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한창 재미있는데... 난데없는 암 선고라니

[나의 암 극복기 ⑫] 수술한 지 석 달밖에 안돼 학교에 가다

등록 2015.02.24 11:52수정 2015.02.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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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는 암울한 투병 생활을 써 왔지만, 지금부터는 제 나름대로의 암을 다루는 방법과 병으로 인해 우울해진 마음을 털어내는 희망 열차로 달립니다. - 기자말


버스 차장 언니가 꿈이던 시절...

"비 오는 낙동강에 저녁노을 짙어지면~~"

부슬비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해거름 무렵, 하루에 몇 대 다니지 않는 시외버스를 탔다. 손만 들면 어느 곳이건 다 정류장이 되던 때다. 비가 와서 그런지 그날따라 몇 안 되는 손님이 띄엄띄엄 앉아 있는데 내 귀에 가느다랗게 부르는 차장 언니의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차장의 모습은 슬프고 행복한 고민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참 멋있어 보였다. 그때부터 내 꿈은 '차장'이 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 꿈은 '자동차 정비사'로 바뀌었다. 객기 왕성한 때에는 아주 잠깐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20대의 나의 세 번째 꿈은 '관광 가이드'가 되는 것이었다.

말로나 글로 다 나열할 수 없지만, 나는 젊은 시절을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아왔다. 새벽과 밤에는 외국어 학원 강사로, 낮에는 직원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작은 회사의 사무원으로, 하루를 48시간처럼 일했다. 1974년에 자동차 운전 면허증을 땄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격증이란 것을 받은 것이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곧바로 영업용 택시를 샀다. 무경험 상태에서 시작한 어설픈 운수업은 금방 거덜이 났다.


1977년부터 결혼하기까지 가끔 일본에서 한국으로 사업차 들어오는 사업가의 부인들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 주는 것을 계기로 본의 아니게 얼치기 관광 가이드를 했다. 그들에게 서울 안내를 하면서 든 생각은 '꼭 진짜 관광 가이드가 되어서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려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얼치기 관광 가이드 계기로 국제관광과 진학

2011년에 나는 대학 입시 학원에 등록하고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2012년 3월, 한 대학교 국제 관광과에 입학을 했다. 결국, 내 잠재의식 저변에 뿌리박고 있던 진짜 관광 가이드가 되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격려 반, 우려 반의 반응을 보였다. 이 나이에 대학 공부를 시작한다면 주로 머리를 덜 쓰는 학과를 다닐 것으로 지레짐작하는 이들은 내가 국제관광과를 다닌다면 좀 놀라거나 의아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 이유는 어학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입학함으로써 재미있는 일과 곤란한 일이 교차했다. 재미있는 일은, 교수님들과 학생들의 나에 대한 호칭이었다.

교수님들은 호칭을 애매하게 부르거나 아예 부르지 않기도 했다. 학생들은 왕언니라고 부르라고 어느 교수님께서 제안하셨으나 나는 '왕' 자를 떼고 그냥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 어느 날은 정장을 입고 등교한 적이 있는데 학생들이 나를 교수인 줄 알고 인사를 했다. 참 거시기 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같이 인사를 하고 그 후로는 정장을 입지 않았다.

일본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은 PPT로 이루어졌다. 컴퓨터라고는 필요한 인터넷 검색과 한글만 겨우 할 줄 아는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과 친구들과 아들, 딸의 도움을 받아 과제를 했다. 어리바리한 학교생활이었지만, 그 재미는 내 생에 정점을 찍었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였기에 수업 내용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성적은 당연히 상위권이었다. 이런저런 자격증 시험에 무차별 도전한 결과 졸업까지 6가지 자격증을 땄다. 쥐꼬리만큼이지만 장학금도 받았다.

상상을 불허하리만치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딸보다 어린 친구들과 희희낙락 하루하루를 천금같이 지냈는데 웬 난데없는 암 선고라니.

지도 교수님을 비롯한 다른 교수님들이 참 많이 격려해 주셨다. 힘 내서 수술 잘 받으라고, 괜찮을 거라고. 친구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어깨와 손을 잡아주는가 하면, 눈빛으로 응원했다. 2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수술했다.

