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명 죽는 모습 생중계하는 나라... 잠시 떠나고 싶다"

[인터뷰] 프리랜서 삽화가 석정현씨 세월호 추모영상 화제

등록 2015.04.19 14:54수정 2015.04.19 14:54
57
원고료로 응원

"이것은, 보편적인 이야기 입니다" 프리랜서 삽화가 석정현씨가 세월호 1주기인 4월16일 공개한 영상 "이것은, 보편적인 이야기 입니다" ⓒ 석정현


지난 4월 16일에 공개된 5분 3초짜리 짧은 영상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프리랜서 삽화가 석정현(40)씨가 SNS에 공개한 영상이다. SF만화 <귀신>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학생들과 의료사고로 사망한 고 신해철씨가 천국에서 만나 노래를 부르는 그림을 지난해 12월 공개해 화제가 됐었다.

이번 영상은 석 작가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녹화해 편집한 것이다. 꼬박 이틀에 걸친 작업을 빠르게 재생해 5분 3초로 압축했다. 영상은 19일 오전 현재 페이스북에서만 2만7천 여 차례 공유됐다. '좋아요'를 누른 숫자가 3만이 넘는다.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 보면서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a

천국에서 만난 신해철과 단원고 학생들 석정현 작가가 지난해 12월 공개해 큰 화제가 됐던 그림. 단원호 희생자들과 신해철씨가 천국에서 만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지난 17일 인터뷰에서 그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나 신해철씨나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이들이 자꾸 어이없는 일로 사라져버리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 석정현


영상은 비어있는 미색캔버스에서 시작한다. 석 작가의 동그란 마우스 포인터가 캔버스 위를 쓱쓱 훑고 지나가면 눈을 감을 채 몸을 잔뜩 웅크린 신생아가 나타난다. 다시 포인터가 좌우상하로 움직이자 아이의 입 안에 이가 돋아났다. 새끼 손톱만한 이를 내보이며 활짝 웃기도 한다. 마우스가 이곳저곳 빠르게 스쳐지나가면서 어느덧 아이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은 딱 거기까지다. 옅은 갈색의 교복 상의 위로 주황색 구명조끼가 그려지는 순간, 영상은 '블루스크린'이 뜬 채 끝나버린다. 마우스 포인터가 구명조끼를 그리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복선처럼 배경음악에서 빗소리가 들린다. 작가는 영상에서 세월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보다는 블루스크린 안 수백 개 글씨 중에 다음 단어를 슬쩍 넣어놨다. '416 ERROR'

지난 17일 늦은 오후,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석 작가는 세월호 참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그 역시 '부모'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20개월짜리 아들을 둔 그는 "20년 가까이 키운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게 얼마나 끔찍하겠느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슬픔에 공감하지 않고 '이제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환멸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한국을 떠나 있을 계획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생각이 다르다는 것 자체만으로 적으로 몰아붙이고 괴물로 치부하는 모습에 극심한 피로를 느껴서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드러낸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 중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로 "보편적인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을 꼽았다. 이웃이 아이를 잃으면 마땅히 슬퍼해주는 아주 상식적인 일이다.


석 작가가 이번 영상에서 말하고 싶은 것도 그 지점이다. 그가 영상 맨 마지막에 새겨 넣은 문장, "잊고 싶다, 잊을 수만 있다면"이 뜻하는 대로 이 고통은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만 잊으라'고 말하는 건 그에겐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다. 손으로 턱을 괸 채 조근 조근 말을 이어나가던 그의 목소리가 이 대목에서 힘이 들어갔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 이번 영상에서 무얼 말하고 싶었나?
"나도 20개월짜리 아이를 키우는 부모다. 직업이 프리랜서이다 보니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많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다 보면 그 모습 하나하나를 놓치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자식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2년차인 제가 이 정도인데, 20년 가까이 키운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유가족들은 얼마나 끔찍했을지...

사랑하는 사람을 명확치 않은 이유로 잃고 슬퍼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걸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또 세월호 이야기만 꺼내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데, 이건 정치적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마땅히 공감해주어야 하는,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다."

