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총살당한 '진짜 보수', 이번엔 명예회복 할까

법원, 독립운동가 최능진 재심 개시 여부 검토 중... 유족 "진실 밝혀달라"

등록 2015.03.05 15:06수정 2015.03.05 15:06
12
원고료로 응원
5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509호 법정, 피고인석에 앉은 백발의 성성한 남성이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최창영)를 향해 말했다.

"제가 82세다. 오남매 가운데 다 세상을 뜨고 저만 남았다. 지난해 돌아가신 형님 유언이 '네가 나서서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달라'였다. 다른 욕심은 없다. 진실을 밝히고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길 원한다."

그의 이름은 최만립. 대한체육회 원로고문이자 고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동생이다. 이날 최 고문은 아버지 최능진씨의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열린 심문기일에 직접 출석했다. 그는 부친이 "이승만을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식재판도 못 받았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또 거듭 아버지의 결백함을 호소하며 재판부에 손으로 쓴 진정서도 제출했다.

"선친 유언이 '나는 정치적인 일로 가지만, 너희는 조국을 위해 봉사하라'였다. 애국가 1~4절까지 다 부르고 돌아가셨다더라. 친일부역자들에겐 (선친이) 상당한 눈엣가시였다. 재판부에서 잘 검토해달라."

'내란음모 1호'로 몰린 비운의 민족주의자

a

최능진 선생 ⓒ 자료사진


최필립·만립 형제의 아버지 최능진씨는 '비운의 민족주의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899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힘썼고, 해방 후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돼 친일경찰 청산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친일세력의 역공으로 파면당한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지난해 2월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 일을 가리켜 "민족적 양심을 가진 진짜 우파가 친일파들에게 쫓겨나는 비극"에 빗댔다.

이후 최씨는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박사를 견제하기 위해 1948년 제헌국회 때 같은 지역구인 동대문 갑구에 출마하려 했다. 그는 선거과정에서 독립운동 경력이 부각돼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선거 이틀 전, 선거위원회는 최씨가 후보 등록 때 제출한 추천인 217명 중 27명의 서명이 위조됐다며 그의 후보 등록을 무효화했다. 이후 이승만 박사는 선거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해 10월 1일, 최능진씨는 대한민국 최초의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린다. 정부 수립 후 한 달 보름만이었다. 수도경찰청 형사대는 그가 또 다른 독립운동가 서세충, 오동기 등을 사주, 군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며 연행했다. 최씨는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 2심에서 5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그는 인민군의 정치범 석방을 계기로 풀려난다.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최씨는 정전·평화운동을 벌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일까. 그는 국회의원들을 만나 "인민을 위하여 인민군과 담판하여 민족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민국 당국에는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조속히 UN에 정전을 호소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를 눈엣가시로 여겨온 반대파에게는 좋은 빌미가 생긴 셈이었다.

1951년 1월 20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아래 군법회의)는 최씨의 활동이 이적죄(국방경비법 위반)에 해당한다며 총살형을 선고했다. 형집행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이뤄졌다. 최만립 고문은 5일 "1950년 12월 14일 면회 갔을 때 '곧 나올 테니 걱정마라'고 하셔서 우리는 피난을 갔다"며 "이후 모든 게 비밀리에 이뤄졌고, (가족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는 "민간인을 어떻게 군사법정에 세우냐"며 절차 문제도 지적했다.

64년 만에 '명예회복' 첫 발자국 내딛다

a

1960년 6월 4일 <경향신문>에 실린 고 최필립 이사장의 사연.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최 이사장은 아버지 최능진씨의 이야기를 소개한 경향신문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의 무덤을 찾기 원한다고 밝혔다. 이튿날 경향신문은 대구시에서 최능진씨의 묘가 발견됐다는 후속보도를 한다. 그가 사망한 지 9년 만이었다. ⓒ 경향신문


유족들은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이적죄'라는 꼬리표를 떼긴 힘들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자 이들은 최능진씨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진실 규명 신청을 냈다. 진실·화해위 위원 15명은 2009년 8월 18일 만장일치로 이 사건의 진실 규명을 결정한다.

진실·화해위는 군법회의 자체가 헌법상 근거 없는 기구라서 법원 판결이 확정됐다고 볼 수 없으며 판결 내용을 봐도 최능진씨의 행위를 지나치게 편향적으로 해석했다고 지적했다. 또 "국가는 재판권 없는 군법회의에서 최능진에게 선고한 사형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임을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사법부는 재심 수용에 따른 판결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 보고서 바로가기).

이후 유족들은 2011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한동안 재판관할권 문제가 정리되지 않아 2015년 3월 5일에서야 겨우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이날 재판부는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전, 청구인과 검찰의 의견을 듣기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재판장 최창영 부장판사는 "(군법회의 재판이) 단심으로 끝난데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등 적절한 절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부분들이 명백하게 밝혀져야 할 것 같다"며 최 고문 쪽에 증거자료 보완을 요구했다. 재판부는 앞으로 한 두 차례 더 심문기일을 열어 관련 자료 등을 검토한 다음 재심의 필요성을 최종 판단할 예정이다. 2차 심문기일은 4월 1일 오전 11시 20분에 열린다.

[관련 기사]

최초의 국가폭력, '혁명의용군' 사건을 아시나요?
이승만 '정적1호' 최능진을 말한다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집안의 '엇갈린 3대'
댓글1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AD

AD

인기기사

  1. 1 지하철역 한국 여성 가방에 불, 그 다음 생긴 뜻밖의 일
  2. 2 세월호 생존자의 딸로 7년... 이제는 말해야겠습니다
  3. 3 세월호 보상금으로 차 바꿨다? 우리 모습을 보세요
  4. 4 "엄마, 일은 원래 다 힘든 거지?" 어린 아들의 죽음
  5. 5 "나도 다 큰 남자인데, 자꾸 왜 내 걸 만져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