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조한 반사판까지... 모델의 이름은 '설중매'

"저 나무에 물 주거라" 퇴계 이황도 아낀 나무, 매화

등록 2015.03.04 11:58수정 2015.03.0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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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모델 얼굴에 반사판을 들이밀 듯 매화에 빛을 주자 매화는 더욱 선명하게 카메라에 담겼다. ⓒ 김종신


지난 2일은
날씨가 완연한 봄이었다. 산책하기 좋은 바람과 햇살에 오후에는 건물에서 나와 산책하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봄 기운을 느꼈다. 이제는 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인 3일은 추웠다. 아침 6시 30분 경남 진주에서 생활 복지 시설인 경남 산청 성심원까지 출근하는 길에 비가 조금씩 내렸다. 아침 8시 무렵에는 눈발이 날렸다. 괜스레 퇴근길이 걱정이었다. 퇴근길을 걱정하게 만든 눈이 오히려 반가웠다. 요양원 뒤편에서 매화나무가 창 너머로 보였기 때문이다. '설중매(雪中梅)'다.

눈속에 핀 매화... 꼿꼿한 선비의 기상

아침을 먹고 부랴부랴 카메라를 챙겨 나갔다. 장독대에도 눈이 쌓였고 매화에도 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찍은 사진이 별로 성에 차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동료와 함께 다시 촬영에 나섰다. 이번에는 일회용 접시에 알루미늄 호일로 급조한 반사판을 가지고 갔다. 동료가 유명 모델 얼굴에 반사판을 들이밀 듯 매화에 빛을 주자 매화는 더욱 선명하게 카메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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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날씨가 완연한 봄이었다. 산책하기 좋은 바람과 햇살에 오후에는 건물에서 나와 산책하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봄기운이 느꼈다. 이제는 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웬 걸. 다음날인 3일은 추웠다. 아침 6시 30분 경남 진주에서 생활복지시설인 산청 성심원까지 출근하는 길에는 비가 조금씩 내렸다. 아침 8시 무렵에는 눈발이 날렸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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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을 걱정하게 만든 눈이 오히려 반가웠다. 요양원 뒤편에서 매화나무가 창 너머로 보였기 때문이다. ‘설중매(雪中梅)’다. ⓒ 김종신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에 드는 매화나무는 옛 선비들이 귀중하게 여겼다. 단정하고 아담하면서도 매서운 추위를 뚫고 꽃을 피워내는 의지가 굳세고 끄떡없는 기상을 닮은 매화는 예부터 사람들이 좋아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강희안은 매화가 사랑받는 이유를 네 가지를 <양화소록>에서 "첫째로 함부로 번성하지 않고, 둘째는 늙은 매화나무가 아름답고, 셋째는 살찌지 않고 마른 모습 때문이다. 넷째는 꽃봉오리가 벌어지지 않고 오므라진 자태 때문"이라고 했다.

눈 내리는 가운데 매화의 굳센 기상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셔터를 누르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생각만큼 눈 속에 핀 매화를 사진에 담지 못해 은근히 짜증이 났다. "매화가 물 먹이네"하고 생각하는 너머로 문득 퇴계 이황 선생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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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에 든 매화나무는 옛 선비들이 귀중하게 여겼다. 단정하고 아담하면서도 매서운 추위를 뚫고 꽃을 피워내는 의지가 굳세고 끄떡없는 기상을 닮은 매화는 예부터 사람들이 좋아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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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일제 강점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육사처럼 나도 설중매를 보고 희망을 느낀다. 눈 내리고 바람이 세차지만 곧 봄은 터진다. 오늘 내렸던 눈은 봄을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을 잊지 말라고 한다. 겨울의 가르침이다. 심장 쫄깃하게 만들 봄이 내 눈에 있었다. ⓒ 김종신


퇴계 선생이 도산 서원에서 생을 마칠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저 나무에 물 주거라"였다. '저 나무'가 바로 선생이 단양 군수로 재직할 때 기생 두향이 준 매화다. 마흔여덟 살의 퇴계 선생이 충북 단양 군수였을 때 열여덟 꽃다운 기생 두향이 선생의 용모와 인품에 감동해 온갖 선물을 다 했다고 한다. 늘 꼿꼿하기만 한 선생은 흔들림이 없었다. 두향의 선물 공세 속에서도 유일하게 거절하지 못한 선물이 매화라고 한다. 선생은 도산 서원을 짓고 나무를 그곳에 옮겨 심었다고 전한다.

퇴계 선생의 마음을 매화로 움직인 기생 두향도 있었지만, 기명(妓名)에 매화가 있다. 눈 속에 핀 매화라는 '설중매' 기생에 얽힌 이야기다. 때는 조선 건국. 역성 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뒤 궁궐에서 공신들의 잔치가 열렸다고 한다. 이때 한 공신이 기생 설중매에게 "오늘은 동쪽 집에서 먹고 내일은 서쪽 집에서 자는(東家食, 西家宿) 네 신세가 어떠냐?"며 기생의 신세를 야유하는 농담을 했단다. 설중매는 "어제는 고려 왕조를 섬겼다가 오늘은 이씨 왕조를 섬기는 대감의 신세와 똑같지요"라고 답해 공신의 입을 다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설중매의 자태에 어울리는 멋진 말이다.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말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에서>에서도 매화나무가 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육사처럼 나도 설중매를 보고 희망을 느낀다. 눈 내리고 바람이 세차지만 곧 봄은 터진다. 오늘 내렸던 눈은 봄을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을 잊지 말라고 한다. 겨울의 가르침이다. 심장 쫄깃하게 만들 봄이 내 눈에 있었다.
덧붙이는 글 해찬솔일기 (http://blog.daum.net/haechansol71)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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