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못 살아서 싫어"... 베트남인들의 '직설화법'

[우리 가족의 베트남 여행기 ③] 도이머이 이후 달라진 베트남의 얼굴

등록 2015.02.04 08:35수정 2015.02.04 15:13
6
원고료로 응원
지난 1월 11일부터 23일까지 13일간 가족과 함께 휴가차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이가 이끌고 부모가 따라가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여행이었지만, 아이가 한 뼘 더 성장한 모습이 보여 뿌듯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베트남 여행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들려드리려 합니다. - 기자말

a

지금 베트남은 미국과 동맹국? 관광기념품 가게에는 베트남을 상징하는 노란별과 미국 성조기 문양을 넣은 갖가지 물건을 볼 수 있다. 지금 베트남에서는 두 나라의 '역사적 앙금'을 거의 느낄 수 없다. ⓒ 서부원


누군가는 베트남을 두고 '사돈의 나라'로 부르며 친근함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낯 뜨겁고 생경한 언사처럼 들렸다.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사회주의 국가라는 막연한 거리감이 아직 남아 있는 탓이다. 그리 오래지도 않은 반 세기 전, 미군의 용병으로 참전해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부끄러운 역사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주변 사람들이 저렴하고 볼거리 풍성한 최고의 관광지라고 치켜세우며 베트남 관광을 떠날 때, 그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도 그래서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돈을 맞바꾼 비정한 나라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관광'을 간다는 자체가 무척이나 뻔뻔하게 느껴졌다. 우리 가족이 베트남에 가기로 결정한 다음부터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도 바로 이것이었다. 과연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온 관광객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a

한국을 '정말 사랑한다'는 열차 승무원 하노이에서 중부지방의 도시 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승무원은 몇 마디 배운 우리말을 섞어쓰며 내내 우리 가족에게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중간 정차역에서 둘째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며 포즈를 취했다. 그도 어리다고 할 만큼 젊었다. ⓒ 서부원

베트남어 인사말인 '신짜오' 외엔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우리에게 택시 기사도, 식당 주인도, 시장 상인도 모두 서툰 영어로 매번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오셨죠?" 외모만으로는 일본인, 중국인 등과 쉬이 구별이 어려울 텐데도 늘 그랬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테지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환했다. 마치 가까운 친구라도 만난 듯 거리낌 없이 반가운 얼굴이었다.

이따금 어설프나마 우리말로 '한국을 정말 좋아한다'며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넬 때도 있었다. 대개 앳된 학생들과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다. 케이-팝과 드라마의 영향일 텐데, 초면에 생뚱맞게 배우 김수현을 직접 본 적 있는지를 묻기도 했다. 우려했던 우리와의 '역사적 앙금'이 전혀 없어 보여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역사를 이렇게 빨리 잊어도 되나 싶어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그들에게 과거는 그저 지나간 시간으로 기억되는 듯했다. 프랑스, 미국 등 내로라하는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식민지로는 세계 최초로 승리를 거둔 빛나는 역사를 단절적으로 기억할 뿐, 지금 그들의 삶을 굳이 엮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 오지랖 넓게 베트남 전쟁에 대해 슬쩍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그들은 마치 똑같은 대본 외우듯 이렇게 말했다.


"미국과의 전쟁, 잘 알죠. 그러나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그저 우린 앞만 바라보고 갈 뿐이에요."

참혹했던 과거사에 대해 그야말로 '쿨'한 사람들이다. 관대함은 승자의 몫이라고,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와,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으로서의 뿌듯함과 당당함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다들 되레 이제 와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냐는 눈치였다. 적이 놀라워 주제넘을지언정, 통역만 된다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선생의 일갈이라도 들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저 '쿨'함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우선 지금 베트남엔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젊은 세대일수록 남북 통일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상대적으로 더 낮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2014년 현재 베트남 인구 통계에 따르면, 베트남은 9천만 명이 넘는 인구 중 평균 연령이 고작 28세에 불과하고, 40세 이하의 인구가 70%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다.

a

참파왕국 유적지에서 만난 관광가이드 청년 10대 소년 마냥 앳되어 보이는 관광가이드. 베트남은 어딜 가든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 서부원


하긴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곳을 다니며 버스 차창 밖으로 본 농촌에서도 당최 나이 든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외려 어느 농촌에 가든 해맑게 어울려 뛰노는 아이들만 바글거린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광활한 무논(물이 차 있거나 쉽게 물을 댈 수 있는 논)이 펼쳐지는 베트남 농촌의 풍광은 언뜻 봐선 우리와 구별하기 어렵지만, 오직 그것만이 이미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져버린 우리 농촌과의 확연한 차이를 깨닫게 해 준다.

