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전환=사교육비 절감' 학부모들 진단, 틀렸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36] 국정 전환에 찬성하는 친구들에게 던진 한 아이의 일침

등록 2015.04.09 17:01수정 2015.04.0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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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키순으로 아이들의 번호를 매겼다지만, 어느 학교든 지금은 가나다순이다. 그런데, 학년 초 교실에서 출석을 부를 때면, 학급마다 한두 명씩 예외가 있다. 대개 학급 내 맨 끝 번호인 '황'씨 성 뒤에 '김'과 '박'씨 성을 가진 아이들이 보인다. 더러는 학년 초 갑작스레 문, 이과 계열을 옮긴 아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타 지역에서 전학을 온 아이들 때문이다.

낯선 학교에 와서 그들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과목별로 새 교과서를 구비하는 일이다. 중학교까지는 무상으로 교과서가 제공되므로 별 어려움이 없다. 학교마다 전학생을 대비해 과목별로 몇 권씩 여분을 챙겨놓는 곳도 있다. 그러나 교과서조차 유상인 고등학교는 상황이 다르다. 전학생 스스로가 과목별로 교과서를 새로 마련해야 하니 퍽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다. '돈'인 교과서를 여분으로 갖춰놓는 고등학교는 거의 없다.

"모든 과목이 '국정 교과서' 한 종이었으면 좋겠어요."

전학 온 한 아이의 학부모가 건넨 푸념이다. 인터넷을 뒤적이거나, 교과서를 판매하는 서점을 찾아다니는 번거로움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전 학교에서 쓰던 교과서는 환불이 안 되고, 새 학교 것은 다시 모두 사야하니 이중 부담이라는 거다. 배우는 과목이 동일한데, 사용하는 교과서가 다르다는 이유로 두 번 값을 치르도록 방치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학부모들에게 검인정인지 국정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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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국정화? 교과서 쿠데타!"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 중단을 요구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전교조 회원들이 지난해 9월 25일 오후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개정 추진에 따른 교과용도서 구분기준(안) 토론회'가 열리는 서울교대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 권우성


물론, 교과서 문제만은 아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학년 초 3월이면, 과목마다 '부교재 시즌'이다. 과제나 복습 용도든, 방과 후 수업 때의 교재로 사용하든, 특히 수능에 출제되는 과목 중 참고서나 문제집 같은 부교재 없이 수업하는 과목은 거의 없다. 만약 '시즌'을 넘겨 전학 온 아이라면, 교과서와 함께 그 많은 부교재도 준비해야 한다. 이젠 놀랄 일도 아니지만, 부교재는 교과서 값의, 속칭 '따블, 따따블'이다.

"교과서가 국정이었다면 이런 '생돈'은 안 들었을 텐데, 정말이지 속상해요. 이사를 하고 학교를 옮긴 죄라면 딱히 할 말 없지만, 학년 초 두 학교에서 사라는 교과서와 부교재 값만 해도 수십 만 원이에요. 얼마 전 뜬금없이 한국사 국정 교과서 전환 문제에 관한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을 때, 학부모로서 찬성 버튼을 누른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에요."


듣자니까, 한 유력 언론이 한국사 국정 교과서 전환에 대해 여론조사를 한 결과, 반대가 다수인 학자와 교사, 일반인들과는 달리 학부모의 경우에는 찬성 비율이 더 높게 나왔다고 한다. 교사로서 여론조사 기관의 설문 내용이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여러 학부모들과의 대화 경험으로 미루어 그 결과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당장 학부모들에게 교과서가 검인정인지, 국정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 앞에서 검인정의 장점과 국정의 폐해를 아무리 외쳐본들, 빠듯한 형편에 주머니에서 뭉텅이 돈 빠져나가는 고통을 상쇄시키지는 못한다. 교육비를 절감하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개혁의 최고 목표가 된 지 이미 오래인 마당에, 교육의 본령 운운하는 건 시나브로 사치가 돼버렸다.