"세월호는 치통... 참고 살다가도 어느 순간 울컥"

a

프리랜서 삽화가 석정현 작가 석정현 작가가 지난 4월 16일에 공개된 5분 3초짜리 짧은 영상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맞춰 공개한 이 영상은 19일 오전 현재 페이스북에서만 2만7천 여 차례 공유됐다. '좋아요'를 누른 숫자가 3만이 넘는다. ⓒ 손지은


- 언제부터 구상한 것인가?
"세월호 참사가 막 발생했을 때는 저도 슬퍼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몇 개월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이만큼 슬퍼해줬으니 할 만큼 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은은한 치통 같았다. 계속 껴안고 살다가 어느 순간 화가 확 치밀어 이를 뽑아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울컥 드는. 그 계기 중 하나가 지난해 신해철씨가 의료사고로 허무하게 떠난 일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나 신해철씨나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이들이 자꾸 어이없는 일로 사라져버리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반복되는 악순환에 환멸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차근차근 구상했다."

-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보는 것 그대로다. 내가 이틀 동안 그리는 과정을 약 5분 3초 안에 빠르게 보여준 거다. 배경음악 삽입 등 영상 편집은 아내가 했다. 아내가 음악을 고르는 데만 하루가 걸렸다. 10여 곡이 후보군이었는데, 그 노래들 중 '타임스탑(Time Stop)'이라는 제목을 보고 머리가 '띵'했다고 한다.

영상에 이 곡을 입혀서 보니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마치 딸은 잃은 아버지가 딸의 어린 시절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다가 점점 분노가 치미는 느낌을 받았다. 그 부분이 제작 의도와 잘 맞아 떨어져 선택했다.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들 중에서도 사운드 역할이 컸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렇게 꼬박 3일 동안 작업한 뒤 4월 16일 오후 11시 59분에 페이스북에 올렸다."

-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정인의 얼굴인가?
"처음에는 특정 단원고 희생자 중 한 명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다. 몇몇 유가족에게 자제분의 얼굴을 써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하기도 했다. 사진까지 받아서 봤는데, 한 사람의 이야기로 국한시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평범한 얼굴을 가진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 단원고 희생자 아이들의 얼굴에서 조금씩 따오기도 했다."

- 올린 지 10시간 만에 페이스북에서만 1만 건 이상 공유됐다. 사람들이 뜨겁게 반응하는 이유가 뭘까?
"지난해 '신해철과 단원고 아이들'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반응이 좋아 감동적이다. '세월호'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 노란 리본 역시 넣지 않았다. '이건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라고 노골적으로 전달하면 그 자체로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봤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구나,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찡했다."

"300명이 죽어가는 모습 생중계... 전 세계 이런 예가 있을까"

- 세월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나?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던 길에 차에서 처음 참사 소식을 들었다. 그 때 다들 구출됐다고 해서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보임이 알려지고, 배가 조금씩 가라앉는 걸 봤다. 그 안에 300여 명이 탔다는데, 그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걸 생중계로 지켜봤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전 세계에 이런 예가 있을까 싶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아 '멍'한 상태였다.

나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다. 'VTS(해상교통관제센터)'가 어쩌고 하는 그런 소리는 잘 못 알아듣는다. 진상 규명을 위해 투쟁을 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만 하자는 말은 하면 안 된다. 옆집 아줌마가 자식이 죽었다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통곡하지는 못할망정 '자식은 가슴에 묻는 거예요' 따위 말은 하면 안 된다. 그건 상식이다."

-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당신의 삶에도 큰 변화가 있나.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뀐 건 아니다. '2도'쯤 틀어진 거 같다.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나는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잘 살아왔고, 외국 나가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런데 떠나고 싶다. 실제로 중국에 잠깐 나가있으려고 알아보고 있다.

세월호 사건 이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 자체만으로 적으로 몰아붙이고 괴물로 치부한다. 보수와 진보 둘 다 마찬가지다. 서로 날을 세운다. 물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거나 한 건 없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피곤하다."

- 세월호 참사 이후 지난 1년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엉뚱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리다 보면 질리는 순간이 있다. 마감시간은 임박했는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을 때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아유, 내가 그렇지' 하면서. '작업 빨리하는 방법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매번 내 대답은 왕도가 없다는 것이다. 성급하게 색칠부터 하면 나중에 오히려 고칠게 더 많아진다. 일단 순서대로 스케치부터 하고, 다듬고 색칠하는 거다. 순서대로 하나씩 처리하는 게 제일 빠른 길이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도 그렇다. 나는 제도를 고치기 이전에 일단은 우리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누군가 슬퍼한다면 같이 슬퍼하고, 누군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는 거다. 그게 첫 번째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이 남은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사회가 위로해야 한다. 그런데 국가가 이 역할을 해주지 않고 있다. 너무 참담하다. 그러면 국민이라도 대신 위로해줘야 하는데, 그만하라고 하면... 그들이 너무 외롭지 않겠나?"
#석정현 #세월호 #단원고 #페이스북 #귀신
댓글57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