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말 한 마디에, 화가는 죽음을 택했다

[독서에세이]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등록 2015.02.18 10:12수정 2015.02.1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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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닌 대학교에는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었다. 왠지 그 호수에 손을 넣으면 찐득함이 느껴질 것 같은, 결코 깨끗해 보이지 않는 호수였다. 다들 반쯤은 정신이 나가있던 1학년 1학기 시절, 알코올 섭취로 인해 조금 더 정신이 나가게 된 남학우 몇 명은 바다에 몸을 던지듯 그 호수에 몸을 던져 자신을 학대하곤 했다. 나는 물론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지켜보기만 했음에도 그 호수에는 나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 얽혀 있었다. 내가 빠지면 호수 물이 넘친다는 아주 무서운 전설이.

친구 한 명이 유달리 통통한 내 얼굴을 놀리고 싶어 전설 운운했던 것이다. 단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한 건, 단 한 번이었다. 이후 친구는 다시는 나를 놀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호수를 지나칠 때면 나와 얽힌 그 전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살을 빼리라 다짐하며.


콤플렉스. 콤플렉스는 이렇게 생긴다. 누군가의 고의적이지 않은, 장난스런 말 한 마디로. 장난스런 말 한 마디는 단 5초 허공에 떠있을 뿐이지만, 콤플렉스가 된 그 말 한 마디는 그 사람과 일평생을 함께 할 수도 있다. 말 앞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리라. 정말이지 말은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엔 이런 생각도 든다. 말을 가려가며 듣는 기술 또한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별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은 기분이 상해 있다. 아닌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조심하고 싶지만 상대방의 마음과 감정 상태를 매번 의식하며 배려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신경을 쓴다고 썼음에도 상대방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대방 또한 의도치 않게 내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돌을 던질 땐 언제나 개구리를 생각해야 한다

'누구나 말 실수를 할 수 있어'라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대화를 하는 사람들과의 자리가 편해지는 이유 같다. 내 실수를 수월하게 넘겨줄 것 같아 그들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이런 저런 말을 하게 된다. 이런 자리에서는 나 역시 상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워 반응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맥락이 유쾌하면 다른 건 눈을 감아줘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물론 많을 것이다. 최대한 남을 배려하며 말을 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돌을 던질 땐 언제나 개구리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가 쉽지 않아, 상황이 허망한 쪽으로 흐르게 되기도 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집 <깊이에의 강요>의 표제작 '깊이에의 강요'의 내용이다. 소묘를 잘 그리는 젊은 여인은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여인은 그의 말을 금방 잊어버린다. 다음 날 신문에 그의 글이 실리기 전까지는. 신문에서 평론가는 또 다시 그녀 작품에 깊이가 없음을 애석해하고 있었다. 신문을 본 젊은 여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완성한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작업 중인 것들까지 유심히 살펴보며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밤 그녀를 본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을 하나같이 칭찬했다. 그녀의 재능에도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들 또한 평론가처럼 그녀 작품의 깊이 없음을 애석해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신문에 나온 비평을 그대로 외우기라도 하듯 아래와 같이 말했다.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어요."

평론가 말 한 마디에 모든 걸 멈춰버린 그녀

그녀는 한 주 내내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대신, 멍하니 앉아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했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그녀는 그림을 다시 그려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바람에 제대로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었다. 대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미술 서적을 들여다보고, 화랑과 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깊이를 얻고자 노력했다. 서점에 들러 가장 깊이 있는 책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구입하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 앞에서 그의 그림엔 있을지도 모르는 깊이를 찾아보려 애쓰면서.

젊은 여인은 점점 이상해져 갔다. 그림은 그리지 않았으나 화실에서 나오는 법도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잠을 자지 못했고, 약과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외모는 피폐해져 갔고, 옷차림도 후줄근해져 갔으며, 집도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3년 동안 그랬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녀. 결국 그녀는 139m 높이의 텔레비전 방송탑에서 몸을 던져 죽어 버렸다.

언론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녀의 죽음에 달려들었다. 전도 유망하던 여류 화가의 참혹한 최후는 '보도할 가치'가 있는 최고의 기삿거리였다. 대중들은 궁금해했다. 그녀는 왜 죽은 걸까. 그녀의 작품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녀의 작품에서 그녀 죽음의 실마리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작품엔 깊이가 없어 애석하다고 했던 그 평론가였다. 신문 문예란에 실린 그의 글은 그녀의 죽음을 '깊이에의 열정'에서 찾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의 그림엔 너무 깊이가 있었던 것이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무심히 던진 돌 때문에 죽음 택한 화가

평론가는 돌을 던졌고, 화가는 돌을 맞았다. 돌을 맞은 화가는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고통스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화가는 고통을 느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화가는 죽는 편을 택했다.

안타까운 건, 그 돌이 '무심히' 던진 돌이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을 바꾸는 평론가의 모습에서 드러나듯, 기준 없고 중심 없으며 모호한 돌이기도 했다. 화가에게 던져진 또 다른 돌인 대중들의 돌 또한 평론가의 돌을 모방한 아류 돌, 무의미한 돌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화가는 그 돌에 자기 삶을 건 것이다. 허망하게도.

타인의 말, 평가,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 평가, 시선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 줄 알게 된다면 조금은 더 현명하게, 그러니까 조금 더 무신경하게 그것들을 받아내고 쳐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호수와 얽힌 나에 대한 전설은 오래가지 않았다. 술을 너무 마시고 다녔던지, 위병이 난 나는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삐쩍 말라버린 채 학교를 마쳤다. 제대로 못 먹고 다녀 기운이 없긴 했었지만 난 그 시절을 평생 그리워할 것 같다.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위가 좋아지면서 내 마음 속 전설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얼굴'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를 본다. 친구의 장난스러웠던 말 한 마디는 이제 더는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말에 종속된 나에 대한 내 평가만이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 이것은 이제 나의 문제이다. 남이 내게 건넨 말 한마디의 문제가 아니라.

가끔은 후회도 된다. 나도 그 친구에게 할 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너 다리 짧다'는 말을 너무나 하고 싶었다. 지금도 하고 싶다. 하지만 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는 성격이 아주 좋은 녀석이다. '누구나 말 실수를 할 수 있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삶을 살고 있을 만큼 '쿨'한 녀석.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친구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내 말 실수를 친구는 배려있게 넘어가 줄 테니까.
덧붙이는 글 <깊이에의 강요>(파트리크 쥐스킨트/열린책들/2006년 02월 01일/8,500원)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2002


#파트리크쥐스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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