만 참고 호응했다. 돌이켜보면 이들의 견제와 지적이 없었더라면 이런 기록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직은 고마움을 표시할 때가 아닌 것같다. '국민성공' 시대와 747 공약으로 장밋빛 미래를 속삭인 그의 허언을 기억하는 국민의 서슬이 아직 시퍼렇다.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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