머잖아 새 학기가 시작된다. 집안 식구들과 주위에서 휴학할 것을 권했다. 교수님들과 친구들, 교정과 내가 좋아하는 벤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흥분됐다. 나는 가족의 우려를 뒤로하고 일단 등록을 했다. 아직은 무리라서 안 된다면 휴학할 각오를 하고 주치의와 의논했다.

나는 주치의에게 학교에 다니게 된 배경과 학교 다닐 때 행복했던 마음을 간략히 설명하고 새 학기에 등록할지 휴학을 할지를 물었다. 그동안 그렇게 무뚝뚝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주치의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그 좋은 놀이터를, 그 좋은 에너지를 왜 포기하려고 하느냐, 학교라고 생각지 말고 놀이터라고 생각하고 학교에 다녀라"는 반갑고도 고마운 진단을 내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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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강의실 장면. ⓒ SBS


개학 첫 날, 수술한 지 석 달밖에 안 돼서 학교에 나타난 나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라며 휴학하지 않은 것을 의아해했고, 심지어 지도교수님은 나를 따로 불러서 휴학할 것을 권했다. 나는 의사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했지만, 교수님은 엄청나게 불안한 표정으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2학년이 돼서 다른 과목이 하나 추가되었다. 낯선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학생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 교수님은 조금 불쾌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강의실에서는 모자를 벗으라고 했다. 나이 믿고 교수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당황했으나 얼른 사과하고, 모자를 벗어야 하나 아니면 상황 설명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내 짝꿍이자 절친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우리 언니 아파요."
"예? 어디가?"
"많이 아파요."

그 친구는 이렇게 말을 하더니 그냥 울어버린다. 친구들이 하나 둘 훌쩍이기 시작했다. 눈치를 챈 교수님은 무척 미안해하며 내게 사과했다. 다음 주 수업 때 그 교수님은 예쁜 모자를 하나 사 와서 내게 선물했다. 지금은 그 교수님과 친구처럼 친해졌다.

수술한 지 석 달...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가 국제관광을 전공하고 제일 먼저 한 작업이 여행사를 하는 친구를 찾아가는 거였다. 언제가 돼도 좋으니 국내 투어가 있으면 나를 조수로 좀 써 달라는 부탁을 간곡하게 했었다.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온 것이다.

'아프다'는 사실을 모르는 친구는 4월에 청산도 투어가 있는데 버스 두 대로 가니 조수로 따라가도 좋다는 반가운 소식을 주었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지만, 수술한 지 이제 석 달 됐는데 과연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것은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경을 써야 하고 손님들을 응대해야 되는 몸도 마음도 고된 일이기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즐거우면 까짓 피곤쯤은 이길 수 있을 거야.'

가족들에게는 청산도 여행을 간다고 하고 생애 첫 관광 가이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무보수로 하기로 했지만, 소중한 경험에 여행 경비를 들이지 않고 청산도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청산도 가는 도중에 들르는 관광지 몇 곳에 대해 공부를 했다. 수업시간에 배운, 관광과 여행이 다른 점과 기타 여러 가지 전문 지식을 관광객들에게 서비스로 설명해 주려고 교과서를 다시 들여다보기도 했다. 여행사 직원들과 현지답사를 다녀와서 보름 있다가 기대에 부푼 첫 가이드를 나갔다. 대형 버스 두 대에 90여 명의 관광객을 모시고 버스는 출발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다. 오전 7시다.

'아차, 이건 꿈일 거야. 현실이 아닐 거야.'

오전 6시에 식당에서 손님들 아침 식사를 도와야 하는데 늦잠을 잔 것이다. 헐레벌떡 식당으로 가니 앞차의 정식 가이드가 인솔해서 식사를 마치고 마침 내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내가 죄송하다며 고개를 들지 못하자 손님들은 '처음에는 다 그런 거라'며 웃음으로 다독여 주셨다.

서울에서 버스 출발할 때 솔직하게 손님들께, 나는 국제 관광과 재학중인 학생이며 견습차 나왔다고 인사한 것이 손님들이 미소로 너그럽게 봐 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여행 일정은 1박 2일이었지만, 걸린 시간은 40시간에 가까웠다.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이 녹초가 되었다. 꼬박 열세 시간을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아플까봐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활력소가 되어서 나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아프기 전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희망열차 #학교생활 #어린친구 #관광가이드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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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e-mail : ok_0926@da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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