그러고 보니, 13일간의 짧지 않은 여행 중에 만난 수많은 베트남 사람 중에 나보다 나이 많은 이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호텔에서도, 식당에서도, 기차역과 공항에서도 온통 젊은이뿐이고, 심지어 숙련된 노하우가 필요한 택시 기사와 관광지의 가이드조차 하나같이 앳됐다. 내게 '형님'은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호이안에서 만난 시클로를 운전하는 아저씨와 가죽 공방의 주인 어른 정도에 불과했다.

또 하나, 1980년대 말 본격 추진된 '도이머이(Doi Moi)'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듯하다. '도이머이'란 '혁신'이라는 뜻으로, 시장 경제 체제를 수용한 베트남식 개혁 개방 정책을 일컫는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경제 성장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학교 교육에까지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고 한다. 역사 교과서에서 동맹국인 북한보다 적성국에 가까운 한국에 대한 기술이 우호적으로 바뀐 것이 그 예다. 참고로 베트남은 필리핀, 러시아, 북한 등과 함께 국정 교과서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다.

도이머이 이후 달라진 베트남의 '시선'

기존의 '남조선'을 '한국'으로 기술하고, 한국을 후진 농업국가에서 세계적인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신흥 공업국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바람직한 경제 성장의 모델로 치켜세워 한국이라는 이름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엘리트를 대거 유학 보냈던 '오랜 동지'의 나라 북한이 한국에 밀린 형국이다. 오로지 경제력 때문이다.

지금의 차이는 더욱 현격하다. 베트남 국내선 비행기에서 만난 한 나이 지긋한 노신사는 '북한은 못 살아 싫고, 한국이 최고'라며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는 젊었을 때 북한에 유학을 가서 공부한 경험이 있다고도 했다. 순간, 호찌민이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을 재건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해외로 유학을 보낸 엘리트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봤다. 물론, 한국인인 우리와의 대화의 끝은 늘 그렇듯 한국 드라마와 배우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a

하노이 중심부에 세워져 있는 레닌 동상 과거사에 대해 그야말로 '쿨'한 베트남의 수도 한복판엔, 정작 러시아에선 넘어뜨린 레닌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찾는 발길이 뜸해 을씨년스럽기만 한다. 이런 걸 두고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하나. ⓒ 서부원

중부 지방의 대도시인 다낭의 참파 박물관에서 만난 젊은 가이드 역시 북한에 대한 '비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한때 호찌민이 북한의 김일성을 찾았던 사실을 언급하자,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며 북한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천 년 참파왕국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에다 유창한 영어까지 구사하는 그에게 참혹했던 자국의 현대사와 '의리'는 굳이 꺼낼 필요 없는 낡은 과거일 뿐이었다.

중국 덩샤오핑이 내건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의 실용주의 정책)'을 연상시킬 만큼, 지금 베트남은 경제가 유일한 '선(善)'이다. 100여 년 동안 식민 통치를 했던 프랑스든, 반세기 전 10여 년 넘게 전쟁을 벌인 미국이든,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나라가 지금의 베트남이다. 한국인에 대한 편견을 우려했던 우리 가족의 고민은 말 그대로 '기우'였다. 그들에게 저지른 과거의 부끄러웠던 역사를 지워낸 건 한류 바람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요컨대, 베트남의 역사를 굳이 양분한다면, 응우옌 봉건 왕조를 무너뜨린 1945년도,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난 1954년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1975년도 아닌, '도이머이'가 천명된 1986년이 기준 삼아야 될 듯하다. 언뜻 형용모순 같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 체제'를 표방하며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는 베트남의 현실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설득력 있다.

'원죄' 같던 고민은 시나브로 사라졌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찜찜했다. 사람들의 과거사에 대해 한없이 '쿨'한 역사 인식과 경제 성장 제일주의는 과연 베트남을 어디로 이끌고 가게 될까 궁금해졌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부자 나라' 한국은 베트남의 미래가 될까. 한국으로 유학 가는 게 꿈이라는 한 젊은이의 당찬 포부를 듣고서도 한국인으로서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그저 내 '삐딱한' 성격 탓일까.

#베트남 여행기 #베트남 전쟁 #도이머이
댓글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