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고 토하기'가 전통, 이 학교 바뀔 수 있을까

[공모-거짓말 같은 이야기] 신입생 환영회 사발식, 바꿔보려 합니다

등록 2015.03.26 08:53수정 2015.03.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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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 픽사베이


처음 마셔본 막걸리는 달았다. 안이 살짝 비치는 초록색 병에 담긴 희뿌연 술은 예뻤고, 양은으로 만든 잔에 '딸딸' 따르는 소리는 마음마저 설레게 했다. 쓰기만 한 소주보다 좋았다. 수능시험을 치른 지 며칠 안 돼 친구들과 둘러앉아 잔을 나눌 때였다. 해방감에 실컷 마시고 주워섬겼다.


"다른 술에는 없는 풍류가 있다카이!"

우리의 '막걸리 찬가'는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신환회 이후 생긴 막걸리 트라우마, 요즘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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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들이 환영회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 이 행사는 보통 '사발식'으로 불린다. ⓒ 박민규


한동안 막걸리만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반투명 초록병만 봐도 점심으로 먹은 것들이 올라오는 듯했다. 술 좀 마신다고 까불던 친구들도 그랬다.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라는 말을 대학에 들어와서 배웠는데, 여기 딱 들어맞았다. 6개월 정도 갔으니 굳이 구분하자면 '작은 트라우마'였다. 시간이 지나니 다시 막걸리를 마실 수 있게 됐다. 그 시절도 추억이 됐다.

"막걸리 안 마셔요.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시고 토한 기억 때문에…."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신입생들에게는 추억이 아니라 현재다. '마시고 토하는' 신입생 환영회는 올해도 반복되고 있다. 7년 전 내가 그랬던 것과 똑같다. 과 마다 다르다지만, 보통 막걸리를 2~3병씩 마시고는 토해낸다. 술 많이 마시기로 유명한 공과대의 모 학과는 신입생 한 명에게 무려 9병을 할당(?)한다는 소문도 있다.

행사가 끝나고 몇몇은 토끼눈이 된다. 억지로 토하느라 힘을 줘선지 눈의 모세혈관이 터져나간 것 같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모르는 사람은 물을 테다. "술을 한 번에 그렇게 많이 마시는 것이 가능하냐"고. 하지만 이 행사에서 막걸리는 마시는 것(?)이 아니다. 자기 허리만큼 올라오는 막걸리 통을 앞에 두고 덜덜 떠는 신입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선배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 몸을 하나의 큰 통이라고 생각해. 그냥 잠깐 담았다가 다시 빼내는 거야. 걱정 마!"

간만에 만난 후배들에게 "아직도 그렇게 많이 마시냐" 물었다. 남의 일인 듯 까맣게 잊고 살다가 졸업할 때가 돼서야 관심을 가지는 못난 선배에게, 후배들은 사정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안 그래도 양을 줄이려고 했는데, 새내기들이 토하고 뒤풀이 자리에 가고 싶다며 차라리 많이 먹자고 하더라고요. 작년에도 다 못 토해낸 애들이 많아서, 확실히 토할 수 있게…."

마신 술을 토해내지 못하면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니, 무조건 토할 수 있을 때까지 들이붓는 편이 오히려 신입생들에게 낫다는 거다. 나와 동기들도 한 학번 아래 후배들에게 "소화시키면 안 되고, 토해야 돼"라고 말했었다. 선배로서 부끄럽고 미안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다시 물었다. "혹시 바꿀 수 있지 않겠냐"고.

"일단 제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까라는 대로 깔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자조에 가까운 반응에 새삼 놀랐다. 다른 후배들도 문제에 대한 인식은 비슷했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짚고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모아졌다. 학생회 활동을 하는 후배들이 고맙게도 뜻을 함께해 줬다. 며칠 뒤 학생회 차원의 간담회가 열렸다.

뜻을 함께 해준 후배들, 간담회 후 '막걸리 한잔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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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쓸 막걸리병을 모아놓은 모습(아래). 신입생 한 명당 한 바가지씩 할당하는데, 이 술은 모두 버려진다. ⓒ 박민규


지난 16일, 간담회 자리를 찾아갔다. "예전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의식을 거쳐야만 소속감을 가지게 된다", "졸업한 선배들도 오기 때문에 기존 방식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익히 들어온 옹호론이다. 대부분 별 힘을 얻지 못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다들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볼멘소리에만 그쳤음을 다시 확인했다. 논의에 불을 지핀 건, 신입생들이 참여 여부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므로 문제가 없지 않느냔 발언이었다.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자율에 맡겨서 놔두면 행사를 계속할지 말지 자연스럽게 결정되지 않겠어요?"

신입생으로서 선배들에게 소신을 밝히는 일은 어렵다는 반론이 이어졌다.

"선배,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한 15학번들이에요. 전통적으로 해오던 걸 나부터 안 하겠다고 하는데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두렵지 않을까요."

논의를 정리해야 할 시점이 왔다. 간담회를 주최한 학생회 후배는 "토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사를 바꿔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시고 토하는 것을 뺀 환영회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멀쩡한 음식물을 게워내는 일은 육체적, 심리적으로 무척 고생스럽다는 거다.

격론 끝에 올해 신입생 환영회의 막걸리 할당량이 정해졌다. 종이컵으로 딱 한 잔씩. 토해내는 대신 입에 머금은 막걸리를 뱉어내기로 했다. 이른바 '사발식'은 본래 일제와 독재 세력에 저항했던 선배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의식이다. 의미만 되새기고 절차는 간소화하기로 한 거다.

도를 지나친 야유를 보내는 것도 금지했다. 장기자랑에 나선 신입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선배들이 소리를 지르며 빈 막걸리 병을 집어던지곤 했다. 자칫 신입생 환영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신입생이 나올 수 있었다.

계획대로 행사가 진행된다면, 또 다른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질 거다. 목젖까지 막걸리를 들이붓고 버티지 못해 고스란히 토해낸 지 7년 만이다. 그때만큼이나 신입생 환영회가 기다려진다.
#막걸리 #사발식 #신입생 환영회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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