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운명을 바꾼 '시큐리티 파일'

[해설] 박근혜가 웃은 2012년 8월 20일, 그날 이후의 심리전단

등록 2015.02.09 21:13수정 2015.02.09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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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항소심 징역 3년 실형...법정구속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변호를 맡은 이동명 변호사와 함께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과 달리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유죄로 판단하고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 유성호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평가될 수 있다고 봤다."

9일 오후 2시 54분 서울법원종합청사 312호 법정, 1시간 가까이 숨 가쁘게 판결 요지를 설명해나가던 재판장 김상환 부장판사(서울고등법원 형사6부)가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어 그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과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두고 재판부가 어떻게 판단했는지 밝혔다. 결론은 "검사의 항소 일부는 이유 있다, 원심 무죄 판결 중 2012년 8월 20일 이후 공직선거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된다"였다.

공직선거법 무죄 판결이 유죄 판결로 달라지게 만든 2012년 8월 20일은 도대체 무슨 날일까. 재판부는 이날 새누리당이 전당대회를 열어 박근혜 의원을 18대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박근혜가 웃은 2012년 8월 20일, 그날 이후의 심리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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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된 박근혜 후보가 당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1심 재판부는 지난해 9월 11일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며 국정원의 사이버활동 시기는 '선거 국면'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검사는 2012년 1월 3일부터 12월 19일까지의 사이버활동에 공소를 제기했는데, 2012년 1월이면 대선 후보가 누구인지조차 확정되지 않았다"며 "당시부터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1심 판결 톺아보기).

'2012년 1월'만을 기준으로 사이버활동 시기 전체의 성격을 규정한 1심과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사이버활동의 시기를 2012년 8월 20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했다. 김상환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은 심리전단 직원들의 사이버활동이 오래 전부터 해온 일이어서 선거와 연관 있거나 선거에 영향을 주려는 인식이 없었다고 주장해 보통 '선거 국면'으로 인식되는 시점은 과연 어디일까 봤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새누리당 후보가 확정되면서 본격적인 선거 경쟁이 시작됐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심리전단 직원들이 2012년 1월 1일부터 12월 19일까지 전파한 트윗 27만 3192건을 '8월 20일' 기준으로 분석했다.

전체 트윗 중에서 법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여부를 따져봐야 할 '선거글'은 15만 3331건(56.1%)를 차지한다. 그런데 2012년 1~6월까지만 해도 적게는 3%, 많게는 16% 정도였던 선거글 비중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높아졌다. 7월 들어 선거글은 정치글 분량을 역전했고, 박근혜 후보가 확정된 2012년 8월 20일 이후에는 현저히 늘어났다. 그 결과 8월에는 전체 77%까지 치솟는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선거글 비중은 차츰 줄어든다. 재판부는 하지만 선거글 내용이 '문재인·안철수 반대, 새누리당 지지'라는 경향을 꾸준히 드러내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심리전단 직원들은 안철수 후보의 부동산 의혹이나 문재인 후보와 NLL(서해북방한계선) 문제 관련 글을 적극 퍼뜨린 일 역시 그들이 선거 쟁점에 기민하게 대응해 사이버활동을 한 흔적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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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대선개입사건 항소심 재판부가 2012년 1월 1일~12월 19일간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의 트윗27만여건을 분석한 결과. 재판부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후보로 확정된 2012년 8월 20일 이후부터 심리전단 직원들의 선거글이 대폭 증가하는 것 등을 토대로 원세훈 전 원장 등의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를 인정했다. ⓒ 박소희


김상환 부장판사는 이 맥락에서 볼 때, 국정원은 2012년 8월 20일 이후부터는 정치적 중립의무를 무겁게 인식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정원으로선 적어도 이 기간만큼은 심리전단 사이버활동을 통제하고 점검해야 했다"며 "그럼에도 국정원은 기존에 해오던 정치관여 활동은 물론, 명백히 드러날 정도로 선거관여 활동 규모를 증대했다"고 지적했다.

"(심리전단 직원들의) 구체적인 활동 내역도 후보자의 동선과 활동, 주요 쟁점에 정확히 기초해 이뤄졌다.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형성 과정에 국가기관이 개입한 것이며 (그 자체가) 편파적인 개입이다. 선거글에서 '종북세력에 대한 사이버심리전'이라는 명분을 도대체 읽어낼 수도 없었다. 이 사건 사이버활동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공직선거법 85조 1항이 정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

되살아난 시큐리티 파일, 원세훈을 잡다

공직선거법 유죄 판결에는 '시큐리티 파일'의 부활도 한몫했다. 이 파일은 검찰이 심리전단 김아무개 직원의 이메일 압수수색에서 찾아낸 텍스트 파일이다. 여기에는 트위터 활동을 전담한 안보5팀 팀원들이 사용한 트위터 계정 정보와 주요 이슈·논지 등이 담겨 있었다.

김아무개 직원은 당초 검찰 조사에서 파일 작성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1심 법정에서는 "이 파일을 직접 작성했는지, 전달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1심 재판부는 그의 법정 진술을 볼 때 시큐리티 파일 작성자가 불분명하므로 형사소송법 313조에 어긋난다며 이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형사소송법 전문).

핵심 증거가 날아가자 검찰은 전략을 수정했다. 검찰은 항소심에선 이 파일의 작성자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 김 직원의 '내게 보낸 메일함'에서 발견됐고 ▲ 파일에 있는 트위터 계정은 심리전단직원들이 사용한 것임이 확인됐다며 시큐리티 파일은 형사소송법 315조 3호가 정한 '신용할 만한 정황에 의하여 작성된 문서'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시큐리티 파일은 살아났다. 같은 이유로 1심 재판부가 배제했던 '425지논 파일' 역시 항소심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았다(관련 기사 : 파일명 '시큐리티', 원세훈 항소심에선 살아날까).

두 파일의 부활로 국정원 트위터 계정 수가 대폭 늘어났다. 1심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트위터 계정 1157개 가운데 단 175개만 인정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716개를 인정했다. 시큐리티 파일을 바탕으로 기초계정 269개와 이 계정들이 작성한 글 등을 '트윗덱' 프로그램을 이용해 퍼뜨린 계정 422개, 직원들 이메일에서 나온 계정 25개를 모두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재판부는 이 계정들을 바탕으로 2012년 8월 20일 이후 국정원이 벌인 사이버활동은 '선거운동'이란 결론을 내렸다. 부활한 시큐리티 파일은 국정원의 조직적 대선개입을 뒷받침하는 정황을 명백히 드러냈고, 원세훈 전 원장을 구치소로 보냈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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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국정원 대선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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