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운이 그리워요? 마당엔 벌써 왔지라잉

[경상도 여자의 전라도 생활 이야기] 냉이무침으로 맛보는 봄

등록 2015.02.07 17:16수정 2015.02.0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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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어린 냉이고 오른쪽이 청소년 냉이다. 둘의 색이 확연하게 다르다. ⓒ 김윤희


봄이 찾아왔나 보다. 입춘이 시작된 뒤부터 얇은 얼음 막으로 뒤덮여 있던 연못도 속을 드러내 보였다. 아침마다 마당으로 몰려오는 새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보니 겨울의 끝자락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작년 이맘때쯤 평소에 날아드는 새들의 수보다 더 많은 새들이 마당으로 찾아들었다. 겨울 내 파라칸사스의 붉은 열매를 다 먹어치워 마당의 생기를 없애버리더니 이제는 시금치를 먹기 위해 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늦게 몰려오긴 했다. 종이 다른 새들이 몰려와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 통에 아침부터 바깥이 시끄러워 일찍 잠에서 깼다. 

새가 날아와 다 먹어버리기 전에 나도 시금치를 좀 먹어야겠다. 장갑을 끼고 한 손에 호미를 다른 손에 바구니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내가 텃밭으로 다가가자 새들이 큰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금치의 뿌리는 먹지 않는다. 뿌리가 달린 시금치를 팔지 않아서 먹을 수도 없지만 집에서 길러 먹는 이들도 시금치 뿌리는 먹지 않았다. 뿌리에 묻은 흙을 손질하기가 번거롭기 때문이다. 나도 뿌리가 달린 시금치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룸메이트 집으로 처음 놀러간 날, 그는 시금치나물을 내어놓았다. 평소에 내가 먹던 시금치와 달리 뿌리가 달린 시금치는 식감도 살아 있고 뿌리는 오래 씹으니 달기까지 했다. 서울로 올라와 자꾸 시금치나물이 먹고 싶어 반찬을 해 먹었지만 뿌리가 잘린 시금치는 별 맛이 없었다.

귀촌 후에도 시금치나물을 무쳐 먹긴 했다. 그러나 매번 너무 많이 데쳤다, 간이 안 맞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절을 한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요게 냉이랑께? 잘 보랑게... 요것이어 요거"

다듬어진 냉이와 시금치를 부었더니 소복하다. ⓒ 김윤희


나는 다시 시금치나물에 도전하기로 했다. 뿌리가 잘리지 않게 시금치를 조심스레 뽑았다. 봄이 왔는데 겨울 반찬인 시금치만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냉이를 캐기로 했다. 캔 시금치를 바구니에 담고 냉이를 찾아다녔다.

냉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없다. 2월이면 냉이가 마당 곳곳에 자라나 그저 캐기만 하면 먹을 수 있다고 룸메이트가 말했었다. 이상하다. 냉이가 사라졌나?

"여거도 냉이, 저거도 냉이여. 와 없다냐잉?"
"그건 냉이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냉이 같지가 않아요. 색깔도 이상하고."

내 말을 들은 룸메이트가 땅을 헤집더니 공중으로 뿌리가 긴 풀을 들어올렸다.

"이놈 뿌리가 잘 생겼네잉. 이래도? 잘 보랑께. 냉이랑께? 잘 자라는 양귀비를 뽑아내지 말고잉. 잘 보랑게. 요것이어 요거."

내가 아는 냉이의 생김새는 연두 빛을 띠고 크기도 작고 뿌리도 짧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린 냉이는 잎이 자주 빛을 띠고 크기도 컸다. 또 뿌리가 길고 굵었다. 그의 말대로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냉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죄다 냉이였다는 것이다. 땅 위로 올라오는 모든 것들은 닮아서 다 거시기가 거시기 같다.

금방 싹이 올라온 냉이들은 연두 빛을 띠지만 추위를 이겨내며 자란 냉이들은 잎의 수도 많고 크기도 크고 색도 자주 빛이다.

나는 룸메이트가 알려준 대로 냉이를 찾아내 뿌리가 떨어지지 않게 천천히 위로 끌어당겼다. 금세 바구니 위로 냉이가 소복하니 쌓였다. 바구니를 들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 갔다.

햇살을 등지고 마당에 주저앉아 바구니에 담긴 시금치와 냉이를 부어놓고 다듬었다. 흙을 털어내고, 뿌리에 붙은 이물질도 제거하고, 시든 잎도 떼어내다 보니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 사이 해는 구름 뒤에 숨었고 찬바람이 불어 등이 시렸다. 그래도 봄이라면 버티고 싶었지만 공기는 점점 차졌다. 급히 안으로 들어가 다듬어진 냉이와 시금치를 욕실 바닥에 쏟아놓았다.

"정말 많죠?"
"많이 하긴 했는디 데치고 나믄 절반도 안 되야."

나물로 가득한 밥상... 내일은 고깃국을 끓여야지

시금치 무침과 냉이무침이다. 냉이는 데쳤더니잎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데친 후에 양이 3분의 1로 줄었다. ⓒ 김윤희


찬물에 시금치와 냉이를 여러 번 헹군 뒤 난로 위에 끓고 있는 물통 속에 넣었다가 곧바로 빼내었다. 오래 데치게 되면 영양도 없고 향도 사라지고 흐물흐물거려 식감이 좋지 않았다. 씹는 즐거움을 맛보려면 7초 안에 시금치와 냉이를 건져내야 한다.
  
시금치나물은 작년 겨울에도 먹은 반찬이었다. 요리를 한 사람은 나였고 룸메이트가 맛을 보더니 다시 젓가락을 갖다 대지 않았다. 참기름을 넣어 시금치의 향과 맛이 사라졌고 긴 시간을 데쳐 시금치의 식감이 사라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약간의 마늘과 소금만 들어가야제. 다른 것이 들어가믄 맛이 안 나제."

나물의 식감을 살리기 위해 넣고 건져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5초 넘기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찬물에 헹궈 먹기 좋게 잘랐다. 이때, 김치를 썰듯 토막을 내면 안 된다. 길쭉하게 손으로 김치를 찢듯이 나물도 길게 쭉 찢어야 한다. 줄기와 뿌리를 동시에 맛볼 수 있도록 말이다.
 
냉이는 된장과 마늘만 넣고, 시금치는 소금과 마늘과 통깨를 넣고 맨손으로 세게 주물렀다. 간이 나물에 베이도록 하려면 힘주어 주무를 필요가 있었다.

지금 봄의 기운을 느끼고 싶다면 전통시장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다. 전통시장으로 가서 땅의 기운이 듬뿍 담긴 냉이를 사는 것이다. 나물을 하든 국을 끓이든 그것은 요리사의 마음이다. 지나다 뿌리를 자르지 않은 시금치를 발견한다면 소금과 마늘만 넣고 무쳐 먹어보기를 권한다. 

상을 차리고 보니 온통 나물이다. 냉이 된장 무침, 시금치나물, 시래기 볶음, 죽순 들깨볶음 등이다. 고기라고는 마늘 멸치 볶음이 유일하다.

아무래도 내일은 봄에서 가을까지 말려둔 야채들로 고깃국을 끓여야겠다. 작년 1월에 연탄난로에 긴 시간 동안 끓여 국물이 제대로 우러나온, 열흘간이나 먹은 육개장을 만들 것이다.

11월에 말려둔 고구마 줄기를 불려 넣고 10월 말에 땅에 묻어둔 무도 썰어 넣고 4월에 말려 둔 고사리를 넣으면 고기와 어우러져 정말 맛날 것이다.
#냉이 #시금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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