놀랍게도 많은 학부모들이 국정 교과서로 배우면 사교육비가 적게 들 것이라 여겼다. 전국의 모든 학생이 같은 교과서로 배우면, 거기에서만 수능이 출제될 것이고, 따라서 참고서도, 문제집도 한 권이면 충분하지 않겠냐는 거다. 봉건왕조 시대 사서삼경 달달 외워 과거 시험 치르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인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수 백 만의 아이들에게 동일한 교과서로 똑같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이 얼마나 퇴행적이고, 폭력적인가에 대한 성찰이 아예 없는 셈이다. 무릇 교과서는 지식을 확장시키기 위한 기초 도구로서, 한창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길러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국정 제도를 채택하지 않는 이유다.

이를 접어두고라도, 과연 국정 교과서로 전환되면 사교육비가 줄어들까. 이에 수긍하는 교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천문학적 사교육비는 서열화한 대학과 일렬로 줄 세우려는 수능의 문제인데 애꿎게 교과서만 탓하는 셈이라며 다들 황당해했다. 사교육비를 줄이자면, 국정 교과서 전환 문제보다 차라리 수능에 절대평가 도입 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며 입을 모았다.

국정으로 바꾸면 공부하기 쉬울 거라는 아이들

국정 교과서 전환에 찬성하는 학부모들의 상당수는 조변석개하는 입시제도와 사교육비 광풍 등 우리 교육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표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떻든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바람이다. 한 교사는 국정 전환이 되면 좋은 점이 딱 하나라고 했다. 학년 초 교과서 출판사 사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교무실을 찾아와 치근대는 일은 없어질 것 아니냐는 것이다. 순전히 교사의 입장에서 던진 농담이다.

수업시간, 슬쩍 손들어보라며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찬성이 훨씬 많다. 오로지 사교육비를 걱정하는 학부모들과는 딴판이지만, 이유가 한결 같은 건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구동성 시험 공부하기 쉬울 것 같다고 말한다. 더욱이 학교마다 교과서는 다른데 시험은 똑같은 것으로 치르는 건 공평하지 못하다는 불신도 깔려있다. 어떻든 한쪽은 유리하고, 다른 한쪽은 불리할 것이라는 거다.

학벌의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고 수능 한 방으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는 사회에서, 모든 교육과정과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기준은 시험 결과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느냐보다 시험에 도움이 되느냐와 '공평한지' 여부가 훨씬 더 중요하다. 한 교사는 전국에서 동시에 같은 시험지로 치러지고 숫자로 점수가 매겨지는 수능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우리 교육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공부 깨나 한다는 어떤 아이는 한술 더 떴다. 나중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데에도 훨씬 수월할 것이라며, 특히 한국사만큼은 국정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가까운 친척 형이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날 국정 교과서를 어렵사리 구해 공부하고 있다는 경험도 덧붙였다. 그 시절 과목 이름은 '한국사'가 아니라, 그냥 '국사'였다.

일본 사례 빗댄 친구의 한마디에 설득당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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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피켓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 중단을 요구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전교조 회원들이 지난해 9월 25일 오후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개정 추진에 따른 교과용도서 구분기준(안) 토론회'가 열리는 서울교대 사향문화관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 권우성


국정에 견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가능하다는 검인정 제도의 핵심 논리가 시험에 찌들어버린 아이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들에게 여러 종의 다양한 교과서가 수능에 더 도움이 된다는 걸 보여주어야 비로소 수긍하게 될 것이다. 학부모들에겐 사교육비 절감이 그렇듯, 아이들에게는 '수능 대박'이라는 결과가 교육의 유일한 '선'이다.

국정 전환 찬성으로 쏠린 교실 분위기를 순간 반전시킨 한 아이의 당찬 발언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는 공부는 못해도 사회에 대한 관심은 누구보다 많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잠자코 듣던 친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의 숱한 '논리적' 설명에 콧방귀 뀌던 아이들이, 일본의 사례를 빗댄 친구의 한 마디 말에 완전히 설득 당한 것이다.

"너희들은 뉴스도 안 보니?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도 부정하고, 독도도 일본의 영토라고 명시한 교과서를 승인했다고 하잖아. 우리처럼 검인정 체제라는데도 저 지경인데, 만약 국정이었다면 아예 '선전 포고문'처럼 쓰지 않았을까? 정부가 교과서를 제 입맛대로 뜯어 고치는데, 우리라고 안 그럴까. 너희들 국어시간에 '반면교사'라는 말도 안 배웠니?"
#한국사 국정교과서 전환 #교육부 #국정교과서 전환 여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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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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