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고개 빳빳하게 들고 살아라"

[삼일절에 만난 사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숙이 할머니

등록 2015.03.01 09:28수정 2015.03.0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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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박숙이 할머니. 지난해 11월부터 건강이 나빠 남해 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 윤성효


"내가 바래(조개 캐기) 가도, 나물 뜯으러 가도 맨날 내가 최고였다. 그만큼 예뻤다. 그런데 16살부터 일본 때문에 몸이 망가졌다. 결혼도 하고 싶었고 아이도 낳고 싶었다. 이 할머니 원수를 꼭 갚아야 한다. 일본에 고개 숙이지 마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숙이(94) 할머니가 평소에 하는 말이다. 삼일절을 맞아 박숙이 할머니의 억울한 삶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하다. 박 할머니는 지난해 11월부터 남해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 등록한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53명이고 이 중 경남에는 8명이 살아 계신다. 대부분 팔·구순으로 연로한 데다 질병과 싸우고 있다.

박 할머니는 뒤늦게 위안부로 등록했다. 2011년 말에 등록해 심의 과정을 거쳐 2012년초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만큼 할머니 이야기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늦었지만 할머니는 "내 말 좀 들어달라"며 학생들 앞에 서서 교육하는 일에 앞장 서오고 있다.

16살에 일본 군인에게 끌려가... 6년간 위안소 생활

1922년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당리에서 태어난 박숙이 할머니는 1939년 16살 때 한 살 위 이종사촌과 '바래' 가는 길에 2명의 일본군인한테 붙들렸다. 일본군인은 두 처녀의 목에 칼을 겨누며 막무가내로 트럭에 태워 끌고갔다.

배에 태워져 부산으로 간 두 처녀는 20여 명과 함께 일본 나고야로 갔다. 거기서 창고에서 주먹밥으로 사나흘 동안 지냈다. 같이 온 조선 처녀들이 '간호사 시켜 준다고 하더라'고 하길래 두 사람도 간호사가 될 생각에 고통을 참았다.

며칠 뒤 두 처녀는 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끌려갔다. 여기서 박 할머니는 '히로꼬'란 이름으로 22살까지 6년간 위안부 생활을 강요 당했다.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견디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할머니 왼쪽 손목에는 아직도 그때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자살 시도가 발각되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일본군인이 때려 허리가 부러지고, 대검으로 허벅지를 찔렸다.


할머니는 광복 즈음 위안소에 온 일본군인이 "우리가 전쟁에 져서 조선놈들이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해방이 된 줄 알았다. 이종사촌 언니가 도망가다 총에 맞아 죽었고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드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 할머니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도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2년간 중국인 홀아비 집에서 지냈다. 그가 주는 생활비를 틈틈이 모았다. 그 돈으로 도망칠 방법을 찾았다. 배를 타고 부산에 겨우 도착한 할머니는 고향이 어딘지 생각이 안 나 목욕탕집에서 가정부 생활을 3년간 하다 어릴 적 어머니가 다녔던 절 이름(화방사)이 생각나 고향이 남해라는 사실을 알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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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숙이 할머니는 연로하지만 요즘도 손톱에 꽃물 들이기를 좋아한다. 사진은 남해여성회가 할머니 모습을 담아 만든 것이다. ⓒ 남해여성회


고향을 떠난 지 10여 년만인 1948년 남해에 왔지만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다. 고향사람들은 할머니가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할머니는 위안소 생활을 밝힐 수 없어 부산에서 10여 년간 식모살이를 했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고 싶었던 할머니는 마흔살까지 노력했지만 안 됐다. 대신 할머니는 다른 사람이 낳은 아들 한 명과 두 딸을 '가슴으로 낳은 자식'으로 여기며 혼자서 키웠다.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는 2007년 무렵이었다. 한 할머니가 텔레비전에서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가슴으로 낳은 아들한테서 얻은 손자손녀 3명이 남해에서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는 주변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 2008~2010년 사이 할머니는 여기저기 묻고 다녔다. 그러는 사이 한 사람이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마산창원진해시민모임 대표한테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그날 밤 이 대표는 남해 할머니 집을 방문했다. 이 대표는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위안부 피해자가 맞다고 판단해 남해군청에 신고 등 절차를 밟도록 했다.

이경희 대표는 "연락을 받고 할머니를 찾아간 게 밤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여성가족부가 심의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6개월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 때도 할머니가 연세가 많았기에 남해군청에 연락해서 빨리 절차를 밟도록 했다"고 전했다.

"할머니 들려주세요 ... 학생들 앞에서 당당한 삶 강연"

신고·등록 뒤 할머니는 당당하게 나섰다. 남해여성회(대표 김정화)가 나서 박 할머니를 돕고 있다. 회원들은 매주 조를 편성해 할머니를 찾아 말벗이 되고 책도 읽어주면서 살피고 있다.

할머니는 지난해 학생들 앞에 섰다. 남해고, 남해정보고, 남해중 등에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남해여성회와 함께 '할머니 들려주세요'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김정화 대표는 "할머니께서 학생들 앞에서 당신의 삶을 이야기 하며 교육하고 싶어하셨다"며 "할머니는 강연하실 때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강연을 마치고 나면 학생들이 한 줄로 서서 할머니를 안아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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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여성회 김정화 대표(오른쪽)를 비롯한 회원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박숙이 할머니를 돕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 김정화 대표와 나들이 하는 모습. ⓒ 남해여성회


남해여성회는 '청소년실천단'을 구성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청소년들이 할머니를 찾아 말벗되기, 책읽기, 나들이함께하기, 생신축하해드리기, 명절방문 등을 하고 일본군 위안부 관련 행사를 벌이는 것이다.

남해여성회와 청소년실천단은 지난해 8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다녀왔다. 박 할머니는 건강 때문에 서울까지 다녀오지는 못했지만 그날 아침 버스에 올라 "학생들에게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니 고생스럽더라도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박숙이 할머니는 향토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2013년 10월 16일 남해군청을 방문해 정현태 군수한테 장학금을 전달하면서 "어려운 형편에서 열심히 향학열을 불태우는 후학들에게 뜻있게 써 달라"고 말했다.

박숙이 할머니는 요즘 병상에 있으면서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본에 빳빳하게 고개 들고 살아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불쌍한지 아느냐. 공부 열심히 해서 큰 인물 되고 튼튼한 나라 만들어라. 다른 나라에 고개 숙이는 백성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일본군위안부 #박숙이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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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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